[출처: 텔레그램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
성폭력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강의를 할 때, 나는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힘과 권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다룬 다음, 남성과 여성의 구분에서 발생하는 위계가 그중 하나임을 짚으며 보다 약한 존재-취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 여자, 동물 등등…-를 멋대로 대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 성폭력을 행하게 하는지 살펴본다.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겠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기 위해 받는 교육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설명은 결론적으로 착하게 살자는 지루한 명령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실천 방안을 나누는 대목에선 조금 맥이 빠지게 된다. 성폭력 영상을 보지 말고, 누가 차별적인 말을 하면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할 수 있어서 하는 것들을 윤리적 판단에 따라 하지 않기로 결정해야 옳다는 결론. 몰라서 실천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실천하지 않는 편이 즉각적인 이득이 되는 세상이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경우가 많을 텐데, 너무 한계가 명확한 how to라고 느껴져 가끔 강의 도중에 속이 안 좋아진다.
그래서 일단 강의실 바깥으로 나오면 법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예방되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이미 범행을 저질렀거나, 교육으로 변하지 않은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을 내리기를 요구하는 액션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처벌 역시 국가가 갖는 힘과 권력이라는 측면만 생각해 봐도 법이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서처럼 “여기 피해자가 있다. 사람을 이렇게 대해선 안 된다”는 말이 처참할 만치 무력해지는 순간, 엄벌을 촉구하며 법관의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외에 무엇이 더 가능하단 말인가? 그게 좋다거나 바람직한 지향점이라는 뜻이 아니라, 정말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다.
지난 26일 박사방의 주범 조주빈이 1심 징역 40년 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소식이었기를 바란다. 전에 없던 수준의 형량이 나오기까지 고생한 활동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시점에서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이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부분에 이견이 없다. 다만 이전에 있었던 다른 성폭력 재판 결과를 들었을 때와 같이, 여전히 어딘가 충분치 않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면 더 나았을까? 나는 “죄인 조주빈, 악인 조주빈의 삶은 모두 끝났으니 (중략) 악인의 삶에 마침표를 찍고 새롭게 태어나 반성하겠다"는 조주빈의 최후 진술 등을 읽으며 이 갑갑함의 정체를 더듬으려고 시도해 보았다.
[출처: 텔레그램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
성폭력 범죄는 악한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 인식에서 비롯된 현상이기도 하다. 조주빈은 특별한 괴물이라서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다. 그의 본질은 평범한 한국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놀랍게도 이는 조주빈의 변호사가 그를 변호하기 위해 가져왔던 페미니즘의 언어 중 하나다. 조주빈의 범행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며 텔레그램 성착취가 성립할 수 있었던 사회문화구조를 참작해야 한다는 말을 바로 그 사회문화구조를 강화하는 쪽에서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쨌든 조주빈은 이 변론과 별개로 끝까지 범행을 저지른 스스로를 (대단한) 악인으로 추켜세우는 동시에 현재의 자신과 분리하며 1심을 마무리했다.
조주빈은 잡히기 직전까지 수사에 혼동을 주려고 가명의 입장문을 올리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잡히고 난 직후에도 허세를 부리며 반성의 기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를 드러냈다. 그의 반성이 만들어진 것은 판사님을 향한 1일 1개의 반성문을 쓰면서부터였다. 보통 재판 과정에서 반성이란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도 사라지는 것이다. 반성하는 게 감형에 유리하면 열심히 반성문을 쓰고, 반성할 필요가 없다면 끝까지 부인한다. 피해자에게 사과할지 말지도 로펌의 판단에 따라 정해진다. 나는 조주빈의 반성이 애초에 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선고가 난 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아직 선고가 남은 재판이 있으니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잡히지 않은 범죄자들을 낱낱이 색출해 처벌해야 한다.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도 도모하고, 그 일환으로 교육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알 것도 같은데, 글쎄……. 끝나지 않은 것 중에 내가 모르는 것들을 오래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