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공포영화는 여름이면 오싹한 소름과 비명으로 TV와 극장가를 찾아온다. 요즘에야 소재도 다양해졌지만 공포영화하면 <월하의 공동묘지>부터 <전설의 고향>의 주인공, 하얀 소복을 입고 입가에 피를 흘리며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 우리에게는 익숙하고 친근하기까지 하다. 서양 사람들에게 공포영화는 흡혈귀 ‘드라큘라’가 원조일 듯싶다.
<월하의 공동묘지>하면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기본 배경으로 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월향이 주인공이었고,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에서 나오는 드라큘라는 그 소재가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군대를 물리친 루마니아 용장 드라큘라백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서양영화에서 창궐하는 좀비는 그 배경이 자못 심상찮다.
네이버를 뒤져보면, 좀비 전설의 무대는 흑인 저임금 노동력을 공급하는 서인도제도의 아이티 섬이다. 부두교 흑마술에 능한 주술사가 마약성분의 약물로 희생자를 가사 상태에 빠뜨려 의사가 사망 진단을 하게 한 다음 묘지에 묻고, 한밤중에 다시 꺼내어 악덕 농장주들에게 팔아치운다. 이렇게 만들어진 좀비는 무언가의 힘에 의해 죽은 몸인 채로 다시 태어난 인간을 통틀어 칭하게 되었고, 호러와 판타지 작품 등에 자주 등장하여 썩은 시체가 걸어 다니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그런데 드라큘라가 그러하듯 의미는 전도되어 공포영화의 좀비는 지칠 줄 모르는 노동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인간을 적대시하는 몬스터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의미가 전도되어 버린 좀비영화의 원조 격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좀비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좀비가 된 노동자
TV화면으로 바라보는 쌍용자동차 공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선무방송을 하면서 떠다니다 때로는 노동자들 머리위로 최루액을 쏟아 붓는다. 경찰은 커다란 방패를 앞세워 도장공장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압박을 한다. 그렇게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 결국은 도장공장을 둘러싸 버렸다. 이미 사측이 물과 가스는 물론 심지어 소화전마저 막았고 급기야 전기마저 끊었다. 불붙은 폐타이어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오르고, 화염병도 간간히 나오고 새총으로 쏜 볼트가 날아다닌다.
노동자들은 반찬도 없이 주먹밥으로 연명하고 있고, 경찰이 쏜 테이저 건이 얼굴을 관통해도 진료마저 막히고 있는 상황이니 이러저러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비축해 둔 물을 먹지는 못해도 씻는데 아까워할 수 없는 것은 최루액으로 온 몸에 부풀어 오른 수포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인권은 없다.
막힌 소화전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자 소방서가 나서보지만 결국은 사측에 막혔다. 물을 넣으려고 해도 의료진이 들어가 노동자들을 치료하려고 해도 결국은 사측에 막힌다. ‘사측’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방관만 하고 있는 경찰을 대신해서 ‘또 다른 노동자’ 그들이 나선다. 동료들의 정리해고로 노동 강도는 강화될지라도 ‘3년간 기본급 동결, 2년간 상여금 250% 반납, 3년 동안 일체의 복지 반납 등’을 서약하여 말이 살아남았지 숨만 쉬고 있는 해골이나 다름없는 노동자, 그들은 현대판 좀비일 뿐이다. ‘회사가 살아남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주술에 걸려 영혼은 빠져나가고 살아있는 시체들 그들이 나선 것이다.
정리해고에 맞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농성 노동자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조립라인 콘베어 벨트를 타던 동료이던 그들에게 손에 쥔 쇠파이프를 휘두르지 못하고 갈등하고 눈물 흘릴 때, 그들 좀비는 절단기와 갈고리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죽일 듯 달려든다. 그들 좀비는 정문 바리케이드를 마주한 노동자의 가족들에게, 제발 먹을 물만이라도 넣어달라고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할 의사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절규하는 농성노동자 가족들에게 침을 뱉고 거침없이 발길질을 해댄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조사에서 검찰은 불이 왜 붙었는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를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검찰의 얘기대로 화염병에 의해 불이 났는지, 아니면 망루를 해체하기 위해 썼던 그라인더와 비슷한 연장에서 튄 불똥에서 시작이 되었는지, 아니면 컨테이너 박스가 망루를 치면서 불똥이 튀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밝히지 않는 특공대의 진압무기에 의해 불이 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검찰은 단지 철거민이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났다고 우기고 있을 뿐이다.
용산에서는 약 2천 리터정도였다면 지금 노동자들이 사수하고 있는 도장공장에는 쌍용자동차 전체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20만 리터 정도의 시너와 같은 인화물질이 있다. 그런데도 용산 철거민 망루를 부수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컨테이너를 앞세우고 경찰특공대가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 경찰특공대는 왜 두려움이 없겠는가. 시너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진입했다 막상 불이 붙으면서 겁에 질려 뛰어 나왔다는, 검찰 조사과정에서 나온 특공대원의 진술은 그것을 반증한다.
만약 노동자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특공대가 진입을 한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데 두려움이 있다. 얼마나 큰 불이 날지, 얼마나 죽을지, 누가 죽을지를 가늠할 수 없다는데 그 두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경찰이 진압을 주저하는 사이 그들 좀비가 나섰다. 해산작전은 어디까지나 경찰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경찰청장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그들 좀비는 무언가에 이끌려 “4일부터 사무직과 생산직 등 4500명 전원이 출근해 대기하면서 공권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금주 안으로는 도장공장에 진입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 동료들의 정리해고로 노동 강도는 강화될지라도 ‘3년간 기본급 동결, 2년간 상여금 250% 반납, 3년 동안 일체의 복지 반납 등’을 서약하여 말이 살아남았지 숨만 쉬고 있는 해골이나 다름없는 노동자, 그들은 현대판 좀비일 뿐이다. [출처: 미디어 충청] |
또 다른 좀비, 용역
역설적이게도 공포야말로 노동자를 공포로 무장한 좀비로 만든다. 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정리해고를 포함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경험한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가 공포로 다가오는 지금 이 시절, 공황시기 공포에 떠는 노동자를 좀비로 전환시킨다.
한편 쌍용자동차에서 경찰과 사측 노동자와 함께 또 다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좀비, 그들은 바로 용역이다. 용산참사가 난 5층 옥상의 철거민을 위협하기 위해 2층에서 불을 지르고, 경찰의 뒤에 숨어서 망루를 향하여 물을 뿜어대고, 경찰보다 앞에서 막힌 계단출입문을 해체하여 망루가 있는 옥상에 진입하는 경찰을 도우는 등으로 용산 철거민 학살에 결정적이었던 이들 용역의 역할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다시 한 번 명징하게 나타났다.
초기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에 진입하기 위하여 갈고리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용역들은 뒷짐을 지고 지켜보고 있는 경찰을 대신하여 공장을 탈환하는 역할을 해왔다. 정리해고를 모면한 노동자들과 이들 용역들로만 힘에 부치자, 결국은 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경찰과 합동으로 공장탈환작전에 나선 것도 용역이다. <미디어 충청>의 보도처럼 용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찰로 위장하기도 하면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사수하기 위하여 쏘아대는 새총과 같은 새총으로 노동자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돈벌이를 위해 나선 용역이 생존을 위해 공장을 점거하여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적의를 가지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노조파괴공작에 악명이 높았던 식칼테러 전문가 울산의 ‘제임스 리’가 있었다면 요즘에는 노동쟁의가 있는 웬만한 곳이면 용역이 등장한다. 요즘과 같은 불황시기, 늘어만 가는 노동쟁의에 사측에 고용된 용역의 수요 역시 늘어만 간다. 그리고 재개발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용역은 현재 260군데 정도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서울에서는 성업 중이다.
이렇듯 늘어나는 용역의 수요를 요즘 어디서나 쉽게 마주치는 노숙인, 학비를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로 나서는 학생, 그리고 실업을 넘나드는 불안정노동자들이 메우고 있다. 현 정권 들어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고 경고를 보내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명박정권의 희생자가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동유연화정책으로 양산된 실업 및 비정규직을 포함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이 그 수요를 메우고 있음은 아이러니이다. 특히 구조적 실업이 증가하고 물가는 임금상승을 앞질렀고 소득의 재분배 또한 더욱 양극화됨에도 사회적 안전망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최근 공황시기를 맞아 언제든 용역으로 나설 예비군은 늘어만 가고 있다.
좀비의 천국 파시즘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사회
여론조작이 가능한 미디어법 개악으로, 인권단체 창립기념식장에서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파시즘시대의 초기”라던 리영희 선생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릴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더구나 지구적 수준에서의 자본의 위기 즉 공황시기를 돌파하기 위한 자본운동의 한 형태로서의 파시즘, 즉 반동적인 국가동원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을 본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된다.
20세기 말 경제공황을 돌파하기 위한 자본의 제국주의전쟁을 거치면서, 자본전쟁의 총알받이로 나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삶이 피폐해진 노동자 민중들이야말로 서구 사회주의정당이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연이은 경제공황 시기에 사회주의정당이 그들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데 실망한 룸펜프롤레타리아, 즉 일자리가 불안정한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한 파시즘체제가 구축되었던 역사는 지난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만의 대공황이라는 요즘, 파시즘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 있어 노동의 불안정성이라는 비수는 이명박정권과 노동자 중 누구를 겨냥할 것인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너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노동자를 막다른 죽음의 끝까지 몰아넣는 자본의 이 잔인무도한 본성과의 막바지 투쟁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실업자들이 구호물품을 타기위하여 길거리 줄을 서고 있는 공황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에 그들도 동참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의 위기를 자본이 책임을 지게 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따라서 인생의 기로에 서 있는 그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바로 공황시기 노동자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고자 하는 자본과의 전면전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최저임금을 비롯한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저하시키고, 비정규직의 기간제한을 폐지하고, 정리해고를 자유롭게 하려는 구조조정을 저지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따라서 파시즘의 토대가 되는 일자리의 불안정을 넘기 위하여, 최소한 노동자, 특히 불안정 노동자 그들을 좀비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좀비천국 파시즘체제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투쟁이다. 민주노조운동을 포함한 노동운동,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하여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투쟁이다. 노동자가 총파업에 그리고 우리 모두 그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둘러싸는 인간방패로 나서서라도 반드시 이겨야하는 투쟁이다.
지금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지고 있는 납량특집,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