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딛고 내일을 향해 쏴라(上)

[기고]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50일간의 투쟁



구조적 살인, 50여 일의 투쟁
근본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2월 11일 여수 외국인보호소 3층에서 화재가 발생해 이주노동자 9명이 사망(2월 26일 중상자 1명이 결국 사망하여 이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10명이 되었다)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끔찍한 사고로 인해 이른바 외국인‘보호’소와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의 반인권적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허가된 업종이 아닌 다른 업종의 사업장에 ‘파견’을 당해 미등록의 신분이 되었고 체불임금을 받으려다 결국 보호소에 구금되어야 했던 그리고 숨진 하루 뒤에야 비로소 체불임금 720만원을 받을 수 있었던 고 김성남 씨. 체불임금 420만원을 받아 봄에 결혼할 딸에게 혼수품을 사 주기 위해 꼬박 1년을 보호소에 갇혀 있다가 변을 당한 고 에르킨 씨… 도무지 갇혀 있어야 할 이유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이들이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했는지, 왜 굳게 닫힌 철문에 가로막혀 피하지도 못하고 좁은 환기구가 달려 있는 화장실에서 죽어 가야 했는지, 이들의 죽음은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 인권의 현실을 비극적으로 폭로했다. 이번 화재 참사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사업주의 이해만 반영하고 있는 기존의 산업연수생제도와 고용허가제, 최소한의 법적 통제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단속과 보호소 구금 행정 등 정부의 반인권적 이주노동자 정책이 만들어 낸 구조적 살인이었다.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의 사회운동단체들은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여수참사공대위 또는 공대위)를 구성하여 이번 화재 참사로 드러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을 해 왔다. 한편 사망자 및 부상자 가족들도 여수 현지에서 희생자 가족 모임을 꾸리고 여수참사공대위와 함께 활동을 해 왔다.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정부
진상규명 없는 배상


하지만 정부는 반성은커녕 숨진 이주노동자 한 명을 서둘러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덮어씌우면서 진상을 왜곡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더구나 근본적인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이주노동자 당사자와 각계각층의 목소리에 법무부를 비롯한 행정부 각 기관들이나 청와대는 일언반구의 책임 있는 대답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뻔뻔스럽게도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여 그 끔찍한 철창 수용소에 구금시키고 있다. 지난 2월 26일 임신 7개월째인 필리핀 여성이 임신 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화양리 길거리에서 10여 명의 단속반에게 잡혀가 아무런 의료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구금되어 있다가 필리핀 공동체 회원들의 강력한 항의가 있고서야 풀려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국가배상절차가 마무리되고 있다. 유가족들과 일부를 제외한 부상자들과 법무부는 협상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고 배상심의위원회에서 배상절차가 진행 중이다. 경찰이 이번 여수 화재참사의 피의자로 지목한 한 분을 제외한 사망자 9인의 유가족에게 1억 ~ 1억 2천만원 배상, 피의자 유가족에게는 5천만원 배상, 부상자에게는 1인당 1,000만원(치료비 별도) 배상과 출국 후 후유장애 발생 시 치료목적 재입국 및 편도 교통비와 치료비 보장이 협상의 내용이다. 억울한 죽음과 이로 인한 가족들의 슬픔과 분노가 배상으로 위로받을 순 없겠지만 애초 정부가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배상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번 투쟁의 작은 성과일 수 있다. 하지만 사망자 한분을 근거 없이 방화범으로 몰고 온 정부의 의도가 배상에도 관철이 되었고 애초 부상자들의 요구와는 달리 이후 체류보장이 불충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구나 여전히 이번 참사를 불러 온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이번 화재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고 단속과 철창수용소 구금은 계속되고 있으며 현장에서 사업주가 부리는 횡포와 잘못된 정부 정책으로 이주노동자들은 계속해서 미등록 체류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화재참사 희생자 영결식 [출처: 이주노동자 방송국]

  9명의 유골이 임시 안치된 여수시립승하원 추모관 [출처: 이주노동자방송국]


따라서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국가배상이 마무리 된다 하더라도 이번 참사로 드러난 잘못된 이주노동자 관련 제도와 정책을 바꾸고 인권을 확대하는 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며 새로운 국면에서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이 글이 지난 50여 일간의 투쟁을 평가하고 이후 투쟁을 위한 교훈을 얻는 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시기(2월 11일~19일) :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정부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다

11일 새벽 사건이 터지자 정부는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법무부 긴급대책반이 구성되어 여수 현지에 합동분향소를 차린다. 경찰은 1시 경 1차 수사 브리핑을 통해 화재의 원인을 방화로 몰고 가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구금, 추방 정책과 제도의 반인권적 실상에 대한 비판이 이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려 했다.

한편 다양한 통로로 이 소식을 접한 이주노동자 지원센터의 대표와 실무자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조합(이하 MTU) 등도 역시 여수 현지로 급하게 내려갔다. 현지에 먼저 도착한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이하 외노협) 소속 단체의 대표들을 중심으로 여수 현지 사회단체들과 함께 11일 저녁 6시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시민대책위원회(가)가 구성되고 12일 저녁 여수 현지 사회단체들이 보다 폭넓게 참가하여 대책위가 확대된다.(공동대표로 정병진(여수 솔샘교회 목사), 박상일(여수 민중연대 대표), 김해성(외노협 소속 외국인노동자의 집/중국 동포의 집 대표), 이철승(외노협 소속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 소장), 정경희(민주노동당 여수시위원회 위원장)과 천상국(여수YMCA 이사장)이, 공동상황실장으로 이광민(여수사랑청년회 회장)과 우삼열(외노협 사무처장), 여수 YMCA 1인). 서울에서도 12일 저녁 이주노동자 인권노동권 연대회의(2005년 MTU 아노와르 위원장 석방 투쟁을 통해 건설되어 활동을 해 온 이주노동자운동 관련한 상설적 연대체)를 중심으로 긴급하게 회의가 소집되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가 구성된다.

여수 현지에서 대책위가 구성된 것과 별도로 서울에서 대책위가 구성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선 여수 현지에서 구성된 대책위가 이 문제에 관심이 있고 투쟁의 의지를 보이는 많은 단체들을 포괄하지 못한 채 외노협, 이주인권연대 등 일부 지원 단체들과 여수 현지 사회운동들로만 구성되어 있어 참가 단체의 폭을 넓혀야 했다. 또한 이번 사건이 한국 이주노동자정책의 근본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전국적 차원에서 정부를 상대로 하는 투쟁을 조직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여수 현지의 대책위를 확대하거나 전국적 수준에서의 단일한 대책위를 즉각적으로 구성하기에는 이주노동자운동의 역량이 부족했다.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과 같은 전국적 조직의 경우 이주노동자운동을 조직 전체의 운동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고 이주노동조합이나 공동체 등 역시 전국적 조직을 형성하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2일 서울에서 열린 긴급회의는 여수 현지 대책위와의 긴밀한 협조와 통합적 운영을 전제로 전국적 여론 형성과 투쟁의 조직, 대정부 투쟁의 조직, 여수 현지 투쟁의 지원을 위상으로 갖는 대책기구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4요구로 대책위 구성
수사의혹 제기, 이주노조 정책 문제 제기


또한 이 회의에서는 장시간의 토론 끝에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 법무부장관 퇴진, 국가 배상, 반인권적 ‘보호’ 시설 폐쇄 및 제도 개선 대책 마련, 단속 추방 중단과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임금 체불 등 이주노동자 권리 구제 제도 확립 4가지를 대책위의 공식 요구(목표)로 결정하고 이를 여수 현지 대책위에 제안하여 요구안 통일 및 대책위 명칭의 단일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의 요구가 받아 들여져 여수와 서울 두 곳에서 각기 의결과 집행 체계를 가지는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가 구성된다.(이하 여수참사공대위 혹은 공대위는 서울과 여수지역, 그리고 이후 대구경북지역의 각각의 대책기구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구분을 할 필요가 있을 시에는 공대위(서울), 공대위(여수) 등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물론 전국적으로 단일한 의결과 집행 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 운동의 상황과 수준으로 비추어 볼 때 불가피했다. 공대위는 여수와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의 활동을 4대 요구안을 중심으로 최대한 통합하면서 조직체계상의 연계와 통합까지 모색해야 했다.

12일을 거치며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13일, 현장에서 뒤늦게 라이터 2개가 발견되었고 방화를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며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더욱 강화했다. 신문 지상에는 사망한 9명의 기구한 사연들과 외국인‘보호소’의 끔찍한 현실이 공개되었지만 보호소의 일부 시설을 개선한다거나 관리를 더욱 체계화해야 한다는 정도의 논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공대위와 소속 단체들은 정부 수사발표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정부 이주노동자 정책과 제도에 대한 비판 여론을 확대하려고 했다. 또한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 사회운동 전반으로 조직을 확대하며 피해자 가족들과 연계를 강화하여 투쟁의 주체들을 형성하고자 했다.

피해자 가족이 입국하면서 투쟁이 고양

여수 현지에서는 속속들이 입국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방화로 몰고 가려는 정부에 맞서 진상규명 활동에 개입하는 활동을 벌였다. 합동분향소를 출입국관리소에 설치하고 한 병원으로 시신을 안치해 줄 것을 요구하며 피해자 가족들을 모으고 공대위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법무부와 별도로 합동분향소 및 유가족들의 거점을 형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4일에는 출입국관리소를 점거하다시피 하여 설치한 합동분향소와 공대위 상황실에 철거 압력이 들어 왔고 법무부가 설치한 합동분향소를 중심으로 유가족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대위는 출입국관리소 거점을 중심으로 투쟁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법무부 합동분향소를 장악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이때 일부 공대위(여수) 공동대표들은 법무부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출입국관리소가 플래카드의 정부규탄 내용과 화환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한 데 대해 출입국의 입장도 이해해야 하며 적당히 타협하자는 의견이 내부 회의에서 제시되었다.(공대위(여수) 6차 회의록, 2월 14일 10시) 당시 현지에 있던 활동가들에 따르면 여수 성심병원에 법무부가 합동분향소를 차리는 과정에서도 이를 저지하거나 장악하려 하기보다 결과적으로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희생자 유가족들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출처: 이주노동자방송국]


이런 상황에서 15일을 기점으로 피해자 가족들이 입국하면서 현지 분위기가 고양되기 시작했다. 특히 16일 법무부 장관의 분향소 조문에 대해 공대위와 유가족들이 함께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규탄하는 투쟁을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공대위와 유가족 사이의 연계가 긴밀해지기 시작하였고 법무부가 차린 여수 성심병원 합동분향소를 투쟁의 거점으로 장악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유가족들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사고 소식과 유가족에게 연락도 제대로 취하지 않는 등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대위의 활동에 적극 결합하기에는 객관적인 한계가 있었다. 타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는 것 자체가 이들에겐 부담일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중국 국적 가족들의 경우 공권력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마저 있는 상황이어서 정부 그것도 타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언어상의 장벽으로 인해 공대위와 유가족들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도 어려웠다.

객관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 내기 위한 공대위의 능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를 공대위가 적극적으로 받아 선도적으로 싸워 이들의 신뢰를 획득하는 한편 피해자 가족들을 동참하도록 하여 이들이 스스로 능동적인 행동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투쟁을 지지 엄호하는 광범위한 연대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下편으로 계속 됩니다.)
덧붙이는 말

공성식은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로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공대위 상황실에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2007년 4월 사회운동에 실린 '과거를 딛고 내일을 향해 쏴라 :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이후 50여 일간의 투쟁을 돌아 본다'를 부분 수정, 보완 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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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 외노협 , 이주노조 , 여수 화재 참사 , 이주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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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주노동자

    진실이 드러나네요 민주노총 와서 맨날 데모 하던데 주 봉 희 부위원장 사과하고
    물러나라고 그 사람들 정체 를 밝혀주삼

  • 공대위참가자

    이주노동자방송국은 대안언론 같지 않게 일방적인 글쓰기 제한하는 네티켓 침해가 아직도 있는데... 좀 그네요.
    한때 동지였던 신기자 때문에 그런가요?
    몇 달전 신기자를 매도하는 성명서를 올리고 기자회원에서 퇴출시키는 누를 범하여서…
    음, 신기자가 항의하는 글 쓸까봐서 라는 그 이유하나 때문에요?? -_-
    주의의 시선도 좀 생각해봐요.
    박리더에게 당한 신기자가 오히려 결자해지를 주문했던데, 이제라도 그 리더가 화해로 나와야하는게 인지상정이고 음...


    아, 이번에는 여수 화재 참사 보도 중 외노협을 옹호하는듯한 기사도 올라와 있어 좀 그래요.

    >이주노동자방송국 25일 집회 기사 (여수화재참사 희생자 추모 및 정부규탄집회 열려)
    >당초 집회주최측이 예상했던 1,000여명에 크게 못 미치는 500여명의 이주노동자와 시민들만이 서울역 광장을 지켰다...

    -> 그런데 서울.여수공대위는 집회 참석자를 1000여명으로 집계했어요.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7년04월02일
    > 2월 25일 서울역 앞 집회에서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은 화재 참사의 주범인 법무부와 출입국이 아니라 외노협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여, 이후 외노협이 여수 공대위 상황실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화재 참사에 대해 이 대한민국의 명예가 달린 문제라며,
    화재 참사의 주범을 법무부와 출입국을 넘어 대한민국 우리 모두임을 상기하는 발언을 했어요.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비판하는 발언이라는건 속단이지요.

    또 외노협이라 지칭한게 아닌 '일부 종파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끌어지고 있는...'하고 외노협인듯하는 은유적인 표현을 했는데,
    보도를 외노협이라 찝어 쓴 탐사성 글은 적절하지 않았다고봐요.
    그리고 그 특정단체에게 권고하는 강한 발언을 한것이지, 비판하는 발언이었다는것도 더욱 맞지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