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대기조’라는 굴레 벗어야 하니까요”

[인터뷰] 김옥진 울산장애인부모회 회장

정치인의 단식농성에 정치적 요소를 배제하기란 이를 바라보는 사람도 행하는 사람도 쉽지 않다. ‘좌파 신자유주의’로 자칭한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 우박과 함께 ‘중도개혁세력’들의 한미FTA ‘속칭’ 반대 단식농성이 쏟아지고 있다. 한편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는 장애인교육권 확보를 위해 교육주체, 학부모, 장애학생 약 50여명이 지난 26일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들의 단식농성을 최근 속출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단식농성과 한 무더기로 묶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것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란 심정으로 농성장을 숨어들었다. 나름 바바리코트도 입고, 머플러도 둘렀다. 아차! 색안경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날씨 탓이었다. 28일 국가인권위원회 7층 인권상담센터, 첫 날에 비해 갖춰진 농성장에는 각 주체들의 열망이 담긴 하얀 천이 천장 가득 매달려 있었다. 한미FTA 촛불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시청 앞으로 나선 회원도 있고, 국회에서 27일부터 열린 장애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찾은 이도 있어 대체로 농성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인지 몇몇 이들은 곳곳에서 잠을 청하며 피곤한 몸을 달래고 있었다.

  김옥진 울산장애인부모회 회장
3일째 단식 농성 중이던 김옥진씨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오자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7시 비행기, 그 때 시각이 5시 50분이었다. 울산지역 울산장애인부모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옥진씨는 20살인 고3학생의 학부모였다. 의례 아이 때문에 울산으로 내려갈 요량이었거니 했던 추측은 빗나갔다.

김옥진 회장은 “예산도 중요하지만 인식의 변화가 정말 중요한 것 같다”며 “울산지역에서 장애이해교육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1년 진행했고, 강사 12명 배출되었다. 내일 공개 시연회를 하려고 한다. 기관들을 불러놓고 이해 교육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농성장을 잠시 비우게 된 사연을 떨어놓았다.

그녀는 내일 일정을 소화한 이후에 또다시 서울로 올라와 농성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히며, 농성에 참여하지 않은 더 많은 장애아동 부모들의 심정을 함께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옥진 회장은 “급박함을 알면서도 참여하지 못한 학부모들도 있다. 농성에 참여하더라도 아이들을 시설에 맡겨야 하고, 맡길 여력이 안 되서 못 오는 경우도 많다. 주어진 조건이 안 되어서 그런 것인데, 참여하지 않는 부모들도 단식에 참여하는 부모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교육부며 인권위며 쫓아다닌 것도 올해로 14년째, 김옥진 회장은 최근에는 장애이해교육 강사양성에 힘쓰고 있다. 김옥진 회장은 “자존감도 생성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문제해결을 하게 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며 장애이해교육 강사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먼저 공무원들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공무원 교육, 연수 때 정규시간으로 넣으려고 한다. 강사양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2년 동안 공무원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방송이나 언론에서도 관에서 지원해서 정기적으로 장애인을 이해하는 자막이나 영상을 내보내게 하도록 적극 요구할 생각이다”라고 전한다.

시간이 촉박하던 김옥진씨는 과거 14년, 앞으로 또 몇 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장애인 교육권을 위한 자신의 활동들을 전하느라 약 15분을 지체했다. 그녀가 비행기에나 잘 올랐을지 새삼 걱정이 스친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단식농성 3일째다. 3일 동안 어떤 활동있었나?

26일 국가인권위원회에 들어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처음 들어온 날부터 불법이라며 나가라고 윽박질렀고, 농성단은 장소가 안정적으로 확보가 되지 않아 일정을 안정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인권위가 국가기관이라 그런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인권위 직원들과 언쟁도 많았다.

애초에 (울산에서) 올라올 때 일정은 전국장애인대회에도 참여하고, 국회 아이들 작품전시회에도 가는 것이었는데, 농성장이 불안정하여 나갈 수가 없었고 27일부터 진행되는 국회 작품전시회에서 대표자들 테잎 컷팅식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참석하지 못했다. 오늘(28일)도 마찬가지였다. 국회 소위원회 참석하는 의원들 면접도 하려했는데, 교대로 가서 작품전시회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일 단식 농성의 소회는?

  국가인권위 7층에 위치한 단식농성장에 장애인 교육주체들의 열망이 담긴 하얀 천이 천장 가득 매달렸다.
3,4월에 아이들을 두고 빠져나오는 것 학부모로써 어렵다. 마의 3월이라고 한다. 5분대기조, 복도대기조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현재 상황(장애인 정책 법안이 발의된 이후 공전하고 있는 상황 등)의 급박함을 알면서도 참여하지 못한 학부모들도 있다. 농성에 참여하더라도 아이들을 시설에 맡겨야 하고, 맡길 여력이 안 되서 못 오는 경우도 많다.

나만해도 아이들을 병원에 맞기고 힘들게 참여하고 있지만, 아이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참담함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고단해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농성에 참여하고 있다. 단식이 힘들어서 참여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조건이 안 되어서 그런 것인데, 참여하지 않는 부모들도 단식에 참여하는 부모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교육의 현장에 계시니 입법하는 사람들보다 더 절실히 느끼는 점이 많으실 줄로 안다.

우리아이는 20살이고 고3이다. 장애학생들 한두 해 씩 유예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이 필수코스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아이 장애정도가 경해서 일반학교에 공부하고 있다. 학교의 지원시스템은 전무하다. 한마디로 온 가족의 일상이 전쟁이었다. 전투적으로 살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유난스럽게 그랬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침해당했을 때 대응하는 쪽으로 임했다. 교육청을 14년 쫓아다니면서 학교의 부당한 요구에 항의하기도 하고, 학교 내 장애인 지원체계를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차별시정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이는 지원을 더 해달라는 요구라기 보다 일상적 차별 사례들을 시정해달라는 요구였다. 교육청이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장애인에게 교육이 생명이라는 이야기는 기관마다 하지만, 부산은 (장애인 교육) 공간자체가 없었다. 대구에 있는 교수에게 사람만 추천하면 집을 팔아서라도 조기 교육하겠다는 얘기도 했었다. 가계소득의 80%를 교육비로 쏟아낼 정도였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14년전에 4년동안, 영유아지원법제정을 요구하며 활동했다. 지금은 정책을 제안하고, 정책 전반에 대해서도 참여한다. 그랬더니 우리 아이 중1 되니까 처음으로 월 13만원 지원되더라. 이 부분도 요구하니깐 변화하는구나 하면서 벅찼던 기억이 난다.

지역의 특수교사가 없었다. 그것도 요구 했는데,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울산의 특수학급에 전문교사가 처음으로 배치되었다. 장애인교육지원법도 마찬가지다. 염원대로 제정될 것을 기대하며 멈출 수가 없었다.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 법이 제정돼 현장에서 어떤 변화와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가?

통합이나 특수학급에 들어가면 일반학급에 통합된 아이들보다 더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지난 3년간의 투쟁은 제도권학교에서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섞여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교육청은 일반학교에 들여보내기에만 급급했고 지금도 그렇다.

생애주기적인 교육체계도 만들고 통합교육에서 교육이라는 것으로 통합되는 지원이 되어야 완전 방치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부모들도 5분대기조 복조대기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특수한 교육지원이 필요한 아이들이 수혜대상이 되어야 교육의 향상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예산 지원방안 뿐인 교육안은 무용지물이다.

4월 임시국회까지 단식농성하겠다고 밝혔다.

일전에 울산지역 교장 300명을 모시고 장애이해교육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교장 선생님들에게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질문을 던지니, 대체로 “교육을 하는 목표지점이 리더나 전문가를 배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고, “전임교육” 얘기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장애인아동들의 교육목적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를 위해 기초적인 것이 교육이었다. 그래야 주거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이동권을 요구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것이다. 아이의 능력에 대해 체념하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부모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때의 참담함을 느꼈는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부모는 없고, 나 역시 최선을 다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