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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풀

[강우근의 들꽃이야기](70) - 붉은서나물

떠들썩하던 말매미 소리가 청승맞은 늦털매미 소리로 바뀌어 갈 때, 길에서 가장 흔히 만나게 되는 풀이 붉은서나물이다.

개체 수로 따지자면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개여뀌나 강아지풀 따위가 훨씬 많겠지만, 붉은서나물은 개여뀌나 강아지풀 위로 훌쩍 크게 자라 오르기에 쉽게 눈에 띈다. 아파트 화단에서 자라는 붉은서나물은 며칠 전 풀베기에서 살아남았다. 둘레에서 몸을 비비며 함께 자라던 바랭이이나 털별꽃아재비, 쥐꼬리망초는 다 베어졌는데, 칼날은 용케 붉은서나물을 피해갔다. 붉은서나물이 워낙 기세 좋게 쑥 자라 올라 있어 풀 베는 이가 일부러 심어 가꾸는 화초쯤으로 여겼나 보다.


붉은서나물이 늦여름 햇살을 받고 쑥쑥 자라 올라 꽃봉오리를 맺을 때쯤엔 꽤나 멋진 꽃잎을 펼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잔뜩 꽃이 피기를 기다려 보지만 붉은서나물은 꽃을 피우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냥 하얀 솜털을 단 씨앗을 쏟아 낸다. 붉은서나물은 이렇게 피다 만 것처럼 꽃을 피운다.

붉은서나물은 국화과에 속한다. 국화과에 속하는 꽃들이 대개 그렇듯 두상꽃차례로 꽃이 핀다. 붉은서나물은 꽃송이 가장자리에 돌려나는 설상화가 없고, 통상화로만 되어 있다. 꽃잎을 달고 있지 않아 꽃을 피우지 않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이미 절반은 꽃이 피어 있다.

붉은서나물은 어떻게 꽃가루받이를 하는 걸까? 같은 국화과에 속하는 돼지풀은 수꽃을 꼬리처럼 길게 세워 꽃가루를 바람에 날려 꽃가루받이를 한다. 붉은서나물은 바람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일 변변한 꽃잎 하나 없는 걸 보면 곤충이 모여들 것 같지도 않다. 꽃송이 둘레에 개미들이 보이는데 개미를 이용해서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붉은서나물은 곤충을 매개로 한 딴꽃가루받이보다는 주로 자기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을까? 길에서 홀로 살아가는 풀들에게는 자기꽃가루받이가 살아남기에 더 적당한 방식인가 보다.

붉은서나물은 북아메리카가 원산인 귀화식물이다. 1972년 경기도 용인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니 국내에 들어와 자라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풀이다. 한 15년 전쯤 나온 도감을 보면 붉은서나물은 "다른 귀화식물과는 달리 도시 주변의 길가나 빈 터에서 자라지 않고 산지나 숲속의 볕이 잘 드는 비옥한 공한지 등에서 자란다"고 나와 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은 주택가, 아파트 단지, 큰길가에서 더 흔히 볼 수 있는 풀이 되었다. 붉은서나물은 처음 자리 잡았던 숲을 빠져나와 길가에 정착해 왔기 때문에, 숲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양등골나물처럼 '숲을 망치는 나쁜 귀화식물'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붉은서나물은 15년이나 된 도감을 다시 써야 할 만큼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그런 모습은 빠르게 바뀌어가는 우리 사회를 닮아 있다. 변화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고 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새 건물이 올라가고 둘레 풍경이 바뀌어 버린다. 건물에 입주한 가게 업종이 늘 바뀌고 간판이 바뀐다. 어제 것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 이런 속도는 사람과 공진화하는 잡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붉은서나물이 우리 둘레에 흔히 볼 수 있는 풀이 되기까지 40년이 걸렸다면 붉은서나물보다 20년쯤 뒤늦은 90년대 초에 들어온 주홍서나물이나 나래가막살이는 그 시간을 절반으로 압축해 버렸다.

붉은서나물이란 이름은 잎의 생김이 닮은 쇠서나물에서 유래되었다. 쇠서나물은 줄기와 잎에 거센 털이 많이 나 있는데, 그게 소의 혀처럼 깔깔해 보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쇠설(舌)나물'이 '쇠서나물'로 된 것이다. 붉은서나물은 쇠서나물을 닮았지만 꽃이 피기 전까지 만이다. 꽃이 피면 확실히 다른 모습을 한다. 붉은서나물은 설상화가 없지만 쇠서나물은 노란색 설상화가 달리기 때문이다.

붉은서나물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붉은색을 띤 쇠서나물을 닮은 풀'쯤 될 텐데, 이 풀에서 붉은색을 찾기 쉽지 않다. 꽃송이를 싸고 있는 포 색깔이 약간 붉은색을 띠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붉은서나물이라 불리기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에 견주어 주홍서나물은 꽃송이 끝이 확실히 주홍색이라서 이름에 걸맞다. 붉은서나물은 꽃보다는 흰색 솜털을 달고 있는 씨앗이 더 꽃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솜풀이라 불리기도 했다.

학교 담장 옆 자투리땅에 제법 많은 붉은서나물이 자라고 있다. 여럿이 서로 다투며 자라서인지 이곳 붉은서나물은 벌써 하얀 솜털을 단 씨앗을 달고 있다. 솜털은 바람을 타고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헛된 욕망처럼 덧없이 길가를 뒹굴고 있다. 붉은서나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진다.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개발주의, 자본이 만들어 낸 욕망에 사로잡힌 내 모습이 마치 거울처럼 붉은서나물을 통해서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