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의 날, 그 하루의 기록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사진 그리고 글


낮 한시 반부터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사 추모제가 먼저 열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오전엔 싸늘한 날씨였지만 한낮이 되면서 따뜻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었다.


잠깐 공원 밖으로 나와서 전경 버스들을 찍었다. 여전히 흉물스러운 저 철창차들.


닭장차들 중간에 끼어 있던 샛노란 살수차. 설마 오늘도 물대포를? 다행히도 거리 행진을 시작하고 나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이 살수차를 볼 때마다 물이 나오는 저 대롱을 분질러 버리고 싶어진다. 이 한겨울에 찬물을 맞으면 얼마나 추울까?


국화 꽃무더기를 그러쥐고 열사를 추모하는 행위 예술을 벌이고 있는 이름 모를 분. 뒤쪽에 사람들이 하나씩 들고 있는 피켓은 그동안 비정규직 투쟁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열사들.


“노동자의 힘으로 비정규직 철폐하자!”


‘아름다운 청년 이용석 노동자상’을 수상한 노래하는 김성만 씨.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곳곳에서 자주 만나 뵐 수 있는 분이다. 아주 오래 전에 김성만 씨를 처음 봤을 때 ‘참 특이하게 노래 부르시는 분이네’라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문화제든 집회든 이 분의 노래를 듣지 못하면 섭섭하게끔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만큼이나 요새 많이 불리는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든 사람이 바로 이 김성만 씨다. “제가 이 노래를 만들었지만 이 노래가 다시 저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히고는 긴 말 대신 직접 마이크를 잡고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불렀다. 노래 말미에 “동지여, 동지여, 꼭 찾아오리라, 비정규직 철폐, 투쟁, 투쟁!” 투쟁이라는 말을 목 놓아 부르짖는 김성만 씨를 보며 가슴 뭉클했다.


연대 발언을 하러 나온 민노당 홍희덕 의원,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오랜 옛날부터 꿈꾸어 온 ‘노동자 농민의 정치세력화’는 언제쯤 알찬 결실을 손에 쥘 수 있게 될까? 각각 두 진보 정당과 민주노총의 지도부라 해도 좋을 분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21세기 초 진보운동사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헌걸찬 모습으로 다시 우리들 앞에 선 김소연 분회장. 그리고 기륭분회 노동자들. 시리우스 원정 투쟁 때문에 다섯 조합원들만이 무대에 섰다. 단식을 푼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얼마 전에는 기륭 현장에서 너무나 힘든 일도 겪었을 텐데 김소연 분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짱짱했다. 그 짱짱함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다.


시를 낭송하고 있는 송경동 시인.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협의회와 기륭 공대위에서 활동하신다고 한다. 한 번 뵙고 술이나 한 잔 나누고 싶은데 아직까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강남 성모병원 박정화 조합원. 강남 성모병원에 갈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맞아 주신다.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하신 듯 눈물이 많으신 분이다. 발언을 하실 때마다 꼭꼭 울먹울먹하시면서 저 멀리 있는 나쁜 놈들을 향해 언제나 눈물어린 분노를 터뜨리신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지만 일부러 방긋 웃고 계신 사진을 골랐다. 다른 곳들 돌아다니느라 한동안 성모병원에 못 갔었는데 내일이라도 꼭 조합원 누님들 뵈러 가 봐야겠다. 새롭게 단장한 천막에서 하룻밤 신세나 져 볼까?


이주노조에서 나오셨다는데 직책과 성함을 적어 두지 않아서 뭐라고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죄송스럽다. 다만 이 한 마디는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주노조 조합원의 발언이 길어지자 뒤쪽에서 “그만하고 내려가!” “길게 했잖아!”라고 몇몇 노동자들이 툭툭 끼어들었다. 발언하고 있는 노동자와 허물없이 친해서 그런 말을 막 해도 되는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이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도둑질이라 생각하고 시비를 거는 노동자들이거나, 둘 중 하나같았다. 어느 쪽이었을까? 뒤를 돌아보니 조끼에 ‘XX노조’라고 쓰여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 현장에서는 이주 노동자들과 특히 마찰이 심하다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짐작이 틀렸기를 바란다.


재능교육 학습지 노조에서 나오신 분인데 역시 성함과 직책은 잘 모르겠다. 죄송스럽다. 대학로에 있는 천막농성장에도 가 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지금껏 가 보지도 못했다. 조만간 꼭 가 보기로 했다. 투쟁 사업장이 가까워선지 마로니에 공원 입구에서 조합원들이 <천막>이라는 재능교육 학습지 노조 투쟁 영상 DVD와 맛난 어묵을 팔고 있었다. 사진 속 조합원의 맨 첫 말은 “저희는 노동 3권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입니다”였다.


기아 자동차 ‘모닝’을 만든다는 동희 오토에서 나온 조합원. (내가 기억하기로 동희오토 해복투 이XX 조합원이었던 것 같은데 영 확실하지가 않아서 이름까지는 숨겨둔다.) 구사대가 휘두른 폭력 때문에 많은 조합원들이 다쳤다고 했다.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모두가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동희 오토의 현실이란다.


대형 현수막을 무대 앞에 걸어 놓고, 이랜드 일반노조 이경옥 부위원장과 ‘학생행진’이라는 단체에서 나온 대학생이 투쟁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기 얼마 전에 무대 뒤에서 이경옥 부위원장님을 잠깐 뵈었는데 살짝 긴장하신 듯 했다.


보신각까지 행진해 가기 위해 도로로 나오는 사람들. 저 앞에 늘어서 있는 경찰들이 보인다. 어청수 경찰청장이 단 한 개 차선으로만 대오가 행진하게 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 참여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적어 보이기를 바란 꼼수였을까? 하여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종로 쪽을 향해 행진하는 사람들. 깡통 매단 줄을 옷에 달아 놓아서 아스팔트를 걸으면 덜그럭덜그럭하는 소리가 났다.


정리 집회가 열렸다. 종로서 정보과장인가 경찰서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집회 중간에 자꾸 끼어들어 경고 방송을 해 댔다. 사회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끗발 없는 경찰서장이 바로 종로 경찰서장이다. 쫄따구와는 상대하지 않겠다”라는 말로 사람들을 웃겼다. 분명히 집회 신고서도 냈고 허가도 받았으며 30분만 있으면 끝나는 집회인데 굳이 경고 방송과 해산 명령을 거듭하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딱 하나다. 경찰은 지나가는 수많은 서울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금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회는 ‘불법’이라는 것을 주입하고 싶은 것이다. 해산 명령을 할 때 집시법 몇 조니 몇 항이니 하는 법조문을 들먹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법과 질서의 수호자라는 경찰 자신의 이미지를 그토록 바짓가랑이 붙잡듯 붙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부르며 오늘의 모든 순서는 끝이 났다. 11월 8일부터 이틀 동안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를 기약하며 사람들은 헤어졌다.

종로 5가쯤을 행진할 때 옆에 같이 있던 사람이 내게 물었다. “대통령이 경제 다시 살아난다 어쩐다 말은 하는데, 오늘 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대회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좀 의미가 있을까요?” 집회가 끝나고 술 한 잔 하면서 어떤 누님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민주노총 같은 조직이 따로 하나 있어야 할까? 아니면 민주노총과 끝까지 함께 해야 할까?” 나는 그 어떤 물음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 하루, 깃발들도 많았고 ‘동지’들도 많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외로워 보인다. 공장에서는 너희들 회사로 가 보라고 하청노동자들을 내치고, 수많은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을 ‘결코 돼서는 안 될 신분’이라 생각하고는 도서관에서 토익 책만 파먹고 산다. 내가 언젠가 강남 성모병원에 대한 글을 쓰며 제목을 지었듯,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