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참패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당 안팎에서 분당론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노동당의 내홍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인터넷신문 '민중의소리'에 당내 평등파 최대 정파인 '전진'의 한 회원이 작성한 '분당 문건'이 공개된 것에 대해 자주파 진영은 말을 아끼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민중의소리'는 25일 한석호 전진 전 집행위원장 작성한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다. 이 문건은 당초 한석호 전 위원장이 전진 홈페이지 내부 회원게시판에 게재한 글로, 현 정세와 분당에 대한 한 전 위원장의 개인적인 의견이 담겨져 있다.
'민중의소리'는 이 문건을 공개하며 "전진이 분당을 추진하게 된 경위와 분당을 위한 권력투쟁 방식 및 이후 계획 등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며 "전진은 대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이 같은(분당) 움직임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예상된다"고 보도하며 전진 측의 '기획 분당' 의혹을 제기했다.
이로써 대선 패배 이후 당내 자주파를 향해 "대북 종속주의와 정파 패권주의의 전면적인 청산이 필요하다"고 총공세에 나선 전진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선 패배 이후 자주파에 '십자포화'.. 최고위 총사퇴 결정
최근 민주노동당은 여타의 정당들이 그러하듯 대선 패배에 대한 평가와 향후 진로 논의가 한창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당 안팎에서는 당권을 장악해 온 자주파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있어왔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지난 24일 '한국일보'를 통해 "친북적인 조선노동당과 그렇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갈라서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분당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조승수 진보정치연구 소장 역시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북한의 군사 왕조정권을 보위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로 통일하는 것을 자신의 최고 임무로 하는 세력과는 진보정당을 함께할 수 없다"고 당내 자주파를 비판한 바 있다.
이 같은 비판은 단순히 자주파와 평등파의 정파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대선 과정에서 당 지도부와 권 후보가 보여 온 행보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식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쇄신' 방법론에 대한 의견들이 분출하고 있는 것.
손호철 교수는 민주노동당이 '코리아연방국' 등 통일의제에 매몰되어 비정규직 문제 등 민생현안을 부차화했다며 이를 대선의 가장 큰 패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조승수 소장도 "사회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한국적 토양과 국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기반하지 않는 그 어떤 노선도, 주의도 의미가 없다"고 당 지도부의 '종북적' 태도가 대선 패배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했다.
이 같은 그간의 평가를 기반으로 당 지도부와 권영길 전 후보는 직간접적 사퇴 압박을 받아 왔다. 워낙에 큰 참패여서인지 몰라도, 당 최고위원회는 내외부의 비판을 받아들여 2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도부 총사퇴를 결정했다.
김창현 전 사무총장·이용대 정책위의장 "노 코멘트.."
그러나 이날 한석호 전 집행위원장이 작성한 문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됨으로써, 쟁점은 대선 평가와 당의 진로 보다는 '기획 분당'으로 옮겨가게 됐다. 전진으로서는 입장이 난처하게 된 셈이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에는 전진을 맹비난 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아이디 '아르템스'는 "분당시나리오를 구성하며 당을 쪼개자고, 분열시키자고 참주선동했던 한석호 성원을 비롯해 조승수와 같은 인사들에 대한 제명조치를 취하라"며 전진지도부의 총사퇴를 촉구했다.
아이디 '당원K' 역시 "전진은 당의 대선투쟁 과정을 철저히 종파적 이해 관철을 위한 종파투쟁 공간으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했다.
자주파 쪽 인사들은 대체로 즉각적인 입장 표명을 피했다. 김창현 전 사무총장은 "아직 내용을 확인하지 못해 언급할 게 없다"고 밝혔다.
이용대 정책위의장도 "보도된 문건의 출처와 성격이 불분명해서 현재로서는 딱히 뭐라고 논평할 게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이 정책위의장은 그간 산발적 의견으로 표출되어 온 분당론에 대해 "옳지 않다고 본다"며 "진보정당이 안팎으로 어려운 조건에서 내부의 문제는 내부 토론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말했다.
정성희 전 기관지위원장 "분당론은 있어도, 분당은 없다'"
김 전 사무총장과 이 정책위의장과 달리 자주파 계열의 정성희 전 당기관지위원장(현 소통과혁신연구소장)은 "지금은 화합하고, 일대 혁신해서 총선 때 회생을 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닥쳐 있다"며 "전쟁 시기와도 같은 대선 중에 분당론이 제기되었다는 것 자체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이번 사안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분당론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분당은 모두가 공멸하는 것이고, 그쪽(전진 등 평등파)에서 그 점을 모를 리 없다"며 "분당론은 있으나, 분당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정 소장은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이 자주파를 겨냥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다수파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소수파가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며 "전진이야 말로 당내에 양대 정파인데 어찌 책임이 없다고 하겠냐"고 쏘아 붙였다.
이른바 '종북주의' 논란과 관련해서는 "종북주의, 친북당 이미지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민심의 초점이 아니다. 이번에는 색깔론도 없었다"며 "민중의 요구와 지향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정파의 입장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종파주의"라고 잘라 말했다.
한편, 정 소장은 손호철 교수와 '민중언론 참세상'을 통해 자주파와 평등파의 결별을 주장한 이광일 성공회대 교수에 대해 "그런 분들이 뚜렷한 대안도 없으면서 (자주파와 평등파가) 결별하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전진, '기획 분당' 혐의에 발목 잡히나
이번 쟁점이 '기획 분당'으로 흘러갈 공산이 있지만, 민주노동당 내부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분당 얘기가 흘러나왔다. 또 해묵은 갈등이 대선을 거치면서 격화됐지만, 선거 기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전진으로서는 이번 문건 공개로 '기획분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 애초의 명분을 잃게 됐다. 전진은 '당 혁신과 제2창당' 의지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비례대표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명분을 얻었으나, 이번 문건 공개로 치명타를 입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