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 '한국인 문제'일까(上)

[기고] 미국의 구조적 인종주의 간과하지 않아야

33명의 학생 및 교수의 목숨을 앗아간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국인 모두에게 강력한 경종을 울렸다. 미국 내 재미교포 사회의 지도자들은 애도와 사과를 표시하고, 심지어 희생자 및 그 가족을 위한 기금모금에까지 나서고 있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국익의 대변자인 자신의 역할에 이상한 혼란을 겪으면서, 대량학살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한국계 미국인들이 32일간 단식 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에서 대통령, 외무부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도 사과성의 애도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행동은 엄청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이 사건을 “한국인 이슈” 즉, 미국의 한 대학에 있는 학생이 동료 학생들에게 저지른 살인에 대해 한국 사회가 걱정하고 뉘우쳐야만 하는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유는 바로 조승희의 국적이 한국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외국인 “조승희”
조승희는 미국사회에 속해 있었을까?


미국의 언론은 이 사건을 일관되게 보도했다. 일반적으로 미국 언론은 조승희를 “한국 학생”, “한국인 국적” 그리고 “거주 외국인”으로 부르면서 외국인으로 조승희를 색칠했다. 이런 딱지위에 “외로운 사람”, “의문에 싸인 아이”, “비상식적인 폭력” 등의 묘사와 화가 나 무기를 휘두르는 아시아인의 모습을 가진 젊은이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이런 다양한 상징은 반복되면서 상호 강화되었다. ‘미국에 온 외국인’ 조승희 그리고 ‘외부인’ 조승희 등의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너무도 쉽게 이 살인자는 미국사회에서는 낯설고 설명하기 힘든 창조물이 되어 버렸다. 너무도 쉽게. 만약 그가 익숙한 존재라면 그가 미국이라는 사회에 속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만약 그가 이 사회에 속해 있었다면 미국인들이 책임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승희가 정말로 미국 사회에서 외국인일까? 그는 그의 삶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는 미국 미디어, 문화에 싸여 자라왔고, 미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NBC에 보낸 소포에서 보인 그의 분노는 그의 억양과 불완전한 영어를 이유로 그를 따돌렸던 바로 주변 사람들과 자신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었고 그의 슬픔과 고독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더욱이 조승희의 행동은 한국이 아닌 미국 사회에서 만연한 교내 대량 학살의 패턴을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조승희는 8년 전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으로 12명의 학생과 교사를 살해한 두 명의 10대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은 “미국 문제”
계급적 인종주의적 미국사회


조승희가 이상하리만치 수줍고 내성적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의 원인을 단순히 정신질환으로 몰아 그의 행위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신질환과 범죄 성향은 환경과는 분리된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승희와 같은 태도와 행위는 내부적 불균형과 불평등한 사회관계에 의해 초래된 환경의 불균형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비록 완전하고 궁극적인 해답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회적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다. 조승희 사건은 그가 자라온 계급적 인종주의적 미국 사회와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비극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사회 및 문화를 연결해볼 필요가 있다.

한미관계 및 재미교포에 대한 보복을 막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인들이 다소 방어적이었지만, 오히려 한국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국가적 책임이라는 이미지는 조승희가 미국 사회에서 외국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집단적으로 한국인들에게(그리고 아시아인과 이민자들이)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역효과로 작용했다. 미국 주류는 이 비극이 현실에서 어떻게 그들과 연결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버지니아 공대 살인사건은 “미국의 문제”이다. 이 사건은 고립되어 있고, 폭력적이며 인종적, 경제적으로 계급화된 미국 사회라는 맥락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의문은 남아있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이 어떤 측면에서는 여전히 “한국 문제”이기도 할까? 나는 지난 며칠간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오고 있다. 결론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한국의 정치인들이 말했던 것과는 다르다. 즉, “조승희의 피”가 또는 조승희의 국적 때문에 한국인들이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또 “한국의 문제”
이민자들에 대한 착취와 배제구조의 일상화


그럼 뭘까? 그 답은 조승희의 고립과 고통이 폭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구조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조승희의 배경은 젊은 재미교포 사이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고유한 한국 문화나 개성 때문이 아니다. 역사 때문이다. 조승희의 가족은 세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한국 사이에 만들어진 불평등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 그리고 1965년 미국 이민법에서 가족과 합치는 것을 편하게 만들어 주면서 이민이 가능해졌던 그 경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많은 한국계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승희의 부모는 미국에서 경제적 성공을 바랬다. 그러나 돈이 없고, 시민권자도 아니고, 영어도 잘 못하고, 백인도 아닌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에 둘러싸인 사회와 싸워야만 했다. 다른 한국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적은 자본금으로 언어문제와 다른 구조적 한계로 전문적인 직업을 찾을 수 없는 한국 및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틈새인 세탁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조승희의 부모는 조승희와 그의 누나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희생을 보상이라도 하듯.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조승희의 가족들은 미국 내 구조적 인종주의에 포섭되었다. 경제적 위치, 제도적, 사회적 장벽, 개인적 편견 및 생물학적 차이로 인지되고 있는 차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미국과 일상의 구조 안에서 착취와 불평등의 기초가 된다.

인종과 계급적 수직구조는 재미교포와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경험을 형성한다. 많은 한국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나 최고의 공립학교를 보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재미교포 아이들은 부족한 영어 실력과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 놀림을 받기 일쑤다. 게다가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은 아시아인이 부지런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항상 외국인이라는 관념에 마주치게 된다(반면 흑인들은 유전적으로 열등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미국인이다). 그래서 아시아 여성들은 성적 환타지의 대상으로, 아시아 남성들은 나약하다는 것으로 이용된다. 이런 오명에 그들의 친구들에 비해 가난하다는 것이 덧붙여져 심지어는 정신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에게조차 심각한 열등감, 고립감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반 이민자 정서 그리고 범죄인화
구조적 인종주의의 양면이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나


두 번째로 미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점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두려운 반 이민자 정서와 이주민에 대한 범죄인화이다. 이런 분위기는 일터에서 이민자들의 착취, 그리고 사회적 서비스에서 배제, 그리고 강압적인 단속과 추방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재미교포 사회 안에서 버지니아 학살의 보복에 대한 공포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살인이 일어난 후 한국계 및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언어적 학대나 다른 형태의 폭력은 몇 차례 없었지만, 남아시아, 중동 그리고 다른 이민자들에 대해 911 이후에 일어났던 국가 주도의, 또는 개인적 폭력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이런 우려를 부추기고 있다. 이런 반 이민자 정서를 보면 한국의 정치인들이 조승희를 한국 국적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사과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제되고 때로는 분노한 젊은이들과 반 이민자 폭력은 구조적 인종주의의 양면이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버지니아 공대 학살과 이후의 여파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애도를 표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인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에서의 “한국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그들은 구조적 인종주의에 대해 이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내거나 이민을 선택할 때 그들이 합류하려고 하는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을 때 일부 부모들은 이런 것을 극복하라고 밀어붙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부모들은 어떤 지원을 해야 할 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인종주의는 미국 경제 및 미국 사회의 구성과 깊게 연관되어 있어 개인적인 고민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대신에 재미교포 사회가 유색인 공동체들과 함께 제도적 수준에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어내는 집단적 전략이 필요하다.

[번역]변정필 기자
덧붙이는 말

임월산은 현재 뉴욕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있으며,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재미협의회 국제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둣돌 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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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 버지니아 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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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원

    번역자가 수고 많으셨군요.

    그런데, 번역이 여기저기 헛점이 좀 있군요. 비록 완전히 오역이라고까지 말하기는 뭐해도... 운이좋아 본래의 영문본을 먼저 읽어봤는데, 결정적인 부분들에서 번역문이 원래 뜻을 제대로 전달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한미관계 및 재미교포에 대한 보복을 막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인들이 다소 방어적이었지만, 오히려 한국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국가적 책임이라는 이미지는 조승희가 외국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집단적으로 한국인들에게(그리고 아시아인과 이민자들이)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역효과로 작용했다. 미국 주류는 이 비극이 현실에서 어떻게 그들과 연결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여기서 조승희가 외국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다는 것은 조승희가 미국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외국인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주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또,


    "물론 의문은 남아있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이 어떤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지난 며칠간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해오고 있다. 결론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한국의 정치인들이 말했던 것과는 다르다. 즉, “조승희의 피”가 또는 조승희의 국적 때문에 한국인들이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여기서 두 번째 문장은 이렇게 고쳐야 합니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은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다시 말해서, 뒤에 '결론은 "그렇다"'는 말은 이 문제가 '한국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또,


    "이런 반 이민자 정서를 보면 한국의 정치인들이 조승희를 한국 국적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사과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는 문장에서 "무모하다"는 counterproductive를 번역한 말인데, 그냥 "역효과를 불러온다"라고 옮겨야 합니다.


    또,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에서의 “한국 문제”라고 생각한다."


    라는 말은 "바로 이 부분에서 나는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이 "한국 문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번역되었어야 합니다.





  • 변정필

    지적 감사합니다.
    지적한 부분을 받아서 수정했습니다.
    계속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