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에 미래는 없는가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2) - '노동해방문학'을 꿈 꾼 시인 정우영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편집자 주



1. 재앙이 시작되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재앙은 시작되었다. 지향의 근거가 혼미해지면서 노동문학은 몹시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파업과 공장, 선진노동자, 조합투쟁과 승리를 주요 축으로 하는 노동문학에 구호화, 도식성이라는 혐의가 나붙으며 뒤숭숭한 터였다. 이제 문학은 더 이상 계몽과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노동시는 9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급작스레 사양길에 접어든다. 여기서의 사양길이라는 의미에는 ‘쇠락’이라는 뜻과 주변부로 밀려남이 포함된다. 이제 노동시는 두 개의 극단적인 행보를 선택하게 된다.

한 축은 사양길에 동조하여 노동문학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부류이다. 적지 않은 시인들이 이데올로기에는 지친 표정으로(물론 이들 중 이데올로기에 종속당한 시인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낡은 서정과 ‘대중 추수’ 우산 아래로 피신해 들어갔으며, 또 적지 않은 시인들이 개인의 심연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대표적인 노동시인인 박노해는 평화 전도사로 나섰고, 백무산은 인간과 경계로 시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흔히 일컫는 ‘후일담문학’은 노동시를 쓸쓸한 추억의 앨범으로 내몰면서 이 경향의 확산을 부추긴 바 있다.

다른 한 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시를 지순한 연정의 대상으로 삼고 끊임없이 노동 현장을 서성거린 부류이다. 김해화, 김명환 등이 동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일과시> 동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80년대에 비추면 절대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 얼마 전 오랜 동안 노동 현장을 지키던 구로노동자문학회의 해체는 이 부류의 쇠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노동시에 대한 열렬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은 문학판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주요 문예지나 한 해를 결산하는 주요 연간선집 등에 노동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최근 나온 성과물로는 조기조의 <기름미인>(실천문학사)이 그나마 주류 출판의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조금 더 지나면 노동시는 주변부에서도 사라져 흔적만 남을지도 모른다.

지금 열정을 다해 노동시를 보좌하는 삶이보이는창과 갈무리 출판사가 자본의 휘둘림에 의해 고갈되어 버리면 오프라인에서 노동시는 설 곳을 잃고 말 것이다.

2. 노동시에 미래는 있는가


이쯤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노동시에 과연 미래는 있는가. 나는 80년대를 되돌아보고 싶다. 미래는 종종 과거로부터 되살아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80년대 한국의 노동문학은 현장 노동자들의 글쓰기와 지식인 작가들의 글쓰기라는 두 가지의 흐름이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단일한 흐름으로 합류하면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19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효과이자 산물이었다. 노동자들의 글쓰기가 공식 문단의 주변에 모습을 나타내면서 문학 활동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부터였고 억압되어 온 노동자들의 느낌과 목소리가 충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198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백무산의 「지옥선」 연작에서였지만, 그것이 노동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범주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만큼 힘을 갖게 된 것은 1987년 이후였다.(159)… 정인화, 김해화, 박영근의 시들을 포함하여 1988년 발간된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는 복종을 거부하는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자기표현의 욕구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깊고 강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조정환, 󰡔카이로스의 문학󰡕, 159-160면)

80년대 노동문학은 조정환이 잘 정리한 대로 19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효과이자 산물이었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는 부분은 이 지점이다. 조정환이 “복종을 거부하는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자기표현의 욕구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 깊고 강했다”고 보는 것과 같은 에너지가 현재에도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당장 드러나는 현상으로 보면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같은 결정적인 힘의 응축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지금과 같은 흐름은 일시적인 소강상태이며 분출 기회를 암중모색하는 시기라고 여기는 것이다. 비정규직문제의 지난한 싸움과 대추리 평화 지키기 운동, 한미자유뮤역협정에 반대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보라. 지금의 상황은 정치적 환멸과 피폐한 삶이 가져온 일시적 위축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노동시의 현재적인 모습은 단지 그 에너지에 추동받아 글로 써야 할 사람들이 드물 뿐이며 시인들이 변화된 욕구를 반영하는 문학의 상(像)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 노동시를 작업장의 현실과 노동자들의 투쟁 및 노조 문제 등을 그리는 형태로 써서는 안 된다. 이는 시대착오적이다. 2006년 현재를 둘러보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 밖에서, 아무런 노조도 없이, 일상적으로 늘 새로운 싸움을 벌여 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공장과 노조 등을 축으로 하는 노동문학관(觀)을 지키려 한다면 이는 변화된 현실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문학은 앞에서 말한 구호화와 도식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보수 문학’이 될 수밖에는 없다. 수구 반동 문학만 보수 문학인 것은 아니다. 변화된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학은 다 보수화의 함정에 빠지게 마련이다.

사실, 80년대 노동시의 주요생산기지였던 공장은 이제 유일한 적대적 장소가 아니다. 물론 아직도 공장은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며 원천적인 노동운동을 동시에 생성하고 성장시키는 주요 동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의 노동은 전면화되고 있다.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은 인터넷과 컴퓨터에 의해 고도화한 형태로 퍼져가며 삶의 전면으로 공장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래적인 의미의 공장과는 전혀 다른, ‘지식 공장’이라는 이름의 공장이 인터넷을 통해 버젓이 집안으로까지 침투해 있는 상황이다. 자본과 노동이 삶의 영역에서 동시에 발현되는 것이다. 노동시가 유연해져야 한다는 당위는 여기서 비롯한다.

이제 노동시는 인간의 감성과 실천을 동시에 보여주는 시, 삶의 진정성을 담되 계몽이 아니라 정서에 호소하는 시, 생활의 전면에서 늘 새로운 싸움을 담지하는 시가 아니면 안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노동시’라는 개념을 다시 볼 필요가 생긴다.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시라는 개념으로는 포괄할 수 없을 만큼 노동의 영역이 넓혀진 것이다.

  정우영 시인
이때 어떤 평론가는 ‘삶문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 이면에는 “노동은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활동이면서 우리의 삶 자체이다”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개념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삶문학’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노동문학이 가져야 할 성격이 무뎌지고 모호해져 버린다. 잘못하면 자잘한 일상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생활문학이라고 호도될 염려도 있다.

나는 노동시라는 개념은 그대로 놓아두고 싶다. 노동의 영역이 확장된다고 해서 노동시(문학)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창조되건 간에, 자본주의적 삶을 극복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끈질긴 투쟁으로서의 노동시는 상존할 것인 까닭이다.

3. 시적 감동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쯤에서 나는 두 편의 노동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두 작품이 내가 앞서 제기한 노동시의 정의에 딱 부합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를 잘 담고 있다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하필 이 작품을 골랐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예전이든 지금이든 관계없이 노동의 가치는 한 군데로 귀착되는데, ‘밥’이다. 밥을 먹고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우선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규정한다. 밥 먹여 주지 않는 노동은 죽은 노동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이 그 밥을 다루고 있다.


당당하던 크레인
괼괼거리던 지게차들
왁작거리던 사람들
쓸쓸함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공장,
녹슨 철망을 타고 오른
넝쿨장미 꽃은 어김없이 붉기만 한데
오늘은 혼자 너를 본다
꽃이 아니라서
꽃처럼 활짝 웃어보지 못했다면
말이 될까
지난 시간이 되돌아 와도
또 그렇게 스크럼을 짤 수밖에 없으리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슨 애절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무슨 무슨 계급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단순히 그래,
단순히 밥의 문제였다
울을 타고 꽃을 피운 네 자태도
슬쩍슬쩍 훔치기만 했던 내 마음도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 한 장 쓸 여유마저
앗아가 버리는 밥,
여전히 밥이 문제지만
오늘은 잠시, 잠시만 잊기로 한다
툭 꽃잎을 떨군 다음에야
찾아오는 편안함 같은 것,
그런 마음으로
빈 공장이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지는
-표성배, 「다시 밥이다」 전문, 시집 󰡔개나리 꽃눈󰡕에서


표성배는 줄곧 공장의 시를 쓰고 있다. 어찌 보면 공장일기 같기도 하다. 이렇게 진한 애정과 연민을 담아 공장을 그리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조기조가 기계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한다면 표성배는 공장을 통해 세상을 보려 한다고 할까. 위의 시도 공장을 담고 있으나 텅 빈 공장이다. 착취에 맞서 쟁의를 벌이다가 휴업인지 폐업인지 하는 상태에 놓인 공장이 스케치로 그려진다.

그의 시구절처럼 “쓸쓸함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밥이 문제였다. 밥이 해결되지 않는 공장은 공장이 아니다. 그러나 텅 빈 공장이 마냥 쓸쓸하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그가 잠시 밥을 잊자 빈 공장에서 다정함이 살아난 것이다.

공장의 시가 ‘공장’이라는 닫힌 공간을 넘어 ‘일상’이라는 보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시를 통해 정서적 환기를 경험하는 것이며 시적 감동 또한 울려 나오는 것이다.

송경동의 경우, 밥은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밥은 삶이다. 무언가가 거기 끼어들 여지가 없다.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

체인블록으로 땡겨야 제 맛인 밥
찰진 맛 좋으면 오함마로 떡쳐 먹고
일 없으면 고층 빔 위에 혼자라도 서서 먹는 밥

시큼한 게 좋으면 오수관 때우며 먹고
새콤한 게 좋으면 가스관 때우며 먹고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 하는 밥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

1톤짜리 앵글 져다 공평하게 나눠 먹고
크레인 포클레인 지게차 기사도 불러
함께 비지땀 흘리며 먹는 밥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아내와 아이도 모두 사이좋게 앉아 먹는
그 쇠밥
-송경동, 「쇠밥」, 시집 󰡔꿀잠󰡕 중에서


나는 문득 눈물겹다. 여전히 누군가는 이렇듯 쇠밥을 먹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목울대를 적신다. 아아, 거기에다가 나뿐만 아니라 그 쇠밥을 아내와 아이도 함께 모두 사이좋게 앉아 나누어 먹는다는 게 아닌가.

그게 어떤 쇠밥인가.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이다. 흙먼지와 녹가루, 석면가루가 천연덕스럽게 밥에 얹힌다. 마치 깨나 후추 등을 밥에 쳐 먹듯 그게 일상이라는 것일 테다. 더욱 아픈 것은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이라는 한 줄에서다. 그나마도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가족과도 같은 동지애가 절절하다.

  시집<집이 떠나갔다> 창비에서 펴냄
여기에 밥을 향한 강철 같은 의지가 덧붙는다.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겠다는 것이다. 백무산이 「노동의 밥」에서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고 선언한 이래 가장 치열한 생존 선언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진정이 우러나는 시는 거친 토로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적신다.

4. 건설의 싹이 튼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시의 미학적 완성도이다.(어떤 미학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 차이가 불거지긴 하지만 그 점은 일단 젖혀둔다.) 독자들 수준에 걸맞을 만큼 빼어난가 하는 점이다. 나는 아쉽게도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진정성은 의심할 나위없으나 진정성을 담는 그릇이 어쩐지 헐겁다. 도식성이라는 위협에서 비켜나 있긴 하지만 위태롭다. 무엇 때문일까. 형상화의 문제인가. 아니다, 나는 사유의 문제라고 본다. 문제의식이 사유를 통해 보다 깊이 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긴다. 그러니 자연히 시상이 나열될 수밖에는 없다.

시적 감동은 사실 형상화나 표현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유가 밀어올리는 진폭의 힘이 시적 정서를 환기시키고 이것이 시적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재앙이 걷히면 건설의 싹이 튼다. 나는 노동시에도 이와 같은 건설의 싹이 돋을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주류에서는 밀려나 있을망정 노동시가 자취를 감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이든 현장에서든 이땅에 여전히 노동자가 살아 있는 한 노동시는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문학의 위기라고 하지만 자본주의 유통방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문학은 새로운 활로를 스스로 열어가고 있다. 가상공간을 장악한 저 수많은 비산업적 창작활동을 보라. 노동시도 또한 마찬가지다. 주류적인 문학산업이 외면한다고 해서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

삶의 공간, 노동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창작하고 인터넷 유통망으로 퍼뜨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시의 미래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다만 지금 상황이 조금 열악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시적 사유를 통해 현장성과 절실함을 보여주는 노동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창작 또한 죽은 노동에 다름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말

<민중시>로 등단한 정우영 시인은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편집, 제작 일을 했다. 시집으로는 <집이 떠나갔다 - 창비>,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 문학동네>가 있다. 현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