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 '한국인 문제'일까?(下)

[기고] 한국 사회의 구조적 인종주의를 성찰하는 계기 되어야

한국에는 구조적 인종주의가 없을까?

버지니아 공대 살인사건은 한국인들에게도 구조적 인종주의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살인자의 행위까진 아니어도, 그 살인자의 경험은 그들의 아들, 딸들도 경험한 것이기 쉽기 때문이다. 구조적 인종주의는 미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종주의가 보편적이거나 통역사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역으로, 인종주의의 구조는 역사적으로 구체성을 띠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공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들이 재미 교포들의 경험을 반추해 본다면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인종주의 또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어진 사회에서 구조적 인종주의가 상징화된 그 과정은 계층에 대한 제도적 차별(예를 들어 ‘이방인들’ 그 다음에는 ‘노예들’ 그리고 이후에는 ‘흑인들’이 재산을 소유하거나 기독교인/백인과 결혼을 금지하는 법과 같은), 개인적 편견(유색 피부는 더럽다는 믿음), 경제적 착취(아프리카 남성여성을 노예로 이용하는 것), 사이비 과학적 묘사들(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선천적으로 게으르다) 간의 상호 강화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제도적 요소들은 지배계급의 특권과 경제 권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생물학적 본질로 간주되는 차이에 기초해 우월과 열등의 이데올로기를 낳고, 또 강화하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인종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식 인종주의가 식민지 시기, 그리고 그 후에 한반도에 도입되었고, 미 점령과 함께 미국식 인종주의가 또 들어왔다. 한국 전쟁당시 미국에 의해서 “친구”와 “적”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든 황색인들에게 ‘타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미국식 인종주의 경향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한국인들도 미국 내 백인의 흑인에 대한 무자비한 인종차별을 목격하면서 미국의 인종주의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인종주의가 한국에 수입된 것만은 아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가 증가하면서 국내에서도 인종주의가 형성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국제사회에 등장한 직후이다.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에서의 경험은 가혹하리만치 사회적, 제도적 불평등으로 점철 되어 있다. 특히 그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불평등한 영향으로 혹독한 불이익을 받았던 국가들에서 온 경우에는 더 그러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 아래서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왔고, 이 두 경우 모두 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살 수 있는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받고 있다.

단일민족의 자부심과 이주노동자
불법, 이주민이라는 낙인으로 권리박탈이 용인돼


이주노동자들은 법적으로 사업장 이동이 금지 외어 있고, 심지어 사장이 권리를 남용하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경우에도 마음대로 사업장을 이동할 수 없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살기위해 가족을 초청하는 일도 금지되어 있고, 단지 3년만 여기에 체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만약 더 높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찾아 사업장을 떠나거나 체류기간을 넘어서 연장을 하게 되면 이주노동자들은 한국법 아래서 ‘불법체류자’가 되어 추방을 당하게 된다.

본국에서 경제적 어려움과 한국 정부가 집행하고 있는 부당한 제도 등과 아울러, 이주노동자들은 단일민족을 자부심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와 마주쳐야 하고, 이미 사회적 현실의 일부인 문화적 차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착취, 개인적 차별, 법적 부당함은 상호작용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미디어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100여개 다른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경제에서 핵심적이며, 한국 사회를 다양하고 국제적인 사회로 만들고 있다.

조승희 사건과 화성 외국인 보호소 참사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도 지난 3년간 십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강력한 단속의 목표가 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외국인 보호소에서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지만, 그들의 상황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거나 ‘외국인’, ‘불법’으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닌 것으로 묵과된다. 미국 사회의 유색인들과 이민자들처럼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화 시키게 되면, 쉽게 법체계 및 국가 폭력의 목표가 된다. 지난 1월 살해사건의 중국인 용의자를 찾는다는 명목은 안산역 주변의 대량의 무차별적인 단속에 활용되기도 했다(심지어는 그 용의자가 잡히기 전에도 이미 범인으로 지목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경찰과 정부는 2월 11일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사건의 방화범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사망자 중 한명을 너무 쉽게 지목했다. 국가가 범죄자인 ‘타자’를 국가가 가정하는 이런 개별적 사건은 이중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한편에서 이런 사건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편견과 부당한 법적 사회적 제도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주노동자들을 열등하고, 외국인이며 범죄가능성이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들의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본질적이라는 여론에 편승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과 같은 충격적인사건에 초점을 맞추면서 매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욱 미묘한 인종주의적 폭력(그리고 다른 불평등한 권력 구조)을 모호하게 하는 것 처럼, 화제의 원인을 개별적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가두어 버림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구조적 억압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오로지 이주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서만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 가능했고, 여기에 사회운동조직들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전체 운동이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다시 버지니아 공대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얼마 전에 한국 동지가 나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에 접근하면서 비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다. 즉, 우리는 누군가에게 너무 빠르게 비난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조승희 개인이건 일반적 문화에서의 폭력이건 또는 “미국” 사회에서의 소외이건 간에 우리(한국, 재미 교포, 학자, 활동가)들은 이 문제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설사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가 말한 바로 이런 태도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선정적인 뉴스 보도를 읽는데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버지니아 공대사건이 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역사적 조건들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한국의 상황까지도 연결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 한국 사회를 반추하는 기회로

한국인들은 이 비극적 사건을 한국 사회의 유사한 조건들을 반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한국과 미국의 이민자들의 상황은 분명히 다르고, 인종과 인종주의의 조건이 매우 다르긴 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재미 교포 1.5세대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혼란을 겪고 있지만, 개인적인 사건을 넘어 조승희를 비롯한 다른 재미 교포와 한국인 학생들이 미국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이 순간을 통해 한국적 맥락과 그 외국인들의 극단적 주변부화라는 현실에 주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인들은 단일한 민족으로 구성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족, 민족, 언어(종교, 젠더, 성 정체성 등)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한다. 내가 보기에 ‘받아들이는 것’에는 참는 것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려고 하고 (특히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서 불평등하게 만들고 있는 차이), 그리고 이런 불평등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버지니아 공대의 문제를 “한국 문제”로 결론을 내린 이유이다.

[번역]변정필 기자
덧붙이는 말

임월산은 현재 뉴욕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있으며,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재미협의회 국제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둣돌 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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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희 ,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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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원

    "그 살인자의 경험이 쉽게 그들의 아들, 딸만의 문제로 치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은 because the killer’s experiences, not his actions, could easily be those of their own sons and daughters. 라는 구절의 번역인데, 긍정을 부정으로 번역한 오역입니다. 이 문장은 '그 살인자의 행위까진 아니어도, 그 살인자가 경혐한 경험은 그들의 아들, 딸들도 경험한 것이기 쉽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물론 제 번역에도 약간 첨가가 있지만 뜻을 전달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인종주의가 공통적이며 통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은 To say this is by no means to say that racism is universal or transhistorical.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종주의란 보편적이거나 통역사적인 것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로 거꾸로 번역해야 합니다. 여기도 긍정, 부정이 뒤집어졌네요.


    the alienation of "American"society을 "미국 사회의 고립감이던"으로 옮겼는데, 이 구절은 "미국사회에서의 소외이든"으로 옮겨야 맞습니다.


    번역하신 분께서 정말 수고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몇몇 부분에서 오역이 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번역이었습니다.


  • 변정필

    지적 감사합니다. 지적한 부분들을 수정합니다.그리고 독자들과 필자들에게도 죄송합니다. 더욱 정확한 번역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계속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