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교수가 교육자적 자질이 없다고요?

[석궁연속기고](4) - 어느 제자의 하소연

폭력적인 수단 동원 의문 안 풀려

저는 1992년 3월에 성균관대 수학과에 입학하여 1996년 2월에 졸업한 김남식이라고 합니다. 김명호 교수님께 집합론, 위상수학을 지도 받은 학생입니다. 교수님은 어렸을 적 학문적인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은 제 스승님이십니다. 또한 교수님과 같이 수학을 토의하고 학문에 관하여 말씀을 듣는 걸 많이 좋아했던 학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포항공과대학교 대학원 수학과에 진학하는데 김명호 교수님에게 큰 도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합격 소식을 듣고 저희 어머님보다 더욱 기뻐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학문적 열정이 남달라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셨고, 항상 가식 없이 편하게 학생들을 대면해 주셨던 김명호 교수님께서 현직 판사에게 석궁으로 유해를 가하였다는 뉴스는 저에게 충격이 아니라 경악하게 하였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뿐더러, 학생들과 같이 축구하러 다니면서 공도 잘 못차던, 운동에 별로 소질도 없던 분이 저렇게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습니다.

최근에 법원에서 공개한 판결문을 읽고서 어느 정도 원인을 알 것도 같습니다. 1996년 당시 성대 수학과에 재학하면서 느꼈던 경험으로 볼 때, 판결문에서 제시하는 김명호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논거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 여기에 몇 자 적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4학년이라도 F학점 나간다 경고

이 글은 당시의 사실 관계를 기록하는 차원에서 쓰는 것이며 김명호 교수가 판사에게 가한 위해를 옹호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판결문에서 나온 1996년도에 저는 4학년이었습니다. 당시 김명호 교수가 강의하던 위상수학이라는 과목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시험을 집단적으로 거부하였던 사건이 있었는데, 저도 같이 수강한 과목입니다. 당시 위상수학은 전공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수하여야 하는 과목이었으나 까다로운 내용이 많이 나와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과목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대 수학과에서 특별한 사유 없이 4학년 학생들에게 낙제(F)학점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명호 교수는 95년 당시에 과목을 시작하면서 4학년인 저희들에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 4학년이라도 F학점이 나간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선배들 얘기도 김명호 교수가 93학년도 94학년도에 이어 점점 학사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추세라서 F학점이 나올 수 있으니 유의하라는 당부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4학년에게 F학점이 나간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95학년도에 위상수학 과목을 수강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94학년도에도 김명호 교수가 강의한 집합론이라는 강의를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주 Quiz를 보고, 퀴즈 점수와 중간 및 기말 시험의 성적을 종합하여 최종학점을 산출하는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도록 학사 관리가 엄격한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이 3학년 때 수강하였던 집합론 강의에서는 약간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을 했었던지 많은 동료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토로하였지만 큰 문제 없이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95학년도에는 딴판이었습니다. 어떻게 4학년 학생들에게 F를 줄 수 있느냐는 불만과 위기감이 학생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입니다. 곧이어 대다수의 수강생들이 회의를 하며 김명호 교수와 협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학을 희망하면서 강의를 적극적으로 수강하던 저와 몇몇 학생들은 이런 단체행동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동기들 집단행동 사실, 아직까지도 서먹서먹

처음에는 김명호 교수가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학생들의 불평에 굴복하여 성적을 조정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최악의 사태를 막아 보겠다고 적극적으로 중재에 노력하였던 학생대표, 유모 선배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김명호 교수와의 면담을 통하여 F는 주지 않겠다는 교수님의 양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요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D를 받으면 졸업 후 취직이나 임용고시에 불이익이 된다 생각하여 이마저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학점을 협상의 대상으로 본다는 게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입니다. 그 때 개인적으로도 몇몇 동기들과는 심각한 의견 대립을 겪었으며, 아직까지도 서먹서먹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학생회의 시간에 집단행동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학생은 회의에서 나가라고 할 정도로 저는 배척당하였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자세히 알고 있는 저에게 법원이 밝히 판결문이 담고 있는 내용은 매우 설득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한쪽의 주장만을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판결문에서 삼는 교육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기준이 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집단으로 학점을 흥정하는 학생들에게 단호히 대처하여 교육의 목적을 일깨워 주는 것이 교육자에게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아무리 무결점의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대한 인식에 헛점이 많고서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육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판결문의 기준 납득 안돼

판결문에는 또한 우수한 학생들을 타학교에 진학시켰다고 비판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김명호 교수가 1991년도에 부임한 후 내내 열심히 하면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사실 1994년도 졸업생 형들 중에는 Kaist에 3명이나 진학하였고, 1995도 졸업생 선배들 중에는 포항공대 3명, 서울대 1명, 1996년 졸업 동기 중에서 저는 포항공대로 진학하였고 서울대에 1명, Kaist에 1명이 진학하였습니다. 1997년에는 졸업 동기 중에 재수 끝에 포항공대로 진학하였습니다. 모두 김명호 선생님에게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성대 수학과도 많이 좋아졌지만 솔직히 그 때 당시 성대 수학과의 연구 환경과 서울대, Kaist, 포항공대 수학과와의 연구 환경은 차이가 많았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이 같이 토의하고 경쟁하여 발전하는 것인데, 아직 성대에는 이런 분위기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고 포항공과대학교 대학원을 추천하여 주셨습니다.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서 성공하여서 제자로서 스승님을 뛰어넘어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96년 당시에 갈등을 느꼈던 선배들도 기뻐하면서 축하해 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데, 도대체 이런 게 교육자적 자질이 없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세상이 이렇게 거짓으로 양심적인 한 사람을 매도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명호 교수의 언행이 직설적이라 비난했습니다. 맞습니다. 김명호 교수는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하는 것도 자주 듣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이과대 농악동아리에서 연주하는 꽹과리 소리가 수업을 방해한다며 심하게 욕하는 행위 등 직설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수업 방해라는 식의 전제가 항상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대학교 공간 속에서 자신의 의사 표현을 거침없이 했다는 것이 교육자적인 자질을 심하게 의심하는 근거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경험했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김명호 교수님 연구실은 화장실 앞에 있었는데 한 번은 지나가다가 이면지를 주워 가시는 것을 목격하여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한 번 쓰고 사람이 버리는 걸 아까워서 본인이 다시 쓰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도 어찌 보면 구두쇠의 정도가 심하여서 정말로 교수 품위를 깎아 내리는 자질 부족의 단면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김명호 교수님은 수학과 대청소 날이면 학생들과 같이 손수 벽을 쑤세미로 닦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김명호 교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비록 불미스런 사연으로 지금 비난받아 마땅한 처지에 놓였지만, 지난 사연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마음만 점점 무거워집니다. 지금의 사건은 본인의 말대로 감수하더라도, 지나간 과거의 진실이라도 꼭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붙이는 말

김남식 님은 1996년 성균관대 재학 당시 김명호 교수의 제자로, 당시 상황과 현재 김명호 교수에 대한 소회를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