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이 그곳에 계셔서 고맙습니다

[칼럼] 문정현 신부님께 드리는 편지

‘길 위의 신부’님께 드립니다.

신부님, 저 래군이에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혀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답답하기만 한데,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연일 전쟁이더군요. 전쟁터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몸도 안 좋고 연로하신 신부님은 경찰에 폭행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전화상으로나 듣고 있자니 미칠 지경입니다.

신부님, 지난 주말은 끔찍했지요. 용산참사 150일인 6월 18일을 넘어 151일째였던 6월 19일에 신부님들이 폭행당했습니다. 152일째이자 다섯 달이었던 6월 20일에는 빗속에서 유가족 다섯 분 중 세 분과 전종훈 신부님이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153일째였던 6월 21일, 일요일 아침에는 이강서 신부님과 주민들이 경찰에 폭행당했습니다. 젊은 전경들에게 땅바닥에 내동이쳐지고, 옷이 찢겨져 나가고, 헤드록을 당하고, 이강서 신부님은 혁대를 잡혀 연행 직전까지 가던 사진과 동영상을 보려니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내는 일밖에 없어 더 미칠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신부님도 폭행과 욕설을 당하셨으니 미사를 드리다가 중단하고 길거리로 나가신 심정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매일 폭력에 시달리면서 현장을 지키다 보니 신부님들과 유가족들, 그곳의 범대위 대표들과 활동가와 주민들은 온몸에 멍투성이이고, 파스로 온몸을 도배를 했더군요.

이게 5개월 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원한을 품은 채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시간을 견디는 유가족과 그들과 함께 하려고 나서신 신부님들께 이 나라 정부가, 경찰이 보이는 태도입니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 더 이상 용산 남일당 참사현장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은 그런 존재들, 그래서 더 이상은 용산참사가 세상에서 논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위정자의 심보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검찰과 경찰, 국정원까지 권력에 줄 세워놓고 충성경쟁을 시키는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 제 나라 국민을 살인진압을 해서라도 대통령에게 인정받고 싶어 안달인 공권력이 살벌하게 설쳐대는 나라, 그 나라에서 이제 신부님들조차 매 맞고 끌려가는 시절이 와버린 것이지요.

신부님이 그러셨다지요. 하루라도 매 맞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사제조차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나라, 신부님들을 두들겨 패고도 잘못한 게 없다고 뻗대는 경찰이 있는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신부님은 늘 있었습니다. 지난 3월 28일, 신부님은 혼자서 현장에서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유가족들과 철거민들과 현장에서 함께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날부터 3개월 가까이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키다 보니, 이강서 신부가 합류하고, 다른 신부님들이 미사를 같이 봉헌하고, 주교님도 오시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후배 신부님들이 그리로 오셔서 단식기도회에 농성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을 성당이라 부르고, 그 주임신부 자리를 이강서 신부에게 넘기시고, 자신은 보좌신부라고 말씀하시면서 분향소를 신도들이 들고 온 꽃으로 장식해 놓았지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신도님들, 그리고 각지의 성당에서 함께 해주시는 많은 분들은 돈을 모아서, 물품들을 모아서 마음을 담아 보내주시고는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들은 이어집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어서 5개월 넘도록 이 투쟁은 지속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용산 주민이 된 신부님

신부님, 저는 용산문제로 발이 묶여 있는데, 자꾸 대추리 생각이 납니다. 평택시 팽성읍의 미군기지에 밀려난 농촌마을, 결국 4년 넘도록 투쟁했고, 촛불을 들었지만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 그리고 이 나라 정부에 의해서 마을이 파괴되고 강제 이주해야 했던 저녁노을이 너무도 아름답던 그 마을 말입니다. 신부님은 자신의 마지막 투쟁이 될 거라며 나가도 죽어서 나가겠다고 했던 대추리, 그렇지만 마지막 동네 주민들의 집단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발을 동동 구르며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정부 관료들까지 만나 사정사정을 하셨던 그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촛불을 들었던 날,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도, 복잡한 심정도 누를 길 없던 그날 밤새워 신부님 집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더니만, 결국 사람들이 하나둘 이삿짐을 싸고 갈 때 눈물로 배웅하시고는 마음의 병을 얻으셨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일어났던 일인데 많은 사람들은 역시 잊고 있나 봅니다.

그 마을의 한 가운데에 아주 주소까지 이전해서 주민이 되어버리더니 이제 용산참사 현장에서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주민들이 맞을 매를 다 맞고, 들어먹을 욕을 다 먹으면서 현장을 지키고 계신 신부님. 이번 투쟁의 마지막이 어떻게 결론날 것인지 아직은 안개 속이지만 신부님은 현장을 최후까지 지키실 분이라는 걸 저는 압니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의 과정이 있더라도 내일 또 용역과 경찰에 매 맞고 멍이 들더라도 당신의 아픔보다는 다른 철거민들의 아픔과 유가족들의 고통에 더 괴로워하실 걸 너무 잘 압니다, 대추리 그때처럼. 저도 신부님만치나 현장 체질인데, 아주 더럽게 수배의 몸으로 장례식장에 너무도 오래 갇혀 있습니다. 유가족들과 철거민들과 신부님과 맞더라도 같이 맞고, 당하더라도 같이 당해야 맘이 편한데, 인터넷 생중계로 보고, 전화로 소식을 듣고 있자니 너무도 괴롭습니다.

신부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신부님을 따라 다른 신부님들이 오시지 않았다면 글쎄요 아마도 우리는 지금보다도 더 힘든 싸움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장 크게는 고립감을 느끼면서 패배적으로 정리하고 말았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신부님의 힘, 신부님들의 힘이 용산투쟁을 고립된 투쟁이 아닌 시민들의 공감 받는 투쟁으로 만들어왔고, 그 힘에 유가족이나 용산범대위는 너무 많이 기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너무 의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일고요.

두려운 것이 많은 이 정권

신부님, 유가족이나 철거민들, 용산범대위가 요구하는 것들이 무리한 것일까요? 국민을 죽였으니 대통령이 사과하라고 하는데, 저들은 경찰과 검찰을 앞세워 탄압만 합니다. 진상규명하라고 했더니 수사기록조차 제출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무슨 큰 비밀이 있나 봅니다. 아마도 판도라의 상자처럼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던 것과는 다른 비밀, 경찰 지휘부들의 진술이거나 아니면 특공대원들이나 용역들의 진술에서, 아니면 철거용역업체 압수수색했던 자료들이나 기타 입수한 자료들에 분명 공식적인 검찰의 수사결과를 뒤집는 그런 것들이 있으니까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수사기록을 감추는 것이겠지요. 진실이 밝혀질 것이 너무도 두려우니까요.

대통령이 직접 용산 살인진압을 지시한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까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 스스로의 안전진압규칙이나 진압 매뉴얼을 무시한 채 서둘러서 진압을 하다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검찰은 서둘러서 대규모 수사본부를 만들고는 유가족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남편을, 아버지를 찾는 유가족들을 따돌리고 강제부검을 해버린 것은 아닌가요? 왜 불타버린 시신 속의 유류품들은 멀쩡하고, 망루에서 탈출했던 이들이 망루 속에서 새까맣게 타 버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는지를 아예 수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요?

이런 의문은 5개월 넘도록 유가족들이 풀지 못하는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망루농성 철거민들을 불에 태워 죽인 그 현장에서 다시 포클레인을 들이대고 철거에 열을 올리고, 그 용역깡패 놈들을 비호하는 경찰의 모습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6명이나 죽어간 이런 일을 겪고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 벌써 눈보라 휘몰아치던 그 겨울을 넘어 꽃 피고 지던 봄도 지나 여름인데도, 남일당 현장으로 청와대로, 검찰청으로 몰려다녀 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폭력뿐입니다. 이제는 신부님마저 그들의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버려지고 있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아 더 우울합니다.

멀지 않은 승리의 날에

신부님, 멀지 않았겠지요. 전직 대통령마저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세상, 노동자 박종태가 스스로 목을 매야 하는 세상, 철거민들이 다시 살기 위해 망루를 지을 궁리를 해야 하는 세상... 정말 멀지 않았겠지요. 국정을 쇄신하고, 검찰을 개혁하라고 하니깐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자는 청개구리 심보로 제 심복을 자리에 앉히고는 공안탄압을 강화하라고 주문합니다. 분명 더 큰 재앙이 이 나라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분노가 있으되 아직 용기가 부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용산참사를 잊지 않고 있겠지만, 아직은 거리로 나서서 독재 타도 투쟁을 할 만큼의 기세까지는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눈물바람으로 몰려나왔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금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언제고 다시 거리로 나오는 날, 우리는 용산참사의 문제를 넘어서 이명박 독재정권의 끝을 보고야 말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신부님이 박정희 정권 때부터 걸어오신 그 목자의 길, 길 위에서 온갖 고초를 다 당했지만, 결국 인혁당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던 신부님의 그 길을 알기에, 지금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폭력과 기만뿐일지라도 신부님과 함께 하는 이 길에서 우리는 꼭 승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용산참사는 이명박 독재가 피해갈 수 없는, 그래서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 때까지 내내 권력의 부당함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남을 테니까요.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을 유가족들과 사제들과 용산범대위에 함께 한 사람들과 지금도 마음을 모아 보내주는 많은 시민들이 있으니까요.

오늘도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4층에서 새벽 5시, 오후 5시에 유가족들은 상식을 올리고, 아침 7시에는 상필이 같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아침을 먹고 유가족들은 현장으로 가고, 그리고 매일매일 서글픈 일상이 이어집니다. 이제 이 분들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이분들이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지독한 시절을 만나 분노로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저기 시체안치실 냉동고에는 열사들의 시신이 얼음덩이로 보관되어 있는데, 이제 얼었던 시신을 녹이고 불에 타 처참하게 타내려버린 그 참혹한 시신을 닦아 염을 하고 편안하게 쉬실 곳으로 보내드려야겠지요. 그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제 유가족들의 투쟁이 아닌 우리 모두의 투쟁이 되어버린 이 투쟁, 장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계속되어야 할 이 투쟁에 저는 신부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갇혀 있는 저도 이 투쟁에 기여할 한 번의 기회를 꼭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길 위의 신부님. 언제 저도 용산 현장에 나가 꽃으로 단장된 분향소에서 열사들 앞에 향을 피우고, 레아 호프의 바뀐 모습도, 예술포차도, 그리고 주위의 벽시나 벽화 등 예술인들이 만들어놓은 예술의 거리를 거닐 수 있을까요? 꼭 투쟁을 승리하고 그곳에 가서 신부님들, 주민들과 함께 만나고 싶은데, 아마 제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겠지요. 수배자이니 이곳을 나서는 순간 저는 그곳보다는 감옥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누구보다 잘 압니다. 열사들 장례를 지내고,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신부님과 함께 용산을 거쳐 대추리 새로 조성된 평화의 마을도 가고 싶군요.

모쪼록 이 투쟁이 끝날 때까지 몸 살펴가면서 지내십시오. 저는 경찰들이 깡패 신부라고 막말해도 길 위의 서 계신 신부님이 계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더는 몸 상하시지 마시길 바라며, 이만 편지 줄입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2009년 6월 24일 박래군 올림.
덧붙이는 말

박래군 님은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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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 용산 , 철거민 , 남일당 , 용산범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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