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기획연재]말라야 반식민지 투쟁에서 여성 게릴라들의 삶과 투쟁

‘흐르는 강물처럼’은 아그네스 쿠의 ‘강물처럼 흐르는 삶: 말라야 반식민지 투쟁에서 여성 게릴라들의 삶과 투쟁’이라는 제목의 책에 나온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아그네스 쿠는 말라야 독립투쟁에서 여성 게릴라들의 삶을 직접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게릴라 투쟁에서 잊혀질 수도 있었던 여성들의 투쟁과 삶을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어본다.



말라야 공산당의 역사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2000만, 그리고 싱가포르는 4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는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뿐만 아니라 선주민, 타이인, 스리랑카인 그리고 인근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 등 다른 국적과 소수 민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1963년 이전 말라야(당시 말레이시아의 이름)는 말라야 반도, 싱가포르 등 11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3년 이후 보르네오 내 바바와 사라왁 같은 예전 영국 식민지들은 말라야와 함께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통합되었다. 이 통합은 보르네오 내 영토를 인근 인도네시아에게 넘겨 주기위한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협약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반 식민주의자이자 민족주의 대통령인 수카르노에 의해 주도되었다. 수카르노는 이후에 CIA와 미국 정부를 등에 업은 수하르토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그 결과 바바와 사라왁의 민중들은 독립을 결정할 수 있는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의 좌익 및 진보 운동(말레이시아 공산당은 여기에 작은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은 말레이시아를 정당성을 가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진보세력은 말레이시아 반도에서 싱가포르를 독립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찬 리콴유(당시 싱가포르 총리)의 시도를 ‘역사적 실수’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말라야 공산당이 말레이시아라고 절대로 부르지 않는다. 대신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라야라고 불렀다. 말라야는 싱가포르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기간 동안 대부분의 말레이인들은 소농이나 소작농으로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말레이 사회는 왕/술탄이 큰 권력을 가진 사회적 수직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구조와 관행에 있어서는 봉건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말라야, 그러니까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각 주는 각각 술탄을 갖고 있다. 영국이 말라야를 식민지화했을 당시, 영국은 술탄을 형식적으로만 유지하고 실질적인 통치 권력을 앗아갔다. 말라야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은 분할 통치를 해왔다. 예를 들어 한 술탄에 대해 다른 술탄을 지지하는 방식이다.

노동분할과 함께 인종분할 통치

말레이 사회는 전통적으로 농경사회로 영주와 소작농이 있었고, 농업노동자들도 있었다. 영국은 19세기부터 중국 본토에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하는 많은 중국 소작농민들을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말라야에 데리고 왔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1950년대 당시 이주노동자들 중에서는 단일그룹으로 최대 규모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중국은 타밀 나두라는 남부 인도 지역의 가난한 소작농들도 데리고 왔다. 이들은 주로 영국인들 소유의 고무 농장의 계약 노동자들이었다. 인도는 당시 여전히 영국 통치 아래 있었다.

따라서 말레이에 있던 세 가지 주요 인종 그룹은 영국의 분할 통치아래서 위의 ‘노동 분할’과 함께 각각 분리되었다.

말레이 공산당은 이 다른 세 그룹 공동체에서 조직원들을 모았지만, 중국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말레이 공산당의 형성과정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영국 정부의 말라야 공산당에 대한 탄압

말라야 공산당은 1930년에 네그리 셈비란 주의 쿠알라 필라 근처 작은 마을에서 건설되었다. 말라야 공산당이 건설되기 전에는 중국 공산당의 지부로만 존재했으며, 난양 공산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말라야 공산당은 거의 중국 본토에서 온 중국계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중국 국민당에 의해 탄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국민당은 당시 장개석이 이끌고 있었으며, 이후에 장개석은 대만의 대통령이 되었다.

1930년 4월 30일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코민테른 극동 사무소는 말라야 공산당을 대표로 참석 시켜, 호치민을 도와 당 대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호치민은 당시 코민테른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초기에 말라야 공산당은 지하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말라야 공산당은 활동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심각한 탄압을 자행하며, 무자비하게 당원들을 체포하고, 감금하고 사형시켰다. 여기에는 당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동조자 또는 멀리 연관이 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재빨리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심한 경우는 말라야에서 실제로 태어난 사람들이나, 말라야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말라야 공산당은 농장(주로 고무와 팜야자)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었고, 광산 및 운송 노동자들도 조직했다. 아울러 중국어나 특정 중국계 언어를 가르치는 중국계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들도 말라야 공산당이 주도하는, 또는 말라야 공산당영향을 받는 학생 운동 및 대중 조직화 사업의 잠재적인 풀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영국계 중등학교의 학생들이 더 엘리트 적이고 친 영국적인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말라야 공산당, 영국 식민지 정권과 협력

일본이 남동아시아를 침략했을 때, 영국은 말라야 반도와 싱가포르가 일본군에게 굴복하기 전에 조차도 오랜 기간 동안 말라야를 방어하지 못했다. 사실상, 방어기능은 말라야 공산당이 다 담당했다.

말라야 공산당은 전혀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보적인 무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말라야 공산당은 영국 식민지 정권과 전략적 협력을 할 수 박에 없었다. 말라야 공산당은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서 그들 자신과 말레이인들을 수호하기 위해 더 나은 총을 얻기 위해서도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영국군들은 갇혀있던 말라야 공산당들을 ‘일본군 반대 말라야 민중(MPAJA)’를 형성하기 위해 석방했다. 이로 인해 말라야 공산당은 적군 바로 뒤에서 게릴라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두 개의 적 사이에서 전술적 협력은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즉 2차 대전 말까지 지속되었다. 사실상 MPAJA는 영국 여왕으로부터 1946년 일본을 패배시킨 데 공헌한 공로로 10여명의 지도자들이 런던으로 초청되어 영접을 받기도 했다.

“전술적 실수”에 대한 논란,
그리고 짧은 기간의 합법 활동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말라야 공산당은 다시 돌아온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력을 계속했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이런 “전술적 실수”에 대한 비난은 당시 당의 사무총장이었던 라이테가 영국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일했던 삼중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비난을 받게되었다. 어떻게 라이테가 말라야 공산당의 지도부까지 침투할 수 있었는지는 현재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가 원래 베트남인이었다는 것과 홍콩 사무소로 보내진 코민테른의 대표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었다.

그가 맑스주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당시에 말라야 공산당원의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존재는 대단히 희귀했다) 말라야 공산당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1947년 말라야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 마침내 그의 실제 정체성이 발각되었고, 결국 타이로 도망간 이후 타이 공산당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1945년에서 1948년 말라야 공산당은 싱가포르를 비롯해 말라야에서 공개적으로 합법 전선 활동을 할 수 있는 짧은 기간이 도래했다. 당시 활동했던 세력들은 영향력 있고, 주도적인 좌익 노동조합, 소농, 그리고 상생운동, 일부 언론, 그리고 다른 대중조직이었다.

이어지는 영국정부의 탄압
다시 지하로...반 영국 민족해방전쟁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후 영국 군행정부가 다시 돌아오면서 가차 없이 말라야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8년까지 영국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말라야 공산당을 완전히 없애려고 했다. 군사적 정치적 탄압의 시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비상 통치’ 아래서 영국은 말레이인들의 모든 시민적 자유를 앗아갔고, 국보법 아래서 공산당 또는 동조자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아무 재판도 없이 무기한 구금 했다.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도구를 소유한 것이 발각되면 즉각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활동가 및 공산당원 혐의자, 동조자의 임의 처형과 실종은 정부의 보안군이 군사작전을 하고 있는 곳에서는 빈번했다.

이런 억압적인 대책들로 인해 마침내 말라야 공산당은 다시금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48년에서 1959년까지 말라야 공산당은 영국군에 반대하는 게릴라 운동을 재건했다. 이 시기는 반 영국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엘리트 무장군을 고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지, 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네팔의 구르카 군인들로 구성된 24개의 용명대대를 고용해 보복했다. 게다가 MNLA를 공격하기 위해 지역의 경찰 및 일반인 및 몇 개의 말레이 대대로 구성된 의용대를 무장시켰다.

6만의 지지를 받은 말라야 공산당
“고립”으로 밖으로 나왔지만


영국은 포대, 탱크 그리고 무장 전차를 비롯해 현대식 무기를 도입해 8,000여명의 남성과 여성의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말라야 공산당 진압에 나섰다. 당시 말라야 공산당은 말라야 공산당 주도의 대중조직 소속 6만 여명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말라야 공산당 및 MNLA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의 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영국은 중국인들을 고향에서 쫓아내 중국인만을 모아놓은 캠프로 보냈다. 이것은 게릴라 및 지하당원들의 지지와 생명선을 자르기 위한 것으로, 말라야 공산당 게릴라와 지하조직원들이 쉽게 식품, 무기 그리고 생필품들을 사람들로부터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캠프들은 “새 마을”로 불리면서, 24시간 경계감시를 받아야했고, 주변은 전기가 흐르는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의 출입구만을 사용했고, 그들은 캠프로 떠나거나 돌아올 때마다 몸수색을 받았다. 무자비한 군사적 도구 외에도 영국은 또한 민간인들을 참수 또는 살해하면서 ‘백색 테러’ 또는 ‘빨갱이 공포’등을 확산시킨 책임이 있다. 이런 테러는 말라야 공산당 및 게릴라 전사들에 대한 가능한 지지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한 것이다.

MNLA는 더욱 고립되었고 깊은 열대 정글에서 생존은 더더욱 불가능해져 마침내 북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말레이시아와 남부 태국과의 국경을 따라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실패한 평화협정...다시 정글으로

말라야 공산당이 지하로 내려간 이후에 1955년 말라야에서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당시 말라얀 최고 창관이었던 턴쿠 압둘 라흐만과 싱가포르의 총독인 데이비드 이었다. 말라야 공산당과 이들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턴쿠 압둘 라흐만이 말라야 공산당의 무조건적 투항을 주장하자 말라야 공산당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말라야 공산당은 정글로 다시 돌아가 게릴라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 게릴라 전사들이 마침내 총을 내려놓고 정글을 떠난 것은 말라야 공산당과 말레이시아 정부가 1989년 평화협정을 맺은 직후였다. 내 책은 여기서 시작한다.

[번역]변정필 기자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