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 주봉희

[인터뷰]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 시집 낸 주봉희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

무언가 채우고 싶은 욕망은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지만
후들거리며 저려오는 종아리 싸매 쥐고
여의도 한 모퉁이 싸잡아 안고 나뒹굴다가
하늘을 보면 숨바꼭질
참새란 놈이
여기가 뉘땅인데 누워 있냐고
찍 갈긴 참새똥에 일어나보니
아이고야 내 나이 오십이구나
<인생은 숨바꼭질 中>


'파견직 노동자의 상징' 주봉희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이 시집을 냈다. 그의 시집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이다. 98년부터 시행된 '파견직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에 의해 KBS 입사 후 정확하게 2년 만인 2000년 7월 1일 해고 된 그는 2004년 7월 1일 복직될 때 까지 5년 동안의 투쟁과 삶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의 시집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이 그대로 담겨 있으며, 5년 동안의 투쟁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투쟁하다 힘들어서 보내야 했던, 끝까지 버틸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보내야 했던, 투쟁하다 죽어서 보내야 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소주 한잔 하며 함께 불렀던 노동가요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지칠 때 옆에서 힘이 되어 주었던 동지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주봉희 위원장의 투쟁, 삶, 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가 일하고 있는 KBS 배차실을 찾아갔다. 그는 사무실 한 켠에 앉아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한가닥 미련마저 울컥 삼키며
쓸모없는 이 몸뚱아리 허공 위로 뒹구는
너 가엾은 낙엽과 같은 비정규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낙엽과 같은거야 中>


그가 해고되기 까지 KBS에서의 삶은 이 땅을 살고 있는 파견직 노동자가 느꼈을 모든 차별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한 시간들이었다. 주봉희 위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이중으로 파견된 노동자로 KBS에 고용되었었는데, 렌터카 회사에서 차랑 운전사를 묶어서 입찰을 했죠. 용역에서 렌터카로 파견되고, 또 KBS로 파견되고.." 그는 이렇게 KBS에 입사한다.

"지금은 방송차량 쪽에 정규직이 거의 없지만 그때는 정규직이 많았어요. 정규직은 마치 하나님처럼 움직이고, 우리가 모두 이름이 있음에도 우리를 부를 때 야! 용역!, 야! 렌터카! 이렇게 불렀어요. 95년도에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처음 가서 잘했을 때 있잖아. 비정규직들이 모여 있는 방에는 17인치 로타리식 흑백TV가 있었고, 정규직 방에는 29인치 칼라TV가 있었거든. 우리 방에는 채널이 없어서 박찬호 경기를 보려고 정규직 방에 갔다가 혼났지. 니네들 방에 가서 보라고 하데요(웃음)" 어떻게 보면 뭐 저런 식으로 유치하게 구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해 파견직 노동자들은 더욱 힘들었다.


그는 2000년에 해고되면서 자신이 왜 해고되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2000년 7월 1일 해고가 되었는데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요. 파견법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파견법이 뭔지 전혀 몰랐거든. 그래서 교보문고에 가서 파견법에 대한 책을 한 권 샀지.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인데 왜 우리가 보호받지 못하는가 알고 싶었어요. 책을 보니까 근무일수가 하루라도 넘어가면 직접고용한 것으로 본다라는 조항이 었더라구요. 아 이것 때문에 해고를 시키는구나. 그때부터 파견법은 파견직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법을 달달 외우고 다녔어요" 그는 파견법을 알리기 위해 제일 앞에서 투쟁하는 것은 물론이며,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글씨를 새기기도 하고, 얼굴에 색칠을 하고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노동조합 활동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한 절박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파견직이라는 신분으로 노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 처럼 보였다. "2000년에 노조를 만들었는데 계약기간이 되니까 조합원들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근데 언제부터 인가 파견법을 이용해서 방송국에서 교차사용을 하더라구요. KBS에서 2년이 된 사람은 SBS에 가 있고, SBS에 있던 사람은 MBC에 가있고. 그래서 다시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다시 조직하면 뭐하냐 조합비만 아깝다. 또 다 해고 될텐데 뭐하러 하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을 만나고 조직하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이런 과정을 거처서 방송사비정규운전직노조가 2002년 처음 건설된다. 이때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노동운동에서 처음 제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봉희 위원장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온 몸에 안고 싸움을 시작했다.

"조합원들을 만나러 현장에 가면 청경들이 잡고 때리고 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온몸에 고추장을 바른 적이 있었어요. 그럼 못 만지니까요. 나중에 씻으러 갔는데 손톱 밑에 고추장이 가득 들어가 있더라구요(웃음)"

향기 없는 사람들
축 늘어진 어깻죽지 너울거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춤을 추지
흐느적거리며
걸려 넘어질 듯 앙상한
종아리뼈에 사무쳐
이렇게 살다간
비정규노동자
희망조차 꿈 속에서나 찾아 헤메누나
<개 같은 세상에서라도 살고 싶다 中>


그는 2000년에 해고된 이후 그리고 파견법의 실체를 알게된 후, 5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 땅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노조원이 많을 때는 700명까지 있었어요. 근데 사실 다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생활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다들 떨어져 나가더라구요. 아침에 가보면 30명 줄어있고, 그 이튿날 가보니까 또 줄어있고, 결국에는 총무국장이랑 둘이 남았더라구요. 서울역에서 비가 엄청 쏟아지는데 총무국장이 깃발을 들고 둘이서 비를 쫄딱 맞으면서 투쟁한 날이 있었어요. 그날 총무국장이 들고 있던 깃발을 뺏고 그만 들어가라고 했어요. 나도 12월 까지만 하겠다고... 근데 그때 대상식품 비정규직 노동자 4명이 힘차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내가 저 사람들을 두고 그만두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일 년만 더 일 년만 더 하다가 5년이 지나간거죠"

그는 이런 투쟁의 과정을 시로 옮기기 시작했다. "2000년에 해고되고 나서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혼자 살다 보니까 저녁 집회 끝나고 나면 동지들은 다 흩어지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여의도에 남았어요. 뭔가로 메우고자 하는 충동이 들어서 가방에 항상 가지고 다녔던 노트를 꺼내서 벤치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의 시는 세상을 지켜보고 감상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의 시는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대공장 노동자들 처럼 큰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응어리 진 것들을 풀 곳이 많지 않았어요. 꾸역꾸역 밥을 먹어도 배만 부르고 가슴 속은 여전히 허한 것이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죠. 내가 본 현실은 비정규직이 불에 타야 정규직이 되는 세상이었고, 비정규직이 목을 메달아야 복직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시는 감상에 젖어서 쓴 것이 아니라 현장을 목격했던 5년 동안의 나의 삶을 쓴 것이라 생각해요"

초원의 푸르름이 넘실대는데
너는 아직도 어딜 헤매고 있는가
쥐어 뜯으며 살아가면 인생역전 될까
하고 많은 직업 중에 데모질이냐고
오늘도 터벅터벅 향하는 길목에
어느새 사쿠라꽃 휘휘 감은
여의도라네
<출근연습 中>


  주봉희 위원장은 KBS방송차량서비스에 2004년 7월 복직했다
그는 5년 만이 2004년 7월 1일부로 KBS 자회사인 KBS방송차량서비스에 복직하였다. 그는 현재 '방송국 차량 배차 반장'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파견직 노동자이다. "출근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적응도 안되고... 출근 첫 날 여의도 공원에 앉아서 술을 먹고 엉엉 울었어요. 그리고 집으로 가버렸죠. 5년 동안 나도 참 많이 변했었나봐요. 복직할 때 해고됐던 동지들을 복직시켜 줄 것을 요구했어요. 결국 12명의 동지가 복직되었죠. 하지만 안타까운 건 12명을 복직시키기 위해 또 다른 12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일자리를 늘려달라는 요구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파견직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하기에 복직한 주봉희 위원장의 앞에는 더 많은 일이 놓여 있었다. "5년 동안 동지들로부터 받은 거 그대로 다 돌려줘야죠. 나는 얼마 있으면 정년이지만 아직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그 친구들과 함께, 그 친구들을 위해 싸워야죠. KBS가 방송차 운전직을 직접 고용하라는 요구를 하고 싶어요. 예전에 그러했듯이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된 삶을 살수 있도록 싸워야 하는 거죠. 그리고 노동자들 투쟁이라면 내일처럼 달려갈 거예요. 그곳이 어느 곳이 되는 간에 말이죠" 그는 그의 시가 그러하듯이 항상 투쟁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쩌다 찾아오는 할멈 손이 그리워
태양이 내리쬐는 한 귀퉁이에
꽃을 피우면 왜 이리 못 생겼냐
지나는 길손 차 버리고
미안타 사과하면 아가리 찢어지나
나는야 파견 나온 비정규 나물인가베
그래도 나는 질기고 질긴
질경이인 것을
<밟히어도 나는 질긴 질경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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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직 , 시집 , 주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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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김민정

    안녕하세요.
    한국비정규노동센터입니다.
    주봉희 위원장 시집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10,000이고요.
    좀 비싸죠. 판매수익 전액은 비정규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쓰여집니다.
    연락처는 02-312-7488 입니다.

  • 한석호

    다시한번 축하합니다. 출판기념일날 일이 있어서 술도 못 마시고. 다음에 거나하게 한잔 합시다.

  • 주봉희

    한석호 동지도 화이팅

  • 강 성록

    시집 출판을 늦으나마 진심으로 축하 합니다.
    조만간 만나 십여년전의 일들을 안주 삼아 한잔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