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를 둘러싼 지형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진영의 움직임이 빨랐다면 최근에는 ‘협상을 잘해보자’는 진영이 대거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찬반 양론이 나뉘는 현상에 대해, ‘합심해도 부족한 상황에 국론 분열이 왠 말이냐’라거나, 쇄국이냐 개방이냐 라는 식의 본질을 흐리는 논쟁을 제외한다면 한미FTA 협상 둘러싼 대립적 구도는 오히려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만큼 이해관계에 기반한 대립구도가 확실해 진다는 것, 이것은 또한 싸워야 할 이유를 더욱 분명히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FTA협상 저지를 위한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다.
한미FTA '찬성'을 외치는 집단 결성
4월 15일을 기점으로 방향은 확실히 양분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4월 15일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전국에서 모인 1만5천 명의 참가자들이 거리에 나서 최초로 한미FTA 반대 구호를 외친 날이다.
그리고 16일에는 ‘한미FTA는 양국이 모두가 이기는 윈윈 전략’ 이라며 제대로 해보자는 취지의 ‘바른한미FTA실현을위한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했다. 이어 18일에는 경제 4단체와 의료-법률-제조업 등 산업부문을 총 망라한 협회와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한미FTA 민간대책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지금까지는 반대 목소리를 내는 주체 단위가 여론 대응을 해왔다면 15일 이후에는 한미FTA 찬성을 외치는 집단이 구체적으로 결성됐다는 점이다.
이런 기구들의 출범을 전후로 언론의 보도 흐름도 흥미롭다. 물론 국회 대정부 질문 기간이란 점과 18일 한미FTA 예비협상이 미국에서 진행되는 시기적 맞물림이 있음을 전제하고 본다 하더라도.
쇄국인가, 종속인가 그리고 각계 격파의 전략인가
하나는 한미FTA 반대 주장을 ‘쇄국 정책’으로 몰아가는 흐름과 이와 맞물린 한미FTA 반대가 '한미경제 종속'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비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쌀은 제외시키겠다, 마지노선은 지킨다, 교육-의료 등은 협상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등 정부 협상의 원칙인 듯 밝히는 발언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16일 출범한 ‘바른 FTA 실현을 위한 국민운동본부’는 "한미FTA는 두 나라의 전략적 선택에 의한 것이며 일부 지식인과 시민 운동 단체가 한미FTA를 저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반 역사적인 시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미FTA 반대 흐름에 대해 "제 2의 쇄국정책"이라고 규정하며, 쇄국 정책으로 인해 혼란했던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풀이 할 수 없음을 강변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직무대행 겸 경제부총리의 지지공세가 이어진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11일 “졸속 타결은 없을 것”이라는 너무 상식적인 발언을 한 것에 이어 14일 한국소비자연맹 등 9개 소비자단체 대표들과 만나 "개방한 나라가 성공도 하고 실패한 경우는 있었지만 쇄국하면서 성공한 예는 한 번도 없었다"며 한미FTA 반대를 쇄국정책으로 역규정했다.
13일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도 한미FTA 반대 주장에 대해 "80년대의 낡은 종속이론으로 한미FTA를 재단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한국경제의 저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21세기에 왠 경제종속'? 이란 반응을 보였다. 이들의 일관된 주장은 한국 역사의 아킬레스건인 쇄국=일제식민지=민족/민중의 고통 이라는 식의 이데올로기로 한미FTA 반대 진영의 논리를 매도하려는 기도로 풀이된다. 또한 '설마 정부가 그리 허술하게 협상에 임하겠는가'에 대한 막연한 신뢰감을 자극하기 위한 방안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교육-의료 등 공공서비스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정말 믿고 싶은 얘기도 서슴치 않는다.
14일 김종훈 한미 FTA 협상 한국 측 수석대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미FTA를 체결하면 교육, 의료시장이 완전 개방된다는 일각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라며 ‘교육,의료시장 개방은 기우’라고 못박았다.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도 17일 외신기자 초청간담회에서 “시한에 쫓겨 무리한 타결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정 홍보지인 국정브리핑은 17일 유명희 외교통상부FTA서비스교섭 과장의 말을 인용해, 한미FTA 협상에서 의료와 초중등 교육 분야는 협상 의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설령 개방 요청을 하더라도 공공서비스의 근간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명숙 총리지명자도 17일 한미FTA와 관련해 ‘농업부문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쌀의 경우는 제외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18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도 국회에 출석해 “한미FTA에서 쌀은 국민정서와 관련된 것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국정브리핑은 ‘한미FTA 성공을 위해 이념 차이를 뛰어넘어 의기투합해 보자’고 강변의 기고글을 실었다. 뭔가 그럴싸한 흐름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정부 주장을 순수하게 받아 들일 수 없는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
정부의 주장이 순수하지 않은 이유
그러나 쌀을 예외로 하겠다는 주장과 달리 ‘쌀을 협상 대상에서 제외시키겠냐’는 질문에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쌀의 경우 다자차원에서 2014년까지 예외로 인정받아 놓았다"고 언급했다. 이미 지난해 쌀협상을 통해 미국산 칼로스 쌀이 수입돼 시판을 앞두고 있다. 이쯤 되면 국민적 반발을 안고 협상의 의제로 올리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다는 설명인 셈이다. 이미 단계적 개방 시행은 예정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업 협상에 쌀만 있는 것도 아니다.
교육과 의료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미 제주도특별자치도와 인천 송도 등의 경제특구에서는 교육과 의료법인들이 영리화 됐다. 또한 미국의 무역장벽보고서는 한국의 경제특구를 표준으로 정하며 협상에 임할 것을 거론하고 있다. 경제특구는 노동구조 유연화, 세금 인하, 교육기관-병원의 영리법인화, 건강보험 예외 규정이 핵심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이미 표준으로 경제자유구역 등을 제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리법인화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경청해 볼 만한 지적이다. 정부는 아닐 것이라 하지만 직접적이지 않돼 투자 규제 완화 요구가 병원의 영리법인화까지 이어지는 방식으로, 우회적인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경제특구나 국제자유도시 지정 등 그간 한국 정부는 한미FTA와 별개로 의료 산업화, 교육시장 영리화, 공공서비스 민간 위탁 등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는 점이다. 지방 도시에서,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경제특구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그러니 협상 의제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정부의 공언이 '기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간 한국 정부가 추진해온 일관된 시장화 사유화 정책, 이미 자본의 이해를 국내 정책 틀 속에서 실행 시켜 왔기 때문이다. 한미FTA협상과 맞물린다면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명분이 생기는 것이고, 혹여 국민적 저항으로 한미FTA 협상 의제로 삼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정부 관계자들의 주장은 국민들의 부정적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한미FTA를 둘러싼 이해의 관계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FTA협상 찬성 집단의 결성은 정부+보수언론으로 주축 됐던 찬성 여론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여론적으로도 더욱 확산시킬 날게를 단 셈이다.
정태인 전 비서관, 범국본에게 의제를 던지다
그러나 현 상황의 백미는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인 듯 싶다. 최근 ‘친정 욕한다’는 식으로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정태인 전 비서관은 '프레시안'의 기고글을 통해 ‘중규모의 FTA’를 제안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동북아의 꿈’을 거론하며 “현재 가능한 방법은 가능한 외부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중간 수준의 FTA로 가는 것”이라며 ”미국을 외면할 수 없지만 중국, 일본과의 협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손해를 입는다”는 경제논리를 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과의 FTA 논의를 한층 진전시켜야 한다. 중국과의 민간연구를 산·관·학 합동연구로 격상시키고 일본과의 FTA를 재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의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 역시 발전시켜야 한다. 동남아시아연합(ASEAN)과의 FTA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로서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중간지대가 넓으면 넓을수록 숨쉴 공간이 커진다”고 주장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의 글과 한미FTA 협상 찬성 단체들의 등장, 그리고 정부의 각계 격파식 발언들이 깔대기처럼 모여지는 지점에 유일하게 한미FTA 협상 저지를 외치는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있다. 바로 최근 구체적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한미FTA를 둘러싼 자본-보수 대결집이 시작된 지금, 범국본이 요구받고 있는 '무엇'이 있음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
정태인 전 비서관의 글이 범국본에 던지는 ‘무엇’은 한미FTA 반대라는 입장은 동일하되, 다른 나라와 체결하는 FTA나 한국정부의 개방형통상국가의 정책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한미FTA 반대라는 커다란 우산을 쓰기는 같이 썼는데 그렇다면 다른 FTA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FTA 대상이 미국만 아니면 되는 것인가, 정태인 전 비서관의 바람처럼 '동북아의 꿈'을 펼치기 위해 다른 아세안, 일본 등 중규모 수준의 FTA는 찬성한다는 것인가 등등의, 깃발 꽂고 '반대하는 사람 다 모여'라는 구호로 지금까지 뭉쳤다면 현 단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한미FTA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개방 정책에 대한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범국본의 주장이 개방이냐 쇄국이냐, 미국 경제에 종속되는 문제인가, 국내외 자본의 신자유주의 재편 완결판 기도인가에 대한 논쟁 등 한미FTA라는 큰 우산속에 그간 드러내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왔던 범국본을 향해 명확한 자기 입장을 표명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정세 지형에서 범국본이 어떤 정책적 극복 전략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급증하고 있는 정부 관계자들의 ‘예외’ 발언들은 국민적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의료나 교육처럼 민감한 사안들이거나 또는 범국본의 핵심 동력이 있는 단위들을 겨냥한 각계격파의 전략적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니 당연히 관련 발언의 본질이 무엇이고, 왜 정부가 이런식으로 여론 호도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폭로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자신의 영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한미FTA라는 단일의제에 반대하고 싸울 수 있는가, 한국 사회운동의 의제로 한미FTA 저지 싸움을 조직해 낼 수 있겠는가에 대한 실력 여부를 범국본에게 던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범국본이 415범국민대회에 너무 올인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런 자본과 보수의 대집결 양상속에 범국본의 반응은 너무 더디다. 아니면 419 시국 선언처럼 그들의 공격에 대한 대응없이 대미 경제 종속이라는 빗나간 주장을 설파하며 '한국과 미국과의 FTA에 반대하기만 한다면 우린 함께 갈 수 있다'는 식의 손맞잡기를 강행할 것인가. 이는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상층단위 범국본, 자본과 보수집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범국본은 현재 한미FTA 싸움에 있어 상층연대기구이다. 각 부문 영역들이 자신의 활동을 주도적으로 끌어간다면 그 흐름들을 총괄하는 상층단위가 범국본인 셈이다. 그런 범국본이 이러한 전체 대응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만큼 범국본이 현재 제자리를 잡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각 부문 공대위에서 각계의 토론회 및 대중 사업을 통해 부문 영역들의 의제를 발굴하고 여론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범국본은 그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한미FTA를 둘러싼 지형, 외부 충격요법을 통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완결판을 만들겠다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폭로를, 한미FTA를 둘러싼 지형 속에서 FTA, 개방형 통상국가, 자유무역의 한계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과 함께 한미FTA 반대를 외치는 범국본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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