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오 노동자 설날 이야기

[현장] 초국적 자본에 맞선 권리를 위한 쌈

날이 얄궂다. 설 명절을 앞두고 날씨가 엉망이다.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봄비라 여기기에는 이른 겨울비다. 비를 보니 괜히 서럽다. 숱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철탑 위에서 찬비를 맞은 이도 있었다. 낡은 천막 안에서도 찬비를 맞은 이도 있었다. 기계가 숨죽인 공장에서,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옥상에서도 저 서러운 비를 맞은 이도 있었다. 따뜻한 온비가 되지 못하고 차갑고 서러운 비, 오늘은 찬 겨울비를 맞으며 인적도 드문 서울 도심 빌딩 숲 안쪽에서 홀로 피켓을 들고 서러움과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이를 만나러 간다. 하필 오늘 비가 오느냐며 투정을 한다. 아니 비가 와서 잘됐는지 모르겠다. 빗물에 섞여 오늘은 서러운 눈물을 보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발레오 이야기

2010년, 2월 10일 오전 10께. 설 연휴를 사흘 앞둔 날. 충정로에 있는 프랑스대사관 앞으로 갔다. 비자를 발급 받으려는 사람들 열댓 명이 있을 뿐 고요하다.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이들은 천안에 산다. 발레오공조코리아(발레오)라는 프랑스 다국적기업이 인수한 회사다. 발레오는 한일합작으로 대한공조로 출범하여 일본, 프랑스 자본으로 옮겨 다녔다. 2005년에 발레오가 지분 100%를 소유하게 된다.

2008년 자료에 따르면, 발레오는 전 세계 27개국에 121개의 공장, 61개의 연구개발센터, 9개의 유통센터, 5만4천명의 직원을 가진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회사다. 천안에 있는 발레오는 187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고, 생산직은 146명이다. 천안공장에는 콤퓨레샤를 주로 생산하여 삼성르노, 쌍용차, GM, 닛산, 마쯔다 등 국내외의 자동차 회사에 납품한다.

연제문 이야기

발레오에 다니는 연제문 씨가 있다. 1991년 청주기계공고 3학년 까까머리 때 발레오에 입사하였다. 이곳에서 근무를 하며 국방의 의무도 마쳤고, 결혼도 했고, 두 사내아이도 낳았다. 연제문 씨가 철들고 한 모든 일은 발레오라는 회사 이름과 함께 했다. 2008년에 산업재해를 당한 연제문 씨가 1년 요양과 치료를 마치고 공장에 다시 출근했을 때 기다린 것은 작업복도 기계도 아니다. 기가 막히게도 해고 통지서였다.

회사는 직원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10월 26일 청산을 결정한다. 나흘 뒤인 10월 30일 전 직원들에게 퀵서비스를 통해 해고통지서를 보낸다. 구조조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청산을 할 회사가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직원들의 생계가 달린 일터를 공중분해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직원들은 그저 멍해질 수밖에 없다.

청산의 이유는 간단하다. 발레오는 전 세계에 숱한 공장이 있으니 공장 하나 날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껏 천안공장에서 벌어들인 돈보다 더 싼 인건비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공장 하나쯤 날리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이 오만함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자본의 악독함이 187명의 생계를 하루아침에 끝장 낸 것이다. 사회복지가 엉망인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일터를 빼앗는 것은 뻥 뚫린 고속도로고 청산된 노동자가 살 길은 첩첩산중이다. 대한민국 대통령님과 도지사님이 비싼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고 규제를 풀어 다국적 자본의 천국으로 만들며 달성한 위대한 외자유치 세일즈의 현주소다.

설 이야기

발레오에서 삶이 청산당한 노동자들은 사람의 목숨보다 먼저 숨을 끊은 공장 기계 옆에서 시한부의 숨을 헐떡이며 설을 맞이한다. 차가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 놓인 침낭에 번데기처럼 온몸을 구겨 넣고 설날 아침을 맞이한다. 자식들이 올리는 세배 대신 동료들과 구호를 외치며, 부모님께 올릴 새해인사 대신 투쟁가를 부르며 설날 아침을 맞이한다. 전기열선으로 데운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한 뒤 투쟁조끼를 입고 설날 아침을 맞이한다. 한국 실정법에 맞춰 공장을 없앴으니 그만이다, 라고 오만을 부리는 프랑스 자본에 대한 분노를 씹으며 설날 아침을 맞이한다. 내 인기만 누리면 그만인 한국 정치인들의 속 빈 강정 같은 외자유치를 선물로 받은 노동자들이 떡국 대신 그 강정을 씹으며 설날 아침을 맞이한다.

한국의 설 이야기

발레오 노동자를 만나고 돌아온 뒤로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설 연휴 고향 찾는 길이 쉽지 않다. 사실 서민들은 날씨보다는 비어가는 아니 거덜 나는 살림살이 때문에 더 걱정이다. 이번 설을 편안히 맞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눈이 오지 않더라도. 헐린 공장 앞에서 설을 맞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빼더라도, 천막도 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설을 맞는 재능교육 학습지 선생 빼고라도, 쌍용자동차 해고자 말고라도, 구조조정을 앞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 말고라도, 어느 누가 올해 설을 넉넉한 마음으로 맞이하겠는가?

하지만 이번 설날, 세배를 하고 나서는 이들을 찾아보자.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노동조합을 했다는 이유로,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외국자본의 횡포 때문에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이하는 이들을 만나러 가자.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두 시간 이내의 거리에서 반드시 만날 수 있는 숱한 이웃을, 그리고 내일 모레 내 얼굴이 될 줄 모르는 내 몸 밖의 또 다른 내 몸을 찾아 나서자.

만나서 이야기하자. 더 이상 발레오와 같은 파렴치한 초국적자본에 내 권리를 빼앗기지 말자고, 사람은 없고 돈만 아는 자본의 짐승의 발톱에 더 이상 내 권리를 할퀴지 말자고 다짐하자. 2010년 백호의 해에 맞이하는 설은 설움이 아닌 다짐으로, 권리를 위한 쌈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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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적자본 , 프랑스 , 설 , 발레오공조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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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문경락

    그렇게 숱한 분들이 차거운 바닥에서 설을 쇠셔야한다니 마음이 안좋군요....실적에만 치우쳐 뒷감당 없는 저질러진... 무책임한 결말들이 양산되는 이 풍토가 원망스럽습니다.마음이나마 따뜻한 명절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