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8회. 오늘(12일) 오후 1시 현재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FTA를 소재로 쓴 글의 조회수다. 민주주의2.0 페이지를 찾아 읽은 사람 숫자는 큰 의미가 없겠다. 대부분의 언론에서 다룬 터니 조회수로 따지자면 글을 읽거나 들은 사람은 수십만 명이 넘을 게다.
조회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글이 끼치는 영향, 그러니까 글의 의제설정능력 말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원고지 20매 채 안 되는 글 하나로 기왕에 체결된 한미FTA 뿐 아니라 현실 정치권 전체를 들었다놓았다.
민주주의2.0 운영자로서의 노하우 탓일까, 봉하마을에서 세상 이치를 꿰는 능력을 키운 탓일까. 좌우간 올해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글 후보 일순위에 거론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선대책후비준’의 모호한 태도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민주당에 쇄기를 박았다. 초기에는 극히 일부 의원만이 ‘재협상론’을 내세웠다. 불과 하룻 만에 거의 당론 수준으로 검토되는 분위기다.
‘조기비준’ 입장의 한나라당은 철모르는 아이 취급하며 일순 평정했다. 미국도 모르고, 오바마도 모르고, 국제 관계도 모르는. 두 벌 일하면서 체면은 체면대로 깎이는, 그렇게 모자란 애들로 만들어버렸다.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한미FTA 조기비준을 하자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한미FTA는 당장의 경기와는 관계가 없다”며 한방에 물리쳤다.
뉴스 액면으로는 헌정 유린으로 지적되는 종부세와 강만수 부총리 해프닝도, 수도권 규제완화 공방도, 경제위기 논란 따위도 서브디렉토리로 몰아놨다. 이게 글을 처음 올린 10일 밤 이후 11일, 12일 오늘까지 불과 이틀 만에 만들어진 상황이다.
과연 과잉판단(오버)일까? 냉정을 갖고 행간을 음미해보자.
노무현식 실용주의 활짝 피다
우선 실용주의를 언급한 대목이다. 무릇 실용주의는 현실 정치인이 갖는 최고의 덕목으로 꼽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모든 정책은 상황이 변화하면 변화한 상황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실용주의이고, 국익외교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이게 원칙이라고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후 호기롭게 실용정부라 불러달라 했지만, 현 정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을 놓고 실용주의 개념을 떠올리는 사람도 거의 눈에 밟히지 않는다. 쇠고기 협상 한 탕 벌인 것은 실용주의가 아니라 남용, 무능, 식민지적 행태로 평가된다. 이처럼 비교되는 탓도 있겠지만, 왼쪽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질주하며 좌파신자유주의의 숱한 위기와 슬럼프를 겪었던 전 대통령이야말로 당대 실용주의의 산 증인이 아닐까 싶다.
분명하다. 봉하마을 낙향 1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갖고 있던 신념이나 철학 따위가 바뀐 건 아니다. 가령 금융허브 전략은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이었다. 공들여 만든 자본시장통합법이 곧 적용되고, 금산분리완화법안과 은행법.금융지주회사법 등도 개정을 앞두고 있다. 참여정부에서부터 검토되고 준비되어온 선진금융환경, 즉 미국식 금융시스템을 정착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리만브라더스는 주어진 굿판을 즐겼을 뿐이다.
암초를 만났다. 머리 속에 있던 선진금융시스템에 빨간 불이 켜졌고, 틈만 나면 자랑삼던 외환보유액도 금융위기가 진행되자 순식간에 위험에 노출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기에 상황이, 국면이, 세상이 바뀐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금융제도와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고...아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우리 경제와 금융 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고 지적했다.
이 변화를 인식하고 대처하자고 하는 건 본능적이자 이성적인 일이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주의의 단면이다. 한미 통화스왑 체결로 일시적으로 안도하는 것 외에 주목할만한 대처방안을 내놓지 않는(못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태도와 크게 구별된다.
좌파신자유주의, 지극히 원칙적인
다음 주목할 점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FTA를 체결해야 한다는 신념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FTA를 살려 갈 생각이 있다면 먼저 비준을 할 것이 아니라 재협상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먼저 비준하면 일이 틀어진다는 판단이다. 한나라당이 국익을 들어 비준해두는 게 유리하다는 논리를 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이 틀어진다는 말 앞에 몹시 주눅 드는 양상이다.
근데 이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미국, 그러니까 오바마 대통령 당선과 민주당 승리의 상하원 조건, 그리고 미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 위기 등 실물경제를 겪는 미국계 초국적자본의 요구가 한미FTA와 어떤 함수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 자동차분과 협상 내용으로 보면 액면상 재협상을 통해 미국이 얻을 건 없어보인다. 관세를 조정하더라도 미국 진출 한국산 자동차 생산량 계획 등을 종합하면 미세한 수준에 불과하다. 더욱이 농업, 금융.서비스 분야, 원산지 분야 등 미국 자본에 현격히 유리하게 체결되어 있다. 한미FTA 협상 내용을 고려컨대 오바마 측이 전체 재협상을 다시 들고 나올 이유가 없어보인다.
아직 오바마 측이 ‘재협상’을 명시한 적은 없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실물경제 위기의 불을 꺼야 할 처지인 데다, FTA라 하더라도 한미FTA가 후순위일 거라는 일부 보도로 미뤄보면, 정치 환경적인 요인이 크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일이 틀어진다’고 주장한 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 감각적인 판단이라는 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다려서 불리할 게 없다고 판단했다. “폐기해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비준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재협상을 철저히 준비하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서 폐기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한미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과 신념이 전제되어 있고, 조금이라도 더 한국 자본에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면 ‘기다리는 전략’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예의 “정치적인 이유로 한미FTA에 대한 입장을 번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양심선언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환기하고 “저의 입장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라고 한 건 명명백백 정확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서는 반성할 일이 하나도 없는 거다. 실용주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고, 예컨대 진화한 좌파신자유주의자로서의 단면을 보여줬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겨눈 칼끝, ‘반신자유주의’
참여정부는 집권 후반기 국력의 대부분을 한미FTA에 쏟아부었다. 범국본 등 운동 진영도 저지, 반대 실천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체결됐고, 시간이 흘렀고, 많이들 잊었다. 추진했던 사람도, 반대했던 사람도 시나브로 한미FTA는 기억속 편린으로 남았다. 그런데 한미FTA 비준이 쟁점이 되면서 국익이라는 신념을 한 번도 접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글 한 편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반대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의 글이 절절이 읽히는 이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쓰던 표현처럼 반대의 ‘진정성’이 엿보여서다. 지금까지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글에 대한 댓글로 심상정 대표의 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결자해지를 촉구합니다’ 만한 게 없다. 운동의 지휘부라면 적시적때에 이 정도 감각을 담은 글을 쓰고 배포할 줄 알아야 한다.
아쉬움이 없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결자해지와 고해성사를 바란 건 의례 외교적 수사의 필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재협상’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발산지로, 새로운 국면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그로 작동하기 시작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효과적으로 공격했는지는 의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타겟으로 글을 맺었다. “FTA를 한다고 신자유주의 라고 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도깨비 방망이처럼 들이대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라며 ‘반신자유주의’ 실천을 옹색한 것인냥 유린했다.
“EU도, 중국도, 인도도, FTA를 합니다. 이들 나라가 모두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근거를 댔고,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왜곡되고 교조화되고, 그리고 남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느낌까지 더했다.
봉하마을에서 툭툭 던지는 말과 종종 쓰는 글이 뉴스에 오르내리지 않은 적이 없지만, 이번 처럼 현실 정치를 들었다놓는 자극적인 글은 없었다. 한미FTA의 향방에 대한 휘발성 강한 글이다. 궁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번 글을 읽는 ‘반신자유주의’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목하 저항의 의제설정에 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더군다나 한미FTA인데.
굳이 들자면,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모임의 양규헌 대표, 이경수 부대표, 이종회 집행위원장은, 노동자진보정당건설전국추진위 양경규, 장혜옥, 전재환 대표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오세철 운영위원장은, 등등등은 왜 글을 안 쓰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