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 투쟁, 무엇을 던지고 있는가

[좌담] 황철민 한독협 이사장, 양윤모 평론가 협회장, 김완 문화연대 활동가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한독협의 성명 발표, 영화노조의 대책위 결합뿐 아니라 사회운동 진영에서도 지지성명들이 쏟아지는 등 전선이 확대되고 있다. 한-미BIT를 막아냈던 영화인들의 싸움이 다시 한-미FTA 투쟁의 화두를 던졌다.

민중언론 참세상은 16일 오후 7시 참세상 사무실에서 '스크린쿼터 투쟁, 무엇을 던지고 있는가'를 주제로 한 좌담을 진행했다. 양윤모 영화평론가협회 회장, 황철민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김완 문화연대 활동가가 함께 했다. 좌담에서는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 해석,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투쟁 평가,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을 다루었다. 때론 답답하고 때론 안타깝기도 한 그들의 솔직한 얘기들이 오고갔다.

‘경제’와 ‘시장’ 그리고 ‘상품’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공격적인 노무현 정부의 통상 정책 속에서 스크린쿼터 투쟁이 던지는 쟁점은 ‘상품이 되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당연한 주장이었다. 또한 경제지상주의에 대한 경고와 상징적인 '스크린쿼터' 투쟁이 갖는 FTA에 대한 전면적인 전선 확대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권회승 기자

참세상 지난 1월26일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축소하겠다는 정부 발표 이후 정부는 그 다음날 이를 입법예고했다. 그리고 오는 20일경 법제처 심의를 거쳐 3월 중에 영화진흥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물론 문광부 소속 4당의원은 적극적으로 문화다양성협약과 ‘현행 스크린쿼터제 유지’를 위한 입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투쟁이 이제 확장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에 대한 쟁점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좀 늦었지만 좌담 자리를 마련했다. 적어도 ‘스크린쿼터’ 싸움의 전선을 흐트리는 쟁점들을 분명히 하고, 영화인들의 입을 통한 답변이 필요하다는 필요의 취지다.

  황철민 한독협 이사장/권회승 기자
황철민 스크린쿼터와 관련해서는 그 동안 많이 토론 해 왔다.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 '왜 필요하냐'라는 식의 토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예습 복습을 거쳐 또 다시 복습하고 있는 지경이다. 이렇다 보니 이제는 대중들에게는 정보가 아니라 잔소리로 들리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과거에 비해 스크린쿼터에 대한 영화인들의 입장이 국민들의 지지를 덜 받는 양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조직된 저항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은 스크린쿼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사회적 이슈에 대한 보수화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황우석 사태때도 마찬가지고. 정권창출에 실패한 또 다른 얼굴의 보수세력들이 스크린쿼터와 영화인들을 공격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스크린쿼터 토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실 사회의 보수세력들이 스크린쿼터를 두고 어떻게 힘빼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지 주의해서 봐야 한다. 소위 사회적으로 개혁세력이라 얘기했던 진영이 말 그대로 보수세력의 전략에 농락 당하며 스크린쿼터 문제에서 핵심으로 다뤄할 내용들을 쏙 뺀 채 부정적인 여론에 부화뇌동하며 휘둘리고 있음을 봐야 한다.

김완 그렇지만 스크린쿼터제 그리고 영화인들의 싸움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위 진보진영의 활동가들을 만나도 스크린쿼터 투쟁에 대해 확실히 ‘지켜야지’라기 보다는 반신반의한 분위기 있다. 반감은 두 가지로 요약될 것 같다. ‘영화인들이 정말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활동을 해왔는가’ 식의 질문 즉,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만큼 남의 밥그릇도 챙겼는가’의 유형인데 이런 입장은 댓글들을 통해 많이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인들이 답변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영화를 ‘민족고유의 것’이라 수사하며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다. 이런 수사들이 타당한가에 대해, 논리적 수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반감시키는 것 같다. 물론 이면에는 한국영화의 수준이 많이 성장했음이, 8,90년도의 한국영화보다 실질적으로 현재의 영화가 더 많이 산업화되고, 되어있는 상황에서 다른 어떤 판단들이 많이 유보되고 있지 않나 싶다.

  양윤모 평론가협회장 / 권회승 기자
양윤모 스크린쿼터의 당위성, 중요성, 실효성 등 그것에 대한 개념적인 정리는 보편적으로 뇌리에 박힐 정도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쟁점은 보수세력과 '확인되지 않은' 경제 논리로 환원시키는 경제 언론지들의 여론 공세에 부딪힌 상황이라 판단된다. 사실 축소방침 통보과정과 참여정부의 경제 관료들에 의해 영화인들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되고 있는 이 전선이 치밀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패배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한국사회에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 된 오래된 사실과 경제적인 여건 속에서 조잡한 예술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짧은 시간 동안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의 후원을 받아 호황예술이 되었다는 오도된 부분들도 존재한다. 영화계를 뭔가 펑펑 넘쳐 나는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넣으면서 말이다. 경제발전, 양극화 해소와 같은 것들이 스크린쿼터로 인해서 발목잡고 있다는 관료들의 주장들이 경제저널지를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 산업이 경제규모에서 그리 큰 규모도 아닌 상황에서 집단 매도 당하고 있다. 영화인들의 싸움이 어느 때보다 힘든 싸움이 되고 있다. 또한 영화계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영화인들은 현 참여정부에 대한 배신감이 가장 크다. 노무현 대통령 대선 공약이기도 했고, 영화인들 중에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인들이 적극적인 투쟁을 자제하기도 했다. 다소 비전투적인 상황을 만들면서 참여정부에 대해서 투쟁을 유보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현재의 상황이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참여정부의 허구성에 대한 배반감이라고나 할까!

황 : 스크린쿼터에 대한 사회적 탄압의 이면에는 스크린쿼터제도로 대표되는 보호제도에 대한 보수 집단의 반발이 조직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황철민 사실 민주노총이 큰 사안마다 투쟁을 조직하지만 스크린쿼터 투쟁만큼 장기적으로 요구 사안을 관철시킨 투쟁은 많지 않다. 실질적으로 한-미BIT협상을 좌초 시켰고, 한-미FTA 협상을 지금까지 미뤄왔던 것도 영화인들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현재 보수 세력들이 끊임없이 영화인들을 여론 주도 층에서 밀어내는 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스크린쿼터 축소는 잘 짜여진 게임이다. 영화인들만의 제도를 넘어 정치 세력관계 속의 의미에서, 이데올로기화 된 자본의 이해 구도에서 말이다.

사실 ‘조폭 영화가 무슨 영화냐’, ‘한국영화가 예술영화냐’, ‘좋은 영화 만들어라’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19세기 예술관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세기 예술관으로 21세기 영화를 바라보면 토론이 쉽지 않다. 19세기 예술은 개인적인 작업이 많았지만 현재의 영화는 여러 사람들이 작업하는 복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좋은 예술과 현재의 좋은 작품, 예술, 영화는 좀 다른 맥락속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산업을 기반으로 한 예술에서 상부에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상위 5%를 두고만 얘기한다. 그러나 상위 5%의 좋은 영화, 예술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잠겨있는 95%의 작품들이 바탕이 되고, 시험되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95%는 간과한 채 5%만의 영화를 만들어라 한다는 것은 너무 현실을 간과한 얘기라 생각한다.

  김 완 문화연대 활동가/권회승 기자
김완 일정정도 영화가 한국 진보운동에서 혹은 더 좁히면 신자유주의 투자협정 중심의 흐름 속에서 굉장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영화가 사회적 지휘 속에서 어떤 사회적 책임을 져왔는가에 대한 부분을 지적할 수 있겠다. 부족했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 아니겠는가. 또한 이 부분은 자칫 영화중심주의나 영화만능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독립영화협회나 영화단체가 사회적 책임을 해왔지만.

현재의 스크린쿼터 투쟁을 본다면 일정정도 전술의 실패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배우들의 1인 시위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점이 전술적인 부분에서 본다면 오히려 ‘응시효과’를 내면서 고착화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이는 싸움의 본질과 쟁점을 왜곡시키면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사회적이고 거시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막아세우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영화인들의 싸움이 굉장히 외로운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전면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응시하는 효과로 인해 이기적인 투쟁으로 변질 돼서 보이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운동이 갖고 있는 사회적 위상에 대해, 사회적 책임에 대해 대중들에게 응답할 때가 됐다.

황철민 사실 그러한 부분은 토론으로 찾아가기 보다는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찾아가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상과 주체에 따라 경중을 나눠 다른 투쟁의 전술을 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의 1인 시위로 스크린쿼터 투쟁을 전부라 평가해서는 안된다. 또한 배우들의 1인 시위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싸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술적 경중이 달라야 하는 부분이 당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1인 시위는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싸움 방식이기도 하고, 이런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1인 시위로 지루하고 장기적인 스크린쿼터 싸움을 끌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쟁점이 된 부분에 대한 ‘반짝’ 이슈화 과정이기 때문에 이런 1인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양윤모 실질적으로 이 국면에서 이러한 흐름을 만들고, 극복해 가야하는 주체는 영화인들이다. 국민의 여론과 같이 가야하는데 국민들의 여론을 끌만한 전제적인 장치들을 해놓은 것이 있는가를 보면 내부다양성이라던가, 영화노동자들에 대한 현실적인 처우개선 문제라든가, 영화인들의 사회적 봉사 등 여러 것에서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리고 아직까지 영화인들이 대국민과 호흡할 무기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감성적이고 민족적 감정에서 호소해 가는 소박한 방식 밖에 없다.

한국의 영화는 끊임없는 정치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장해왔다. 정치적 스트레스라는 것은 탄압과 간섭, 정부 개입에 의해서 영화가 대중들에게 전달되지도 못했던 상황에서도 어렵게 지탱해 온 역사를 말하는 거다. 김대중 정권 때 몇몇 제도적 혜택을 받아 반짝 일어선 거다. 이런 혜택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문화 예술 영역의 상실감이 커진 것도 사실이지만 노무현 정부에서는 관련 정책이 아예 없었다. 심지어는 영화산업을 붕괴시키는 사형선고를 했고 이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해방 이후 검열과 탄압 속에서 정치에 의해서 정치 계몽적인 영화를 만들고,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을 챙피해 하는 시대를 넘어 이제 좀더 성장해서 담론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영화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시점에서 정부가 싹을 자르고 있는 지점에 와 있는 거다. 스크린쿼터제 축소는 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크린쿼터 철폐로 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 현재 싸움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두터운 벽을 느낀다.

영화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면서 구멍가게 수준에서 자립의 토대를 만들려는 현 시점에서, 한국 영화 스스로가 미래에 대한 우리 수준의 창조적 담론을 마련할 수 있는 시점에서, 담론에 대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안타깝다. 이번 과정에서 영화인들의 자유 낭만적인 사유에 반해 한-미FTA로 대표되는 시장 경쟁에 대비하는 우리들의 미약함이 노출된 것 같다.

양: 사실 영화인들 내에서는 참여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선 공약이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참여정부에 대한 배신감이 적지 않다.

김완 지난 1월 26일의 한덕수 부총리의 발언은 습격 사건이었다. 스크린쿼터에 대해 신중하게 논의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스크린쿼터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계속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스크린쿼터’ 사수투쟁이 가진 상징성이 한국사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자본과 시장의 도전 속에서 기타 여러 분야들에 비해 살아 남아왔던. 그러나 상징성이 해체된 상황에서의 전술적인 공백도 존재했다. 최근 안타까운 것은 스크린쿼터 대응 논리에서 아주 간단한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는 논리가 있다는 점이다.

일정정도 산업의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더 높은 수준의 경제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산업적 보호 장치’로서의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기능적 측면에서 맞지만 원론적 수준과 본질적 문제와 충돌하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더 산업적 효과가 있다면 스크린쿼터는 내줘도 되는 것이라는 역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완 문화연대 활동가/권회승 기자
스크린쿼터 투쟁은 한국영화를 살리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한미FTA 문제나 초국적 자본의 침략의 문제, 남북관계 특수성을 고려한 안보문제, 전반적으로 보는 미국의 동북아 및 아시아 경제 지배권 확보의 문제 등 ‘스크린쿼터’ 뿐만 아니라 촉발된 배경과 얽혀 있는 사실과 그 이면의 의미들이 적극적으로 담론화되어야 한다. 스크린쿼터 관련한 담론들이 전반적으로 일방통행하고 있다. 스크린쿼터가 경제적으로 이익이 있냐 또는 국익이 되냐, 양극화 해소 방안이 될 것이냐 안되냐 등등.

사실 정부는 한-미FTA 및 다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오히려 이는 양극화를 강화, 고착화 시키는 방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쿼터 사수 싸움은 극단적인 양극화해소 사회로 가기 위한 전술중의 하나로 언설을 뒤집는 싸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 본질적이다. 현재까지는 스크린쿼터 사수 싸움이 다른 논리를 무마시키는 치환되어서 홀로 외로이 막아왔는데, 현재는 그 저지선이 무너지는 상황이고, 쿼터가 무너지면 바로 그런 사회로 간다는 논리를 펴면서 적극적으로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민족주의적이거나 한국영화 성장에 기반 한 낙관주의적, 경제적 논리의 국면을 통해서 지금 단계를 돌파하려는 것이 유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대 이 싸움을 막아낼 수 없다. 오히려 경제논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게 된다.

FTA, BIT 등 개방형 통상 국가와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한국사회에서 최소한 2가지 방어기제가 있었다. 그것이 쌀과 스크린쿼터제였다라고 본다. 쌀의 경우는 심리적인 저지선 확보되어있었다. 즉, ‘신토불이’라는 심리적 저지선이다. 적어도 ‘주식인 쌀 만큼은’ 내줄수 없는 거 아니냐라는 국민적 지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작년에 쌀 시장 개방 협상을 국회비준 통과 시키면서 이 심리적 저지선을 간단히 돌파해 버렸다. 당시 이 상황에 주목했어야 했다.

스크린쿼터도 마찬가지다. 형식적인 저지선을 확보했지만 이 부분도 노무현 정부가 쌀협상의 부담을 갖고 있음에도 돌파해 버린 상황이다. 이 방어기제 상실에서의 연계점을 찾아야 한다. 개방형 통상국가를 주창하고 있는 참여정부의 지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언설이 아니라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피며 연대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양윤모 그런 측면에서 범대위도 꾸려졌고, 17일에는 ‘쌀과 영화’ 촛불 문화제 열린다. 늦었지만 이제 연결고리들이 만들어 지고 있다.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를 얘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와 연결하면서 투쟁하지 못했던 것은 안다. 항상 영화산업은 위협과 간섭 속에서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스트레스 속에서 그 나마의 모양을 갖춰온 지형도 있고, 영화인들의 특별한 생존방식이 있어서 사회의 큰 틀과 같이 하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영화 예술과 영화 산업이라는 직종의 특수성도 있고, 이 업계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에서도 역량과 시간과 자본을 함께해야 하는 지형도 있다. 주변의 이런 시각에 대해, 같이 하지 못하는 직업적, 업계적 한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사실 강기갑 의원 농성할 때 영화인들이 지지 방문을 가기도 했고, 홍콩에서 억류자들 연행 됐을 때도 안성기 대책위원장 등 영화인들이 ‘탄원서’에 서명하며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었다.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미약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많이 부족했었다는 점이고 충분히 느끼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을 얘기하고 싶다. 쿼터 축소를 발표한 정책 책임자들을 보게 되는데 과연 이들의 실책에 대한 평가가 우리에게 있었는가 이다. FTA가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검증도 거치지 못하고 쇠뇌당한 채 반복하면서 ‘효과가 있을 거야’라고 주문을 되뇌이는 것이 현 시점 아닌가 싶다. 협상을 하면서 특정 산업의 희생이 당연시 되고, 그 고통은 그 종사자들이 감내해야 하고 이렇게 양극화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지경에 와서도 오로지 ‘경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자기 주문을 외우게 되는 것은 정책을 추진했던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 정책들에 대해 제대로 평가 되지 못해서 이다. 스크린쿼터에서도 역시 같은 맥락이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양윤모 평론가협회장/권회승 기자
영상산업은 영상언어다. 일제시대 말을 뺏고, 문화를 빼앗았던 이유는 언어가 가진 정신적 특성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문자 언어가 아닌 영상 언어가 발전하고, 이런 영상언어는 역사적 토대에 의해서 정서가 융화되어 정서 문화를 형성한다.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의 요구를 '문화침략이다'라고 말한 부분은 이런 쟁점에서 이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영화시장의 잠식이라는 %율이 아닌 영상언어가 자본에 의해 문화침략되고 있는 배경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많이 얘기되고 있지만 한-미FTA가 경제적 의미 뿐만 아니라 군사 동맹적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미국과 FTA를 아시아에서 최초로 체결하는 한국이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과 더불어서 함께 문화-군사 지배력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완 : 스크린쿼터 투쟁은 상징적 투쟁이다. 대중의 삶과 의식에 내면화 된 신자유주의, 어떤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크린쿼터 투쟁이 던지고 있다

참세상 스크린쿼터 싸움이 결국 헐리웃 자본으로 대표되는 해외, 미국 영화자본과 국내영화 제작, 배급사의 거대 자본들의 싸움을 대행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적지 않다.

황철민 스크린쿼터제를 자본과 자본의 구도로만다면 그것은 너무 피상적인 주장이다. 사실 스크린쿼터제가 지금까지 지켜져온 맥락이 있는데 스크린쿼터제가 66년 처음 명문화 되고 67년 처음 시작됐지만 사실 날짜 일 수가 지켜져 지금같은 형태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사실 초기에는 직배문제도 같이 맞물려 있었기도 했지만. 96년 연간 상영일수 146일로 확정된 이후에도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영화인들이 직접 나서서 극장의 상영일수를 체크하고 정부 당국에 요구하고 벌금도 맞게 되고, 불이익도 받게 되면서 이 스크린쿼터제가 사실상의 제도로써 자리를 잡게 됐다. 사실 스크린쿼터는 영화인들이 제도가 제도로의 역할을 하게 만들어 온 과정이 있다.

김완 몇일 전에 전경련의 누군가를 인터뷰한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전경련이 한국영화가 제작과 배급이 함께 묶여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스크린쿼터가 폐지되어도 제작은 줄지 않을 것이다 라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얘기가 어딨나. 제작과 배급이 묶여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당연히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제작이 줄지 않겠나. 왜냐면 제작은 리스크가 큰데, 왜 제작자가 큰 리스크를 끌어 안고 큰 사업에 돈을 투자하겠나. 시장에서 검증받은 헐리우드나 외국 영화를 사오면 되면 충분히 안정적으로 수익을 거둘 수 있는데. 전경련의 이런 비상식적인 논리가 재경부의 논리적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한국은 배급과 제작이 묶여 있으니 스크린쿼터와 같은 보호제도를 폐지했던 다른 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주장하니, 이렇게 앞뒤 안맞는 말이 어딨나.

황철민 사실 스크린쿼터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과 의식이 빈곤해 질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스필버그의 뮌헨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스필버그는 부시의 세계 패권을 비꼬는 이런 영화를 만들어서 세계 대중을 잡았다. 한국의 비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헐리우드를 비판하지만 적어도 헐리우드에서는 이런 영화가 시험되고 만들어질 수 있다. 마이클 무어가 부시 대통령을 비꼬는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지형이 아니다. 스크린쿼터가 사라진다면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사람들은 줄은 서야 할 것이다. 한국 시장에 대해 관심 있는 영화인 보다는 시장성, 상품성에 기반 한 미국 영화 자본과 연결 된 사람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 줄을 잡는 영화인들만 살아 남을 것이고 잡지 못한 영화인들은 결국 사라지지 않겠는가.

양윤모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를 보면 순수영화인들이 다수 연대하고 있다. 창조적으로, 주체적으로 자부심을 갖고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이번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작품을 생산할 수 없겠다는 직업적 상실감마저도 느낄 사람들이 포진해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크린쿼터가 축소 되도 살아남을 대기업들이 있다. CJ엔터네이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이먼트 등 10손가락 안에 있는 제작, 배급사들이 있다. 정부가 자꾸 한국의 영화산업이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에는 생산의 주체인, 창조자인 영화산업을 지탱해 왔던 사람들을 내몰고 이런 몇몇 제작, 배급사 위주의 자본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재벌중심의 영화산업으로 편재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린 정말 줄서기를 해야 된다. 종속적인 관계로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 불 보듯이 뻔하다. 지금도 조폭영화가 양질의 영화냐고 반문하지만, 스크린쿼터가 폐지되면 영화산업 시스템에서 이제는 정말 시장만을 겨냥한 초대형 조폭영화가 나오는 것이다. 조폭영화를 위해 창조적 주체세력들의 싹을 자르는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가 말하고 있는 경쟁력의 본질이다. 영화산업의 창조자들을 자본으로 줄세우기 하는 것. 여기에 참여정부의 허구성이 있는 것이다. 재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지원금 4,000억원 이든 얼마가 됐던 이 지원금에 목을 메고 줄서서 받아 힘들게 영화제작해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해 세금이나 지원금 등 공적 자금 등을 쏟아 붓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개방이 되어도 외국인들에 의한 직배가 공조하는 체계를 유도해나가면서 외화에 의해 영화산업의 잠식이 이루어질 것이다.

  황철민 한독협 이사장/권회승 기자
황철민 이런 점에서는 외국 사례를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외국에서는 정부 지원금이나, 사회기금들 지원 받아 영화를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지원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자국내 시장이 소위 대형 배급사들에 의해 잠식 당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배급을 통해 대중 접촉면을 차단당한 상태에서 자국의 영상 언어가 재생산 되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에 사회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스크린쿼터제의 축소는 바로 이런 영화시장의 재편과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재편 그리고 줄서기를 당연한 수순으로 정하고 있다. 말 그래도 지금 참여 정부의 정책은 역행하고 있다.

김완 스크린쿼터는 헐리우드는 절대적 독과점이 있는 상황에서 국가단위의 영화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가 핵심인 제도이다. 마이너리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의 종적인 보호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수평적 보호 장치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확실히 스크린쿼터와 다양성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스크린쿼터가 해왔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스크린쿼터를 폐지하는 것은 정부가 최소한 보호 책임에 대한 자신의 기능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역으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국내산업, 삼성 등등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고 있으므로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 : 스크린쿼터제 폐지는 한국 영화산업을 소수 제작, 배급사들, 재벌 중심으로 영화계를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영화인들은 종속적 관계의 인프라 속에서 이제 줄서기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참세상 좌담회를 정리하는 한 말씀 부탁드린다.

황철민 스크린쿼터는 현재 문화의 거점이다. 아직까지 한국이라는 지형내에서, 한국 시장을 거점으로 생산 되는 창조적 공간이고 보호 공간이다. 스크린쿼터제의 필요성은 너무 당연하다. 오히려 이면에 숨겨진 보수 세력들의 알력 다툼과 개혁세력을 자처했던 사람들이 자가당착에 빠진 상황, 한국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그리고 정부의 조작적 FTA 협상들을 뜯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완 신자유주의가 뭐냐 라는 것을 제대로 규정하기 전에 이미 대중들은 삶과 의식속에 내면화되고 있다. 외국 자본이 들어온다 하고, 개방 된다고 하니 처음에는 일단 반감을 가졌는데 채 10년도 되지 않아서 이런 자유주의적 정서가 보편화 되었다. 어떤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스크린쿼터 투쟁이 던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일상적 지배가 이미 확산된 가운데 스크린쿼터를 통해서, 단순히 몇일을 상영할 것인가 ’일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기본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이 시장과 상품으로 통제당하는 재앙적 상황을 막아야 하는 기로의 ‘상징적’인 싸움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보완적인 상황들은 차후 논의하면 된다. 이 상징을 실체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양윤모 착찹하다. 입이 있어도 말의 무용이랄까. 강자논리 중심으로 가는 것에 대한 사전 체계, FTA문제에 대해 스크린쿼터가 갖는 위치 등 보다 심도 깊은 판단이 있었어야 했다. 스크린쿼터 축소 음모에 대해 논하다보니, 영화계에서는 FTA의 문제점과 정부가 말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의 허구성에 눈뜬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더욱 축소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여론이 20%~40%만이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반대했지만 16일 발표한 문광부 통계를 보니 국민여론 76%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반대한다고 한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를 단순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쿼터를 만들어왔다. 영화인들의 싸움이 단순히 스크린쿼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FTA 협정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도 함께 하고 있다. 사실 여기 저기 강의나 토론회 자리도 쇄도 하고 있다. 같이 얘기해 보자는 곳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총체적으로 FTA의 문제와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접점을 잡고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투쟁을 같이 병행해 가고 있다. 17일 ‘쌀과 영화’도 그런 측면에서의 시도이다. 관심있게 연대하고, 질기게 갈 것이다.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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