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유연화, 노동자 모두 분할, 각개 격파"

[특별기획 : 2005년 한국의 노동자](1) - 시장화! 유연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시장에 있다. 의식주에 교육, 의료, 문화까지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아직 매매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곧 매매될 것이다. 국경도, 지역도, 문화도, 어떤 경계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시장화! 유연화! 자본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나는 얼마일까. 나는 얼마까지 올라갈까. 비정규직으로, 특수고용직으로, 하청노동자로, 이주노동자로, 여성노동자로. 분사 외주, 하청, 도급에 하청의 재하청까지, 실업과 고용불안, 최저임금에 차상위계층을 오가며, 나는 얼마나 더 팔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유연해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의 골격, 노동유연화

작년 12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마산공장의 노동자 김춘봉 씨, "24년간 이 회사를 위하여 몸과 청춘을 받쳤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렇게 밖으로 쫒겨나게 되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미워할 수도 없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정말로 죽이고 싶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해도 좋다는 말인가." 김춘봉 씨는 5장 짜리 유서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고 김춘봉 씨는 명예퇴직을 강요하는 한진자본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다 촉탁직으로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명예퇴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회사는 촉탁직 2년이 다 되어가자, 사전 논의도 없이 고인이 근무하던 업무파트를 외주용역에 넘기기로 했고, 고인이 요구하였던 촉탁직 유지를 거부하였다. 고 김춘봉 씨는 유서에서 이러한 현실이 "무섭다"고 썼다. 우리 사회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는 고 김춘봉 씨의 죽음 소식과 함께 무섭고 두려운 2005년을 맞이해야 했다.

신자유주의의 골격은 '노동유연화'이다. 그리고 경쟁과 효율,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를 작동시키는 근원이 '노동유연화'이다. 세계 질서 재편에 나선 제국주의 국가가 전쟁을 불사하고, 초국적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힘의 원천, 그것도 '노동유연화'이다.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유착해서 정경언검의 추악한 지배사슬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경에도 들여다보면 '노동유연화'가 작동하고 있다.

임금, 기능, 수량 등 노동유연화 여부가 이윤의 크기를 규정하는 세상이 열렸다. 오늘날 한국 사회 질서를 위로부터 재편하고, 사회구성원의 공동체적 삶을 바닥까지 유린하는 이념, 이데올로기, 정책, 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유연화'는 우리 사회 절대 다수 사회구성원의 삶을 사슬로 옭아맨 채 놓아주질 않고 있다.

8월 4일 금융감독원은 2004년 결합 및 연결 재무제표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인 23개 대규모 기업의 전체 매출액이 505조 원으로 1년 전보다 18.1% 늘었다. 삼성그룹이 144조 원, LG 72조 원, 현대자동차 53조 원, SK 43조 원, 한화 18조 원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당기순이익이 33조5천5백22억 원으로 전년보다 73.2% 늘었고, 영업이익은 42.4%, 경상이익은 105%로 늘어났다. 부채비율도 평균 241%로 36% 떨어져 재무구조도 좋아졌다는 발표다. 작년 한해 경제위기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경제성장률도 목표에 못 미쳤는데 매출도 늘고 순이익도 커졌다.

"노동시장 유연화 높여라" 자본가들 입만 떼면 염불

그런데 기업은 많은 현찰을 쥐고 있으면서도 투자를 안 한다. 이상할 게 없다. 신자유주의는 저투자, 저성장, 고용불안을 기본 속성으로 한다. 기업이 현금을 손에 쥐고도 신규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은 적대적 인수합병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사주 매입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초국적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금융자본이 기업경영의 주도권을 손쉽게 장악하게 되는데, 이때 금융자본은 경기를 안정화시켜 물가상승률을 낮춰야 이득을 보장받는다. 말하자면 금융자본은 경제성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8월 16일 광주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한국경제가 성장하고 기업이 발전하며 일자리를 계속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향상, 임금 안정, 신규 투자 확대라는 대명제에 노사가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부가 외국인 직접 투자를 적극 추진하는 한편 국내 대기업이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시장여건을 조성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이 정부를 향해 투자 활성화를 위한 시장 여건을 조성해달라는 주문, 즉 '글로벌스탠더드'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요구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정부는 지금까지 수 차례에 걸쳐 투자활성화대책을 내놓았고,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와 탈규제를 위해 경제자유구역법, 기업도시법, 공정거래법, 신자유주의투자3법(기금관리기본법, 민간투자법, 국민연금법) 등 법제화를 추진해왔다. 비정규법안과 로드맵 관련 법안까지 처리되면,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와 관련한 법제화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 위에서 한국 자본주의에 있어 과거 어느 때보다 탈규제와 유연화로 기업에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졌고, 재벌이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시중에는 400조 원이 넘는 현찰이 돌아다닌다. 그런데도 투자 위축, 성장률의 둔화, 상시적인 실업과 고용위기가 해소되지 않는다. 증시와 부동산을 널뛰기하며 만성적인 경제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면서 자본은 더 많은 탈규제, 더 많은 유연화를 요구한다. 유연화의 화살은 어김없이 노동자를 향한다.

단기주의와 구조조정의 상시화로 불안정노동 확산

초국적 금융자본의 세계적 지배구조의 수립은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왔지만, 한국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편입되었다. 이에 대해 장귀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은 "단기주의의 확산과 구조조정의 상시화로 노동의 불안정화를 가져오고, 경쟁성이라는 원리 위에 공공성은 무시되고 높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투자는 기피된다"고 말했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자본 축적 전략 및 지배구조의 결과로, 자본에 대한 법적 보호와 정규직의 양보 종용 등 노동의 불안정성을 확산한다는 지적이다.

노동유연화는 불안정노동을 야기한다. 불안정화의 확산 경로는 기업들이 신규 인력을 비정규직을 충원하는 방식과 하청, 용역, 분사, 하도급을 통한 인력 수급, 민간서비스산업이나 IT산업 등에서의 신종 비정규직의 확산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로를 통해 확산되는 비정규직에 대해 장귀연 정책위원장은 "자본이 불안정노동을 확산시키는 이유는 단지 비용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 분할 및 통제의 목적 또한 강하게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분할 뿐 아니라 비정규직 안에서도 위계적 질서를 만들어 분할 통제의 재물로 삼는다는 지적이다.

그래서일까, 자본의 노동유연화 공세와 관련, 민주노조운동 안으로 오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다. 작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민주노조운동 내부에는 '사회적 교섭'을 둘러싸고 찬반 세력간에 큰 대립이 발생했다. 특히 몇 차례 이어진 대의원대회에서는 '사회적 교섭'을 강행하려는 이수호 집행부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의원 간에 물리적 마찰까지 불거졌다. 노동운동의 노선 대립이기도 하고, 사회적 합의주의를 둘러싼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이견이기도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노동유연화 공세와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월 22일 '사회적 교섭'과 관련한 민주노총 내부의 대립이 정점을 이루던 즈음, 교수 58명은 사회적 교섭안 폐기를 촉구하는 성명을 낸 적이 있다. 당시 성명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한겨레 기고를 통해 '사회적 교섭'이 노동 쪽이 '노동유연화'를 인정한 기초 위에서만 이뤄진다며 사회적 교섭 문제가 노동에 있어 하나의 전술로 이해되는 것을 경계했다.

김세균 교수는 기고글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 적극 대응하여 개방적 통상국가 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무현정권은 파견근로제의 확대와 해고요건의 완화 등을 통해 한국의 고용체제를 '비정규직 중심 고용체제'로 전면 개편, 노동유연화 공세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려 하고 있다"고 짚고, "오늘날 같이 권력과 자본이 신자유주의 공세를 펴는 조건 속에서 사회적 합의란 어떤 경우이든 노동 쪽이 '노동유연화'를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견해였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 누구나 인지

지난 3월,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노동시장 현안과 정책과제'는 노동유연화가 빚어낸 오늘날 노동시장의 왜곡 굴절된 실태를 담고 있다. △경제·노동시장 양극화(경제 전반에 걸친 양극화, 성장의 분배개선효과 및 성장잠재력 약화, 외환위기후 비용축소형 구조조정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경제 주체들의 시평선이 단기화) △좋은 일자리 창출능력의 저하(성장의 고용창출 효과 약화, 대기업의 일자리 창출 능력의 저하,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고 안정된 제조업 일자리의 감소, 저부가가치 서비스업 위주의 고용 증대, 영세 자영업 부문의 구조조정)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증대(불안정한 일자리의 증가, 실직 위험의 증가, 노동 이동과 경력 변동, 단기근속형 취업구조)로 요약된 보고서는 노동시장의 불안정에 따른 위기에 자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책 방향에 대한 과제를 제시한다.

나아가 이 보고서는 "양질의 일자리 감소와 비정규직 중심의 일자리 증가, 노동시장의 양극화, 전통적 자영업 부문의 구조조정 가속화, 근로빈곤 문제의 대두 등에 따라 노동시장의 문제가 노사관계적 갈등, 나아가 사회적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 대두"에 대해 거론한다,

예의 걱정대로 사회적 빈곤에 따른 사회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8월 12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 나라 빈곤층 규모는 작년의 500만 명보다 훨씬 늘어난 71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5%로 추산된다. 716만 명은 4인 가구 기준 월소득이 최저생계비(113만6천 원) 이하인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와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차상위 계층이다.

빈곤층이 몇만 명인가의 규모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빈곤의 심화에 따른 사회 모순이 어떤 양상을 띨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노무현정권의 양극화 해소 방안이나 노력이 어떻게 진행될지, 사회적 빈곤에 따른 사회 모순의 심화를 어떻게 관리해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노동유연화 공세의 전향적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빈곤층의 확산과 이에 따른 사회모순의 심화 경향은 좀처럼 극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의선 빈곤사회연대 사무처장은 "빈곤문제를 절대빈곤으로만 한정지을 수는 없지만 절대빈곤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말하고 "노동시장 유연화와 저임금 문제와 더불어 주거, 의료, 교육에 있어 공공성이 부재한 상황 등 빈곤을 양산하는 구조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유의선 사무처장은 사회적 빈곤은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차별받는 것, 이주노동자가 차별받는 것, 여성이 차별받는 것 등 사회구조적 배제를 통한 빈곤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빈곤이 물질적 가난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배제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양극화기구, 신자유주의 전략기조 제기보다, 보완물로서의 '분배' 기조 우려

이런 가운데 참여연대와 민주노총이 주도해서 추진중인 '사회양극화 해소 연대기구 구성'(양극화기구)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양극화기구는 7-8월에 걸쳐 두 차례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민중 시민사회단체 실무책임자 회의'를 진행하고, 지난 8월 19일에는 1차 정책워크샵을 가졌다. 양극화기구는 △양극화 해소, 사회통합을 사회개혁의 중심과제로 부각시키고,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연대 투동 형성 △사회양극화의 해소를 위한 공동의 경제사회 개혁 요구 쟁점화, 제도화를 목표로, 노동, 민중운동, 시민운동 각계각층의 공동 정책협의 및 실천 기구의 위상을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정책워크샵에서 '노무현정권의 사회정책과 비정규직'을 발표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오늘의 비정규직 문제가 단순히 지구화, 경제 환경 변화의 불가피한 산물만은 아니라고 짚었다. "한국 정치사회에 내재적인 노자간의 극도로 기울어진 힘의 역학, 자본이 이윤추구를 위해서는 언제나 필요할 때 사람을 해고하고, 법을 어기거나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는 법과 제도, 그리고 정치 노동 엘리트들의 사용자 편향적 시각들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회정책과 비정규직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 노동유연화의 구조적 측면보다는 법과 제도, 주체의 문제에 무게를 두는 견해다. 일차적으로는 '사회정책'의 존립을 부정하는 대자본과 부자언론의 경쟁력 지상주의, 시장근본주의가 문제이지만, 다음으로는 현 정권과 정치권이 문제이므로 모든 책임을 정부와 정치권에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책워크샵에 제출된 사업계획에 따르면 '참여정부의 무능과 정책부재'를 비판하는 대목이 눈에 띤다. 가령 경제사회정책에 있어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등 정권 내 개혁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대신 재벌의 영향 아래 있는 관료기술적 결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거나, 대규모 재정 투입을 통한 빈곤 문제 해결책이 물질적 급부를 일시적으로 늘리는 미봉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아울러 대연정에 대해서는 "현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보수세력과의 '교환의 정치'를 통해 돌파하겠다는 것으로 사회통합적인 정치와는 거리가 먼 퇴행적 정치 구상"이라고 잘라 말했다.

양극화기구는 "집권 중반을 넘긴 현 정부 임기 내에 사회통합을 위한 단절적 전환의 국면을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양극화 해소'와 '사회통합적 경제사회개혁'을 일관된 정치적, 정책적 프로그램으로 추진함으로써, 권력 교체 국면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현'을 중심의제화시킬 필요"를 제기하며 정치 및 정책기조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일을 통한 빈곤탈출' 등의 정책 입안자로 알려진 이정우 전 정책기획위원장은 8월 2일 청와대브리핑에 '분배와 성장은 동행(同行)' 제하의 글을 기고했다. 이정우 전 위원장은 '성장과 분배 논쟁'에서 △분배에 치중하여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참여정부 때문에 분배, 빈곤이 악화됐다 △참여정부는 성장, 분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쳤다 등 참여정부에 쏟아진 비판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조목조목 따진 바 있다. 이정우 전 위원장의 기고 내용은 양극화기구가 주장하는 맥락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이렇게 양극화기구가 추진되는 데 대해 강동진 사회복지와노동 편집위원장은 "시민사회와 노동진영이 실질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민중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의 쟁취에 관심과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될 수는 있겠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그러나 양극화와 사회적 빈곤의 원인인 신자유주의 전략기조에 대한 문제제기보다, 그것의 보완물로서의 '분배' 기조 실현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합의와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한 사회적 기제로서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강동진 편집위원장은 "양극화가 제도나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가 주된 원인으로, 따라서 사회적 빈곤의 처방 역시 노동유연화 공세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민주적 사회적 규제의 강화를 꾀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리해고 유연성 협박

노무현정권은 노동유연화에 따른 사회적 빈곤과 양극화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일이 많은데, 이번 8.15 경축사에서도 '해고의 유연성'을 위해 노동조합이 결단할 것을 강요해 비난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업이 어려움에 처해도 정리해고가 어려운 제도 아래서, 비정규직과 대다수 노동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는 현실"이므로 "막강한 조직력으로 강력한 고용 보호를 받고 있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것을 종용했다. 노동조합이 해고의 유연성을 열어주면 정부와 기업은 정규직 채용을 늘리고 다양한 고용기회를 만들어서 대타협을 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협력도 반드시 성공"하자는 제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월 국정연설에서도 "비정규직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규직에 대한 강한 고용보호를 양보하지 않고 비정규직의 보호만 높여달라고 하면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연대임금제나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제안 없이 어떻게 노동자간 임금 격차를 해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노동자의 반발을 산 적이 있다.

지금 자본은 유례 없이 높은 매출과 당기순이익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오직 대기업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의 결과이자, 중소자본에 대한 압박, 그리고 중소자본 노동자들과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의 저임금의 결과이다. 대기업 노동자들 역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높은 노동강도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납품단가의 하향 조정을 요구받고, 중소자본은 여기서 빼앗기는 것을 다시 노동자에게 부담을 전가한다. 사태의 본질은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나 이기주의가 아니다. 대기업 자본의 중소자본 수탈과 중소자본 노동자에 대한 위협, 그리고 정규직을 공격하며 동시에 비정규직을 위협하는, 교활하고 치밀한 정규직-비정규직 분할 통제 기도가 핵심이다.

노동유연화, 로드맵 추진과 이중 삼중의 착취 구조의 고착화

현장에서 자본은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를 분할하는데 정규직-비정규직의 차별을 십분 활용한다. 비정규노동법 개악은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일반적 고용 형태로 만든 후 그 속에서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은 "비정규직이 일반적 고용 형태가 되면 근로기준법 등은 특수한 노동자에게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법이 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특수한 노동자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자본과 정권이 노리는 것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정규직을 대변하고,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시민단체와 정부가 비정규직에게 시혜를 베풀고 관리하는,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가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규직 노동자 고임금론을 들어 비정규직을 보호하고 차별을 줄인다는 효과를 노리는 가운데, 비정규직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을 관철한다는 것이 자본과 정권의 로드맵 법제화의 주요 전술이라는 지적이다.

이성우 공공연맹 사무처장은 노무현정권이 비정규법안과 로드맵을 강행하는 것에 대해 "노동자를 모두 개인으로 해체시켜 단결을 깨뜨리고,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천박한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하반기 비정규법안 추진으로 노동조합운동을 철저히 와해시키려는 것"이라고 압축했다. 비정규법안에서 나아가 노동유연화의 여러 제도적 내용을 담고 있는 로드맵이 법제화되고, 노동조합운동이 제도 내적으로 흡수되면 노동조합운동을 통한 노동자의 권리 실현은 엄두를 못 낸다는 이야기다.

노동유연화가 사회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은 비단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만이 아니다. 노동유연화 공세가 계속되면서 특히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는 이중 삼중의 착취 구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고용허가제 시행 1년을 맞는 지금, 현재 전체 35만 이주노동자 중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55%를 상회하는 20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노동자는 사업장 이동 제한과 1년 단기계약에 묶어 사업주의 부당한 인권침해와 저임금, 임금체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 있다.

샤킬 이주노동자대책위원장 직무대행은 단속 실태를 묻는 질문에 "단속이 예전보다 심해지고 있고, 계획적으로 표적 연행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안산의 경우 낮에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도라고 한다. 샤킬 직무대행은 "대부분이 밤에 일을 하고 낮에는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 단속할 때 낮에 이주노동자들이 자고 있는 방을 열고 연행해 가기도 한다"며 표적 단속에 강한 항의 의사를 표했다.

이렇게 대다수 이주노동자는 단속추방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에 노출된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허가제 1주년을 맞는 정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여성노동자는 봉건적 속박과 가족임금의 굴레에 묶여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황현아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연구원은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시장에 나가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고 말하고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고 때문에 여성은 자발적으로 파트타임이나 임시직, 가내노동 등의 비정규직이나 비공식부문에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황현아 연구원은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보았다. "여성노동의 임시성에 대한 확신 역시 가부장적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요구에 의해 유연화된 여성노동의 선택적 착취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가부장적 전략에 다름없다"고 말했다.

오늘날 초국적자본과 재벌, 그리고 일부 시장신봉론자들은 시장화! 유연화! 노래를 부른다. 정경언검 유착이 드러나고 다수 사회구성원들이 악몽을 떠올려도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 고용불안과 실업, 경쟁과 효율의 사회 관계, 양극화와 사회적 빈곤의 숨막히는 현실을 그저 보고 즐긴다. 모든 노동자를 분할하고 각개 격파하는 신자유주의의 힘, '노동유연화'. 시장화! 유연화! 자본은 노래를 부른다.

[기획취재지원] - 한국언론재단

특별기획 '2005년 한국의 노동자' 순서

1회차(8월 22일) 시장화! 유연화!
2회차(8월 23일) 양극화와 사회통합
3회차(8월 25일) 고령화의 진실
4회차(8월 30일) 세상을 바꾸는 이수호 집행부
5회차(9월 1일) 노사대립과 노사정위원회
6회차(9월 6일) 노동운동 위기 논쟁의 촉발
7회차(9월 8일) 위기, 그후
8회차(9월13일) 대공장 노동운동의 현주소
9회차(9월15일) 산별은 정말 대안인가
10회차(9월20일) 정규-비정규직 차별, 해답은 없나
11회차(9월22일) 해외 공장 이전(1)
12회차(9월27일) 해외 공장 이전(2)
13회차(9월29일) 노동운동을 움직이는 사람들
14회차(10월4일) 절망의 현장, 일어서는 노동자(1)
15회차(10월4일) 절망의 현장, 일어서는 노동자(2)

특별기획취재팀
- 유영주 편집국장
- 최하은 기자
- 문형구 기자
- 최인희 기자
- 라은영 기자
- 윤태곤 기자
- 이꽃맘 기자
- 허경 영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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