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인에게 날아든 해고통지서, '직장검진'

[에이즈공동기획](3) - 강요된 침묵, 이제 감염인의 목소리를 들어라!


HIV에 감염된 당신, 떠나라?

“당신이 만약 당 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혹은 고혈압이라는 이유만으로 해고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감염인 이 모 씨는 HIV감염인/AIDS환자들이 처한 노동권 박탈의 현실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 그의 반문은 두 가지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감염사실을 이유로 직장에서 감염인들에 대한 해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국내에서는 감염을 이유로 한 해고와 관련된 정확한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지만, 감염인 단체들이 수집한 사례들은 감염인에 대한 부당해고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직장 건강검사에서 양성반응 판정을 받은 C씨에게 직장 상사는 감염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C씨는 아직 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고 건강한 상태였으나, 이후 수 개월간 대기발령 상태로 여기저기 부서를 옮겨 다녔다. C씨는 계속 근무할 의사가 있었지만, 회사 측은 퇴직을 권고했고, 결국 명예퇴직 형태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HIV/AIDS인권모임 나누리+’ 수집사례)

C씨의 경우 HIV에 감염됐지만, 당시에 건강상의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C씨가 맡고 있던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C씨에게 퇴직을 종용했다. HIV/AIDS가 어떤 질병인지, C씨의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직장에서의 직무수행이 가능한지, 전파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로지 HIV/AIDS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이유가 해고사유가 되었다.

  서울시 HIV 감염인의 감염당시 직업분포 [출처: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서울시 HIV 감염 생존자 실태분석, 2003]


  HIV 감염인의 현재직업(바로 위 표 감염당시 무직 비율이 남녀 모두 30%를 훨씬 밑돌고 있는 반면, 감염 이후 무직비율은 남녀 평균 64%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에이즈퇴치연맹, 고위험군 성행태 및 에이즈 의식조사, 2003]


“에이즈는 관리가능 한 만성질환”

C씨의 사례처럼 감염인들에 대한 부당해고가 이뤄지는 것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에이즈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듯 HIV는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서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 또 직무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노동을 하는 데 있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이 모 씨는 에이즈를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질환에 비유했다.

전문가들 또한 에이즈가 점차 만성질환화 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한다. 최용준 한림의대 사회의학과 교수는 “에이즈는 신속하게 발견해 적절한 치료를 하면 관리가능한 병이라는 의미에서 만성질환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며 “그러나 사회적 편견 등에 의해 쉽사리 발견하기 힘들고, 이런 점이 오히려 에이즈를 무서운 질병으로 만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즉 HIV에 감염된 이후 신속하게 치료를 시작해 합병증을 억제시키면, 당뇨병 혹은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과 다를게 없다는 얘기다. 물론 당뇨병 환자들이 당뇨로 인한 합병증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혈당 수치를 관리하듯 감염인들도 자기관리가 필수적이다.

최용준 교수는 또 감염인들의 노동력 박탈과 관련해 “일반적으로 HIV=AIDS 등식이 통용되고 있지만, HIV에 감염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환자는 아니고, 만성 B형 간염처럼 보균자와 환자는 엄연히 다르다”며 “합병증으로 인한 체력 저하 등으로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HIV에 감염됐다고 해서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웃팅' 위협에 대응 엄두조차 못내

감염을 이유로 한 해고가 감염인들에 대한 명백한 차별행위이자 부당해고이지만, 감염인들은 이에 대한 대응을 하거나 구제를 받기란 쉽지 않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법과 근로기준법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이뤄지는 질병에 따른 차별과 해고를 규제하고 있지만, 감염인들은 쉽사리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다.

김진섭 한국감염인연대(KANOS) 대표는 “직장 내에서 감염사실이 밝혀지는 것 자체가 이미 감염인들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인 상황이자 인권침해”라고 강조한다. 그는 “해고를 종용받거나 직접적으로 해고를 당하는 대부분의 감염인들이 직장을 계속 다닐 의지가 있다”며 “그러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또 다시 신분노출을 감수해야만 하고, 이점 때문에 구제절차를 밟을 엄두조차 내지 못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HIV 감염인들이 현재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점 [출처: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서울시 HIV 감염 생존자 실태분석, 2003]

직장검진과 해고과정에서 이미 원치 않는 신분노출로 엄청난 피해를 겪게 되고, 이에 대해 대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회적 낙인’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마련되어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법과 근로기준법 등은 감염인들에 대한 차별과 부당해고를 구제하는 데 있어 전혀 실효성이 없다는 게 감염인 단체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확인결과, 국가인권위원회에 감염사실을 이유로 한 인권침해와 부당해고 등에 관한 진정은 현재까지 단 한 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또 직장 건강검진의 근거법인 산업안전보건법을 다루는 노동부에도 이와 관련된 이의제기 등은 한 건도 보고된 바가 없었다.

직장 건강검진 HIV테스트 항목 삭제해야

김진섭 대표는 감염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해고를 막기 위해서는 직장 건강검사에서 임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HIV/AIDS 테스트를 엄격히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직장 내 건강검사 실시를 규정하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조차 HIV/AIDS 테스를 법정검사항목으로 정하고 있지 않다. 또 HIV/AIDS테스트를 하기 위해서는 검사를 받는 당사자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많은 회사들이 의료기관에 검진을 의뢰할 때 검사항목에 HIV/AIDS 테스트를 포함시키고 있고, 노동자의 동의 없이 관행적으로 검사가 이뤄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검사결과가 회사에 일괄적으로 통보되어 본인의 동의 없이 감염사실이 외부로 공개되고, 이는 곧 부당해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감염인의 감염사실을 타인에게 알리는 행위는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법률 위반이다. 현행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은 ‘감염자의 진단·검안 및 간호에 참여한 자와 감염자에 관한 기록을 유지·관리하는 자는 재직 중은 물론 퇴직 후에도 정당한 사유 없이 감염자에 관하여 업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된다’(제 7조 비밀누설금지)고 명시하고 있다. 또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규정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고, 따라서 감염인들에게 HIV/AIDS 테스트가 포함된 직장 건강검사는 곧 해고와 아웃팅을 의미한다. 김진섭 대표는 이 같은 이유로 “상당수의 감염인들이 직장 내에서 HIV/AIDS 테스트가 이뤄지면, 두려움에 떨다 검사를 안 받고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했다. 실제로 KANOS가 수집한 사례에 따르면, 대기업에 다니는 감염인 B씨는 내년부터 직장 건강검진에서 HIV테스트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재 전직을 준비 중에 있다. B씨는 검사를 받은 후 해고는 물론이고, 신분노출로 인해 전직도 어려워지게 되느니 차리리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감염인 절반 이상, ‘경제적 어려움’ 호소

한편, 부당해고와 취업제한 등으로 인한 감염인들의 노동권 박탈은 곧바로 경제적 문제를 야기시킨다. 지난 2003년 대한에이즈예방협회가 실시한 ‘서울시 HIV 감염 생존자 실태 분석’에 따르면 조사대상의 절반 이상(남자 51.7%, 여자 60.9%)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답변은 채 10%(남자 6.5%, 여자 8.7%))를 넘지 못했다.

  서울시 HIV 감염인의 경제적 여건 [출처: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서울시 HIV 감염 생존자 실태분석, 2003]

김진섭 대표는 “젊은 사람들은 해고당하기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어떻게든 다른 직장을 찾아볼 수도 있다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직장을 구하기도 힘든 처지에 있다”며 “건강검사가 감염인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노동통제를 위해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자의 건강 보호를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직장 내 건강검사가 오히려 질병에 걸린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ILO· WHO, "질병에 걸린 노동자들, 똑같은 대우 받아야“

노동현장에서 감염인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차별을 막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미 지난 1988년 공동으로 ‘에이즈와 직장에 관한 성명’을 채택한 바 있다. 두 기구는 이 성명에서 HIV 감염인들과 AIDS 환자들이 다른 노동자 그리고 다른 질병에 걸린 노동자들과 다른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건강검사를 비롯해 비밀누설금지 원칙들을 규정하고 있는 이 성명서에서 WHO와 ILO는 “HIV 감염 자체는 노동자와 직무수행상의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보통의 경우 감염자가 직장의 동료에게 감염시키는 일은 없으므로 채용과정에서 스크리닝(집단검진)을 실시할 필요는 없으며, 이를 요구해서도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감염인들의 고용보장과 관련해 성명서는 “HIV에 감염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으므로, 노동의 형태나 내용을 변경할 필요는 없다”며 “그러나 만일 발병하여 쇠약해진 경우, 그 피고용자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적절한 노동 형태나 내용의 변경을 해주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HIV? AIDS?

일상생활에서의 전염가능성

HIV는 공기 중이나 수중에서는 활동성을 금방 상실합니다.
HIV는 림프구나 혈청 및 체액 속에서는 감염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는 건조하기 때문에 혈액이나 체액이 말라버린 상태에서는
활성이 급속도로 떨어져 공기감염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보통의 수돗물에는 소독을 위한 염소가 용해되어 있으므로
HIV는 단시간에 활동을 하지 못하고 활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는 감염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감염되지 않습니다.

① 잡담이나 악수 같은 일상적인 대인접촉
② 기침이나 재채기
③ 수영장, 목욕탕 및 기타 공동화장실 사용
④ 감염인이 사용했던 물건과의 접촉
(단, 면도기/칫솔 공유는 안 됩니다.)
⑤ 화장실 변기 사용
⑥ 기타 일상적인 생활

HIV/AIDS 주요 감염 경로

① 에이즈 감염인과의 성접촉
② 에이즈 감염인의 혈액 수혈 및 혈액제제 투여
③ 에이즈 감염인과의 주사바늘 공동사용
④ 에이즈 감염인 산모로부터의 수직감염 및 모유수유

■KANO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