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강도범? 시인?? ... 꿀잠!

[문화활동가를만나다](2) - 현장에서 노래하는 시인 송경동

송 경 동. 시인이다. 구로시장에 가면 그가 있고, 가리봉 오거리에 가도 그가 있다. 평택 대추리에, 기륭전자 농성장에 그가 있다.

  송경동 시인

그는 시인이 아닐지 모른다. 문예일꾼, 노동운동가, 구로지역 활동가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송경동 시인이 특수강도죄로 징역을 살았던 사실을 알까? 민족시인 김남주가 특수강도죄로 징역을 살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송경동 시인도?

그의 시에서 살짝 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3월 말에 나온 첫 시집 ‘꿀잠’(삶이보이는창 펴냄)에는 빠져있다. 송 시인은 실고 싶었을 텐데, 아마 그의 지인들이 빼자고 했을 것이다.

송경동 시인을 발가벗기려고 구로동을 찾았다. 구로노동자문학회(구노문)가 있었던 가리봉 오거리 목욕탕 건물 3층을 찾았다. 이제는 목욕탕도 없고, 구노문도 없다. 송 시인의 삶의 반은 뭉툭 썰어 넣었을 구로문은 지난 2월, 20년의 역사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목욕탕을 찾다

시인이 시는 쓰지 않고 회의를 하고 있다. 올해가 박영진 열사 20주기다. 행사 준비를 위한 지역 모임이 한창이다. 작년에는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맞아 동분서주 했는데. 시는 언제 쓸까?

송 시인과 만남은 회의 뒤풀이로 소주를 한잔 마신 뒤에야 이뤄졌다. 봄비가 온다. 거센 바람을 몰고 내린다. 소란스럽던 구로시장은 어둠에 잠이 들었다.

아마 송 시인은 늘 그랬을 거다. 술이 한잔 되고, 어둠이 내리고, 구로시장을 찾았을 것이다. 시장 한가운데 있는 건물 4층, ‘도서출판 삶이보이는창’ 사무실 형광등을 켰을 것이다. 시끌벅적했던 시장의 생선가게 아줌마, 채소 할머니를 불렀을 것이다. 술상 대신 원고지를 펴고, 젓가락 대신 연필을 쥐었을 것이다.

네가 상처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리봉으로 와. 아무도 없는 술집에서 뼈해장국 시키면
거기 네 설움이 울대째 넘어온 듯
퉁명스러운 감자 몇 알이 묻어나올 거야
(송경동의 시, ‘오거리 뼈해장국’ 가운데서)


송 시인의 고향은 벌교다. 그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15년을 거슬러 올라간 1991년. 새끼목수로, 배관공으로, 용접공으로 떠돌면서 벌었던 적지 않은 돈을 충남 서산 삼성종합화학 건설현장에서 우연한 교통사고로 모두 날리고 다시 잡범 징역 한달 보름을 살고 나온 후, 다시는 돈을 쫓는 무의미한 일에 인생을 주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아부지 서울에 갈랍니다.”
“뭐 땀시 간다냐.”
“서울에 가면 친구들이 취직시켜준다고 올라오랍니다.”
“그러냐. 돈 열심히 벌 거라.”
굳이 아버지께 서울로 가겠다는 말을 한 까닭은 서울 갈 차비가 없기 때문이다.

“근디, 아부지 돈 만 원만 주세요. 서울 가서 보내드릴 테니.”

설마 아버지가 서울 가는 아들에게 만원만 주겠느냐 싶어, 만원만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옜다. 만 원.”

만원 한 장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정도 없지, 어찌 만원 달란다고, 진짜로 만원만 주나.’ 담배를 한 대 핀다. 자존심을 지킬 거냐, 아니면.

담배 한 개비를 필터가 탈 정도로 깊이 마시고, 다시 대문을 열고 아버지한테 갔다.

“아부지, 이만 원만 더 꿔주세요.”

옜다, 만 원

그렇게 차비 3만원 달랑 만들어 서울로 왔다. 그가 찾은 곳은 김남주, 이시영, 정희성 선생이 열었던 ‘한국문학학교’였다.

송 시인은 어렸을 적 심하게 이질을 앓았다. 이질에는 익모초가 좋다는 말에 어머니가 익모초를 달여 먹였다. 다행히 이질에서는 벗어났지만, 혀가 마비가 되었다. 익모초를 너무 많이 먹었다.

그 때부터 시인은 말더듬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시인이 책을 읽을 적에는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시인은 집에 오면 혼자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가갸거겨고교구규’ 책을 보면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인에게 문학수업은 말더듬이에서 벗어나려는 책읽기였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집에 들어가면 소리 내어 읽었던, 말하기 연습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주먹 쓰는 거나, 뒷걸목 어슬렁거리는 것 빼고. 공부야 일찍이 담을 쌓았고. 참 주먹도 제대로 못 썼지. 싸우면 팔이 짧아, 늘 한 박자 늦어.”

  새벽 방조제에 앉아 마산만을 바라본다.

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시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 숙제로 쓴 시를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칭찬을 해 준 거다.

말더듬이의 첫 칭찬

“학교 다니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이 된 거지. 그 때 칭찬이 계속 내 머리에 남아 있었던 거야.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그에게 다시 글을 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광주 충장로 뒷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기지 않은 겨울, 그는 ‘특수강도죄’로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소년원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봄을 두 번 맞이하고, 겨울이 되어서 그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절이 그에겐 너무도 소중한 인생의 시간들이었다고 한다.

“온갖 삶의 상처난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지. 열 여섯 나이에 소년원을 세 번씩이나 드나들며, 본적도 첫 소년원 주소를 가진 아이도 있었어. 그곳에서 문맹반 반장이었지. 나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를 가르치며 프로이드를 따로 읽지 않아도 결핍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김지하를 읽지 않고도 자유가 얼마나 그리운 것인지를, 맑스를 읽지 않고도 구조와 계급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었어. 한땐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아픔과 상처의 기억들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소중해서 다른 누구의 어떠한 행복한 과거와도 바꾸고 싶지 않아. 또 그게 나인 걸 왜 돌이켜야 해.”

하지만 사회의 불량품으로 낙인찍힌 그가 갈 곳은 많지 않았다. 뒷골목 직업과 공사장을 돌다가 여수석유화학단지와 광양제철소, 멀리 서산의 건설 현장 등지로 팔려 다니며 그는 본격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박노해, 백무산의 시까지도 난 낯설었어. 이건 분명 우리의 이야기지만 우리 전부의 이야기는 아니다는 생각. 내가 만난 사회 하층 민중들은 그렇게 전형적이지만은 않았어. 그렇게 희망차지만도 않았고, 순수하지만도 않았어. 오히려 수많은 갈등과 모순의 응집덩어리였지. 난 더 비루한 삶의 바닥으로 내려가 그런 사람들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 결국 나도 충분치 못했다는 생각이지만, 그들이 언제라도 내 시를 읽고 어, 이거 진짜 내 얘기네. 내 삶을 알고 쓴 시네, 하는 시들을 써보고 싶었지. 미래의 꿈에 대한 표현도 딱 그들이 마음 속으로 동의하고 한발짝 같이 나갈 수 있을 만큼만 쓰는 그런 시."

천장 있는 곳에서
  첫 시집 "꿀잠" 표지 [출처: 도서출판 삶이보이는창]
일해 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
발전기 내리고
쓰러져 잠든 새벽이면
작업선들도 곤했다

전기선 위에 그라인더선
그라인더선 위에 절단기선
절단기선 위에 알곤선
…(가운데 줄임)
수평호스 위에 사게보리 실까지
얽히고설켜
잠든 모습이 착했다

하늘 위에서 보면
작업장 이곳 저곳 쓰러져 누운
우리 모습이 또 그렇게
칡넝쿨마냥 얽혀 보였을 것을
깊은 잠들에 빠져
우린 우리의 얽힌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송경동의 시, ‘철야’ 가운데서)


중학교 때 받은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 바로 문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가 없었다.

신문에 마침 ‘한국문학교실’ 수강생 모집 광고를 실렸다.

“그런데 내가 아는 시인들이 한명도 없어. 문학이 뭔지도 몰랐는데, 노동문학 민족문학은 더 낯설었지. 서정주, 유안진, 뭐 이런 대중적인 시인들 이름을 겨우 기억했지. 박노해가 누군지, 백무산이 누군지도 몰랐어. 근데 김남주라고 적힌 거야. 아, 신문에도 잘 못쓰는 경우가 있구나.”

그는 ‘김남조’ 시인을 잘못 표기해 김남주라고 쓴 줄 알았다고 한다. 김남조 시인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특수강도 출신의 민족시인 김남주를 만나게 했다.

김남조(?) 시인을 찾아

서울로 온 시인은 날일을 하며 공사장을 떠돌며, 라면값을 벌어야 했고, ‘한국문학교실’에서 또 다른 문학의 만남을 가졌다.

“진보적인 시인들을 만나면서 고민했지. 내가 가야 할 곳을. 내 삶이 그랬듯 노동운동을 생각했고, 구로에 노동자문학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15년이 훌쩍 흘렀다.

4월 21일 용산역 주변. 시인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구순이 넘은 옛 빨치산 전사이기형 시인이 연세를 잊으시고, 그 자리에 나온 것도 놀랐지만, 송 시인의 시를 열정을 넘은 패기로 낭송하는 것을 보며, 놀랬다. 백기완 선생도 앞자리에 앉아 계시고, 남민전 전사이기도 했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선생,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있는 정희성 선생, 김세균 교수, 사이버노동대학의 김승호 선생 등 쟁쟁한 어른들이 함께 했다.

하지만 시인의 출판이 남다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날 국회 앞 집회를 마치고, 투쟁조끼를 입고 달려 온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있고, 지역과 서울 각지의 활동가들이 문인들 보다 더 많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늦게까지 함께 했다.

구로지역에는 숱한 노동운동가들이 찾아왔고, 떠나갔다. 구로에서 활동을 훈장처럼 달고, 자신의 출세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시인은 아직도 구로에 있다.

아직 구로에 있다

“왜 떠나지 못하냐고?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아 서지. 나처럼 막 살아온 사람은 아직도 배울 게 넘쳐. 늘 부족하고, 아직도 느끼지 못한 게 많고. 다른 사람처럼 공부하며, 민중을, 노동을 안 사람이 아니잖아.”

세상은 10년 단위로 변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변화를 바라고,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다고 한다.

“뿌리를 지키고, 일관성을 지키는 운동이 필요한 것 같아. 삶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살다보면 풀이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하겠지. 그 향기가 멀리가지 않겠어.”

시인의 걸음은 느리다. 말도 느리다. 그가 살아온 삶도 더디 간다. 그의 시집이 마흔이 되어 나온 것처럼.

하지만 시인의 걸음은 바르다. 또박또박 걸음을 걷고, 또박또박 시를 쓴다.

“처음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 미련하게 생각한 게 있지. 이십대에는 미처 하지 못한 공부를 하고 싶었고, 삼십대에는 사람들 속에서, 실천운동을 하며, 나도 누군가와 더불어 내 삶을 나누고 싶었지. 그리고 마흔이 되면 본격적으로 문학을 해봐야지 다짐했지.”

시인의 다짐에 비하면 마흔의 첫 시집은 늦은 게 아니라 너무 빠르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고 싸워봐야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 몰라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진정성이 얕아 다른 사람의 삶을 왜곡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마흔이 되면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 생각한 거야. 문학 천재를 비교하면 늦은 거지만 나는 전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지. 오히려 빨리 나온 거지.”

여기서는 얄밉게도 겸손하다. 더 얄미운 것은 겸손한 말처럼 살아온 시인의 삶이 밉다. 민주노총을 쫓아다니며 노동자 문학캠프를 열고, 전국농민회를 쫓아다니며 농민문화제를 연다. 스무 해가 지난 구로동맹파업 참가자들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운 만남을 연출한다. 지쳐있는 얼굴이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넘어서는 얄미움을 준다.

얄미운 시인

“시가 무기가 되고, 도구가 되는 게 뭐가 문제야. 민중들에게,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도구가 되고 힘이 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참여와 문학은 동떨어진 게 아니라 대다수 사람과 소통이 되는 건데….”

집회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시인이 많지를 않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거리의 시인으로 불린다. 구로공단을 넘어, 칸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자리에서, FTA 투쟁의 현장에서 그는 시를 절규하듯 읽는다. 가녀린 삶의 현장에서 친구처럼 읽히는 키낮은 시와 아울러 그는 다시 ‘동지의 시’도 필요하다고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 그를 불러 가는 게 아니라 그가 현장을 쫓아간다.

올해 잡아먹은 안경이 네 개째다
5년째 안경 하나로 버티는 아내는
어디 재벌집 아들하고 살지
같이 못살겠다고 한다

하나는 지역 민중연대 발대식 날이었다
새로운 조직을 띄우는 날
…(가운데 줄임)

세 번째는 얼마 전 농민대회에 나가서다
해 저물녘 제일 악독하다는 1001부대와 맞서 싸우다였다
…(가운데 줄임)


그래서 나는 이제 바란다
편파적으로 구체적으로 바란다
안경이나 뺏어가는 소극적 싸움이 아닌
진정한 싸움을, 내게 걸어달라고
차라리 내 영혼의 눈을 거둬가 달라고
(송경동의 시, ‘잃어버린 안경’ 가운데서)


얼마 전에는 평택 대추리 황새울에서 또 하나의 안경을 잃어버렸다. 앞으로도 숱한 안경이 깨어질 거고, 사라질 거다. 시인은 시는 바로 안경을 잃어야, 위선의 눈을 벗어야 나오기 때문이다.

시인이 특수강도로 징역을 산 것은 스무 해가 지난 이야기지만, 아마 그는 지금도 손에 식칼을 쥐고 있을 것이다. 그의 칼날은 어디에 견주고 있을까.

아직 손에는 식칼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의 단편에 불과하다. 시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은, 차마 표현하지 않은 마음이 시인의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마흔, 이제 시인은 다르지 않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할 것 같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눈물 흘린 구절이 있다. 물론 그의 시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말’ 끄트머리에 시인은 썼다.

“세상의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선택해 삶이 늘 견딤이고 아픔인 수정과 관호”

여기서 수정은 시인의 아내이고, 관호는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술집을 거쳐 노래방에 갔다. 나오니 새벽 동이 터온다.

삶. 이. 늘. 견. 딤. 이. 고. 아. 픔. 인. 수. 정. 과. 관. 호.


마흔의 시인, 송경동. 마흔의 시는 아마 여기서 시작할 것 같다. 더 이상 시인의 가슴에 웅크리고 있기에는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지금 아파하고 있다. 시인도.

"사랑했던 사람들, 사랑했던 일들을 더 오래 사랑하는 일만을 남겨 놓겠다.”

시집에 쓴 ‘시인의 말’ 마지막 말이다.
덧붙이는 말

틈틈이 '문화예술활동가'를 만나 수다를 떱니다. 문화예술활동가들과 격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민중의 문화, 노동의 문화가 꽃피는 세상을 바라며 이어달리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