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눈을 감고 싶었다. 그렇게 2주가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다 함께 투쟁하는데 왜 또 딴지냐 라는 소리를 듣기가 지겨웠다. “너 그 상황 알고 있었으면서 왜 문제제기 안 했냐“라는 목소리들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지쳤다고 할까. 제기해도 변하지 않는 상황이 답답해서랄까.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또 한 번 제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면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나선 용감한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연맹 여성위원회는 지난 22일, 민주노총에 한 장의 공문을 보냈다. 공문의 제목은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의 반여성적 상황극에 대한 입장 통보’였다. 이 한 장의 공문은 그냥 눈 감고 지나치려던 기자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다시 용기를 내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했다.
호랑이의 등장
문제는 전야제 2부에서 진행된 한미FTA 관련 극이 공연되는 중에 발생했다. 2부의 주제는 한미FTA가 민중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공연과 발언이 이어졌다. 이 때 진행된 극의 주인공은 학생, 농민, 노동자였다. 이들은 함께 어우러지면서 자신들의 삶에 한미FTA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표현했다. 등장한 ‘사람’은 모두 ‘남성’이었다. 이 때 까지는 ‘뭐 그럴 수도 있지’, ‘극단에 여성이 없나보군’하고 넘어갔다. 여성인 내가 그곳에 없다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 때 한미FTA의 무시무시함을 표현하는 호랑이가 등장했다.
이 호랑이는 꼬리를 다리 사이로 꺼내 들고 마구 흔들며 “나는 조지 비비고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기자는 눈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상황은 진행되었다. 무시무시한 호랑이는 다시 꼬리를 다리 사이로 연신 꺼내 들고 “너희들의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해 왔다”라며 노동자, 농민, 학생들을 협박하는 장면이 연출했다. 그네들이 말하는 경쟁력은 남성의 것이며, 남성의 성기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웃을 수 없었던 이유
그들은 기자의 문제제기에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웃음을 위해 풍자한 것이다”라고. 근데 기자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내 옆에 있던 다른 여성 기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날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웃고 싶다. 재미있는 극을 보며, 현실에서 막강한 힘으로 노동자들을 죽이고 있는 자본가들을 비천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보며, 내가 할 수 없었던 얘기를 정권과 자본에게 마구 날려주는 배우들의 공연을 보며 마구 웃고 싶었다. 그러나 기자는 웃을 수 없었다.
공공연맹은 민주노총에 보낸 공문에서 “전야제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여성, 남성을 떠나 같은 노동자로서 함께 전야제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이 상황극은 노동자를 떠나 ‘성’을 인지하게 만들었다. 여성노동자들에게, 또한 일부 남성노동자들에게도 수치심 및 당혹감을 느끼게까지 했다”라고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권수정 공공연맹 부위원장의 말을 들어봤다. 권수정 부위원장은 “그 장면을 보고 너무 놀랬다. 옆에 앉아 있던 남성 동지들도 저를 쳐다보면서 이거 성폭력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라며 “극의 내용은 다 공감한다. 그러나 그 내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재미를 주기 위해 성적 이야기를 끌어 들인 것 같은데, 남성들에게 성기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것인지 몰라도 여성에게 남성의 성기는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지적했다.
▲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전야제에서 진행한 극 |
너무나 일상적이기에, 구조적인 것이기에 계속 제기해야 하는 것들
이런 모습은 집회, 문화제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등장한다. “반갑습니다. 노동자, 농민 형제들”이라고 인사하는 발언자들의 말 속에서, 남성들의 얼굴 만 가득한 행사 포스터에서, 집회마다 분노를 터뜨리라고 다 같이 외치라고 하는 욕에서, 여성이 등장하면 무조건 앞치마를 둘러야 하고 밥상을 차려놓고 남편을 깨워야 하는 극에서... 여성은 없다.
권수정 공공연맹 부위원장은 “남성중심적 문화는 집회, 문화제 등등의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민주노총이라는 공간에 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관용구가 되어버린 통계인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라는, 전체 노동자의 반은 여성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문제제기는 매번 이뤄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전야제의 시작은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서 마련한 극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의 문제제기에 성과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주인공인 극이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 첫 공연으로 배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여성위원회가 만들었던 극의 내용은 다시 제기할 계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변화는 있다
변화는 있다. 자꾸 자꾸 제기하면 보는 사람들이 있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더 열심히 제기할 수 있고 그러면 변화하는 것이다.
권수정 부위원장은 민주노총의 반여성적 모습은 “구조적인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이것은 ‘형제’라는 말을 ‘자매’라고 바꿔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운동사회를 포함한 전 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바꿔내지 않으면 어쩌면 불가능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들을 만들어가기 위해 더 많은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공연맹은 공문에서 “더욱 심각한 것은 전야제가 끝나고 십 여일이 흐른 지금까지도 민주노총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민주노총은 너무나 조용하다.
아직 공공연맹이 민주노총에 보낸 공문은 아직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번 문제제기가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