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6월, 구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구로동맹파업 20주년 기념 정신계승 대토론회 열려



"대우 노동조합 탄압은 80년의 저 무시무시한 노동조합 탄압을 되새기게 한다. 현 정권은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을 하나씩 차례로 깨부숴버렸다.... 80년 이후 5년간 우리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뚫고 일어섰다. 갖은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가 물러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번 대우 노조 파괴음모가 모든 민주노조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임금인상조차도 못하는 노동조합으로 비굴하게 살아남을 건가? 가만히 앉아서 민주노조가 차례로 깨져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건가?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 민주노조 선진노동자들이여! 함께 일어나 싸우자! 천만 노동자의 동지애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세진전자·청계피복·선일섬유 노조가 공동으로 발표한 '노동조합 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 中


구로로 향해야만 했던 그녀들

1985년 6월, 뜨거웠던 구로에는 누가 있었을까? 1985년 구로를 기억하는, 그곳에서의 처절했던 투쟁을 경험했던 여공들이 20년의 세월을 넘어 한 자리에 모였다. '기억, 기록, 계승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열린 구로동맹파업 20주년 정신계승 대토론회에서는 구로동맹파업에 함께 했던 4명의 노동자, 가리봉전자의 성훈화 씨, 효성물산의 김미성 씨, 대우어패럴의 권영자 씨, 부흥사의 문금래 씨의 증언대회가 진행되었다. 그녀들은 현재 주부로, 사회단체 활동가로, 지역운동주체로 그때를 기억하며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벗어나고 싶었던 공순이를 넘어 노동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투쟁했던 과정을 아프지만 소중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다.


80년대 구로로 돌아가보자. 그녀들의 어려웠던 가정형편은 그녀들을 어린 나이에 고향집을 떠나 구로로 오게 했다. 그녀들은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며, 그 속에서 소중한 꿈을 키워갔다. 효성물산에서 일했던 김미성 씨는 "저는 3남3녀의 셋째 딸로 태어났어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언니들은 모두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구요. 서울로 가면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공순이라는 말이 싫었거든요. 나도 돈 벌고 공부해서 공순이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빵하고 우유 먹으면서 기계처럼 일했어요" 그녀들은 가난한 삶이 싫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는 삶이 싫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기계처럼 일했던 것이다.

  대우어패럴 권영자 씨

이렇게 서울로 올라온 그녀들은 구로로 왔다. 대우어패럴의 권영자 씨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붙었지만 오빠의 대학등록금을 대기 위해서는 내가 포기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업학교를 갔고, 졸업식을 마치자 마자 커다란 관광버스가 와서 우리를 싣고 구로로 왔어요" 그 당시 구로공단은 노동자를 대거 모집하던 시기이다. "미싱사로 취직을 했어요. 월급을 10만원 준다고 했구요. 근데 정작 첫 달 월급이 6만 9천원 만 나온거예요. 그래서 친구들을 모아서 따졌죠. 다 나가겠다고 했더니 10만원 다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녀들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약속을 어긴 사장에 대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당연한 싸움이었다.


그녀들, 노동조합을 만나다

  가리봉 전자 성훈화 씨

1980년에 있었던 광주민주항쟁 이후 많은 학생운동가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이로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가 형성된 것이다. 학생운동출신 노동자들은 1980∼85년 경까지 1000명 이상이 노동현장에 투신해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70년대 민주노조활동을 통해 배출된 선진 노동자들도 비공개적으로 사업장 모임을 조직, 새로이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가리봉 전자의 성훈화 씨가 노동조합과 만났던 과정을 살펴보면 이를 잘 볼 수 있다. "노조 산하 독서회가 있었어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함께 했죠. 근데 5월 쯤 독서회에 있었던 2명이 자신이 서울대학교 졸업생임을 밝혔어요. 나는 노동자가 싫어서 빠져나가려고 공부하는데 이 친구는 왜 노동자가 되기를 선택했을까.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리고 노동자인 내가 더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부터 노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이렇게 만난 노동조합은 그녀들의 삶을 바꿨다.

1984년 구로지역에서는 민주노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85년에 들어 민주노조는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의 질을 개선하고, 노조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투쟁했다. 이에 대해 유경순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은 "이 시기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중요한 성과를 갖게 된다. 첫째, 고율의 임금인상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개선하게 됐고, 정부의 5.2% 임금가이드라인을 무력화 시켰다. 둘째,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단결의 힘을 실감했고 노조에 대한 인식 및 신뢰가 높아져 노조의 역량이 강화됐다. 셋째, 개별 사업장 내의 임금인상과정에 정부의 임금동결정책과 노동관계부처의 개입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너무나 당연했던 동맹파업, 축제 같았던 동맹파업

  효성물산 김미성 씨

그런데 85년 6월 22일,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 닥쳐 김준용 대우어패럴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간부들을 연행한다. 공안당국은 구로공단의 구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대우 노조의 뒷덜미를 치려했으나 이 사건은 오히려 엄청난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동했다. 노조 간부들이 연행된 그 날은 토요일로, 공교롭게도 공단 내 민주노조 간부들이 합동교육을 받는 날이었다. 대우어패럴 노조 대의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동안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청계피복 노조의 간부 200여명은 교육장소에서 밤새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월요일인 24일 오후 2시를 기해 동맹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한다. 효성물산의 김미성 씨는 "대우 노조 간부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대우 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로 전체의 문제다라고 생각했어요. 함께 싸우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드렸던 것이죠. 근데 구속되고, 회사 폐업되고 이럴거 알았으면 아마 안했을 거예요. (웃음) 파업이 시작되고 우리는 너무나 즐거웠어요. 미싱 안해도 되고,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마치 축제 같았지요" 그녀들의 동맹파업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흩어질 수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던 그녀들의 동맹파업은 6월 29일,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에서 닷새 동안 굶주리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작업장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되면서 막을 내렸다. 동맹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시위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370여 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00여 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 당했다.

  부흥사 문금래 씨

대우어패럴 권영자 씨는 "공장에서는 매일 아침 모두 모여 국민체조를 했어요. 체조가 끝나자 마자 파업을 시작하기로 했죠. 누가 알까봐 귓속말로 전달하고... 얼마나 나올까 걱정했는데, 100%가 다 참석했던 거예요. 신났죠. 근데 밖에서는 부모님 데리고 와서 나오라고 방송하고, 하루종일 고향생각나게 하는 슬픈노래를 틀어대고... 첫날부터 전기 끊고, 물도 끊고, 먹을 것도 없었어요. 우리는 외쳤어요. 정부는 왜 우리를 굶겨죽이려 하는가. 노동부 장관 물러가라. 회사는 부모 소환하지 마라! 6일 동안 물도 못먹고, 짐승처럼 지냈어요. 바닥에 떨어진 설탕을 주어먹기도 하고, 물이 내려가지 않는 화장실에 똥이 쌓여가고... 부둥켜 안고 많이 울었어요. 마지막 날 힘없이 다들 바닥에 누워있는데, 벽이 뚫리고 구사대가 들어왔어요. 우리는 서로를 안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 때 구사대들이 각목으로 머리를 얼마나 때렸는지...."고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그녀들의 투쟁 이후 회사는 문을 닫기도 하고, 그녀들은 블랙리스트로 찍혀 다른 곳에 취직할 수도 없게 되었다. 계속된 탄압으로 함께 했던 조합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때 흩어졌던 2000여 명의 조합원들과는 아직 연락이 잘 안된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들의 투쟁은 한국의 노동운동은 물론이며, 그녀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부흥사에서 일했던 문금래 씨는 "내가 그 투쟁을 겪고 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든 일도 참 많았지만, 잘못된 것을 보면 당당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 같아요. 공순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노동자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은 너무 어려웠던 일이지만 투쟁의 과정은 노동자의 주체성, 자주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으며 지금까지 나의 삶을 규정하고 있어요"라고 담담히 전했다.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의 중심으로

구로동맹파업 이후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 졌다. 각 사업장 모임에서는 복직투쟁 및 소식지 발간 등 노조복구를 위한 노력과 내부의 역량강화를 위한 학습을 했다. 그러나 동맹파업 이후 사업장 중심의 모임과 활동은 현장 노동자들과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지역차원으로 모아져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으로 이어진다. 유경순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은 구로동맹파업의 의의와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구로동맹파업의 의의는 동맹파업이 노동조합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당시 노동운동에 노동조합의 대중조직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경제적 요구를 바탕으로 정치적 요구를 제시했으며, 대중적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노동운동이 부문운동이 아닌 변혁운동의 중심임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연대투쟁조직의 지도력 부재, 투쟁 이후 엄청난 피해가 양산되고 그 사후조직이 미흡한 한계를 보였다"

  구로동맹파업의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증언대회에 모인 구로동맹파업 시기 함께 했던 조합원들의 반가운 인사는 행사 내내 이어졌다. 이런 만남은 25일 '20년 만의 해후, 아름다운 만남'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 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나라!"

동맹파업으로 해고된 4개 노조 노조원들의 7월 23일 가리봉 오거리 집회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 선언문 中

태그

구로동맹파업 , 20주년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꽃맘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학생

    구해서 보고 싶은데, 방법이 있나요?

  • 이꽃맘

    기념사업회로 연락해보시면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학생

    .

  • 구동파 사무국

    정성껏 써 주신 좋은 기사 잘 보았습니다.^^
    kuro85.org로 들어오시면 게시판->행사게시판 에 토론회 자료집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자료실에 당시 관련된 자료들을 올리고 있고 자료 수집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25일 행사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