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홍콩, 우리의 이야기

[워커스] 자본이 모인 홍콩, 분노를 깨운 청년④

[워커스 이슈] 자본이 모인 홍콩, 분노를 깨운 청년

①거리에 나선 홍콩 청년을 만나다 (링크)
②홍콩 시위, Be Water (링크)
③홍콩 경제 불평등이 키운 청년의 ‘엔드게임’ (링크)
④모두의 홍콩, 우리의 이야기

[출처: 김한주 기자]

홍콩 청년들은 왜 유니온 잭을 들었을까?

일렬로 선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포한다. 최루가스가 삽시간에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사람은 흩어지지 않았다. 한 남성은 자신만한 드럼통을 경찰을 향해 던졌다. 노동자들은 관공소에 돌을 던지고 차량을 방화했으며, 좌익 활동가들은 경찰을 타격할 목적으로 거리에 폭탄을 터트렸다. 현재의 홍콩이 아니라 홍콩 근대사에서 가장 큰 폭동으로 기록된 1967년 구룡시위의 장면들이다. 이 시위는 현재의 홍콩 시위보다 훨씬 격렬하고 규모도 컸다. 당시 사망자만 경찰 10명을 포함해 50명 이상이 나왔다. 부상을 당한 사람은 800여 명에 달했다. 구룡시위는 한 조화제조 업체의 임금 삭감과 휴직 금지가 발단이 됐다. 좌익 노동자들은 파업에 불을 붙였고 이는 결국 영국 식민정부에 대항하는 거대한 저항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현재, 홍콩의 풍경은 180도 달라졌다. 몇몇 홍콩인의 손에는 유니온 잭(영국 국기)이 들렸다. 이들은 영국에 1984년 체결된 홍콩반환협정을 존중하는지 중국에 물을 것을 호소한다. 청년들은 “트럼프 대통령, 제발 홍콩을 해방하라”라는 배너를 들기도 했다. #Chinazi(China+Nazi, 중국+나치)라는 해시태그도 돌아다닌다.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오성홍기를 불태우는 장면도 보인다. 물론 이들이 시위대의 목소리를 다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중 정서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졌고 일부는 전 식민제국 영국과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고자 한다. 유니온 잭을 드는 사람들의 수도 늘고 있다. 시위 초반에는 수백 명뿐이었지만 9월 15일 집회에는 대열이 500미터를 넘을 만큼 불어났다. 대체 중국 공산당은 왜 이러한 신세가 됐을까?

빛바랜 홍콩의 영광

홍콩은 중국에 무역항과 금융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영국은 중국에 홍콩을 반환하기 전 아시아를 향한 창구로 홍콩에 마천루를 쌓아올렸다. 반환 이후에는 관리자만 바뀌었을 뿐 더 많은 금자탑이 세워졌다. 캐나다프레이저연구소(FIC)가 9월 14일 발표한 <세계경제자유 2019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홍콩의 경제자유 지수는 조사가 시작된 1980년부터 2017년까지 줄곧 1위를 기록했다. 이 조사는 162개 국가 및 지역에 대한 시장 접근성, 사유재산 보호나 공공지출 등 경제 자유 수치를 평가해 순위를 매겼는데, 홍콩은 5위를 기록한 미국보다도 0.72점이나 높았다. 이런 홍콩의 개방성을 이용해 중국(113위)은 본토 시장을 보호하면서 세계 시장에 접근해왔다. 그러면서 부유한 본토인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홍콩의 개방성과 거대한 중국과 세계 시장을 이용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해왔다. 현재 홍콩이 세계에서 슈퍼리치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주민 7명 중 1명이 백만장자이며 약 93명의 억만장자가 사는데, 이는 인구 대비 뉴욕이나 도쿄, 파리를 능가한다.

그러나 상하이와 선전 같은 중국 도시들이 부상하면서 홍콩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기억상실의 인민공화국: 천안문 다시보기>를 쓴 루이자 림(Louisa Lim)이 지난 7월 <뉴욕타임즈>에 지적한 것처럼, 이제 홍콩은 더 이상 중국에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수출입항이라는 홍콩의 입지는 이미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약화하기 시작했다. 1997년 홍콩을 통한 중국 무역은 약 절반에 달했지만 현재는 12% 이하로 줄어들었다. 전체 부의 측면에서도 홍콩은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1997년, 홍콩의 경제 규모는 중국의 약 5분의 1이었고, 1인을 기준으로 할 경우 이는 35배가 넘었다. 하지만 2018년, 홍콩 경제 규모는 중국의 30분의 1 밑으로 곤두박질 쳤다.

금융중심지로서의 입지가 약화해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1997년 직후, 중국은 시장 중심적인 홍콩의 명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세계적인 금융중심지로서 본토 경제에 이득을 내는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 특히 홍콩은 중국 인민폐를 국제 통화로 사용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활용되면서 돈이 몰려들었다. 홍콩은 국제 투자자들이 신뢰했고, 인민폐는 본토에서보다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의 금융시장은 홍콩을 집어삼켰다. 중국의 4대 거대 은행은 그의 자산 규모에서 세계 4대 은행이 됐다. 1997년, 중국의 주식시장은 홍콩 주식시장의 절반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중국 주식시장은 8조 달러에 육박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주식시장 중 하나로 홍콩의 2배를 능가한다.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위기

그러면서 중국은 홍콩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중국은 지구적인 금융위기와 미국과의 정치적 갈등 등의 여파로 홍콩을 다른 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바로 홍콩의 경제적 자유는 보장하되, 정치 및 사회적 자유는 제한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이러한 통치 비전으로 중국식 사회주의가 서구의 자유주의 민주주의보다 선호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같은 중국 공산당의 통치 이념은 2013년 시진핑 집권을 계기로 더욱 강화했다. 시진핑은 정보와 여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해 홍콩과 본토의 인민을 감시하고 이에 저항하는 개인을 더욱 억압했다. 특히 국경과 주변 지역(홍콩, 대만, 신장위구르, 티베트) 등 이른바 분쟁지역과 국제 무대에서의 정당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통제에 무게를 뒀다. 2015년 잇따른 홍콩 서점상들의 실종 사건이나 최근 홍콩 시위를 낳은 송환법도 이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애초 중국 정부는 홍콩이 반환된 1997년부터 홍콩 대자본 및 중산계급과 동맹을 구축하면서 홍콩을 지배했다. 금융과 산업 자본의 자유나 부동산 등 홍콩 자산 가치를 증대하면서 자본이나 중산계급의 기득권을 보장했다. 그러면서 임금노동자나 청년 세대의 경제적 권리는 더욱 악화했다. 결국 홍콩의 경제 불평등이 심화하는 한편, 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통제가 늘어나면서 정체성의 위기와 중국 본토를 향한 반발심이 고조됐다.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송환법 문제가 불씨를 당긴 것이다.

홍콩, 동시대 저항의 최전선

이러한 중국 정부에 도전하는 홍콩 청년들은 동시대 저항의 최전선에 서 있다. 동시에 이들은 가능성만큼 모순도 중첩된 실험을 밀어붙이며 새로운 계급운동의 지평을 열고 있다.

우선, 홍콩 청년들은 조직된 노조나 정치단체가 아님에도 전략적으로 경제 거점을 타격하는 계급적 산업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초기 거리시위와 입법회 점거에서 나아가 연이은 총파업과 비협조운동을 비롯해 공항과 금융, 지하철과 쇼핑몰 등 주요 경제 거점을 차례로 타격했다. 실제로 이 청년들의 시위는 중국뿐 아니라 소위 아시아 금융허브를 오가는 국제금융자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홍콩 주식시장에서는 6월초 시위가 시작된 이후 8월 중순까지 5천억 달러가 날아갔으며 벤치마크 지수는 7개월 만에 최저로 떨어졌다. 이를 두고 크리스 찬 홍콩중문대 사회학과 부교수는 지난 6월 <자코뱅>이 주최한 집담회에서 “우산운동부터 송환법 반대 시위까지, 사람들은 자본주의 생산을 방해하기 위해 점점 더 전투적인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 두 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정치적 투쟁에 파업과 노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2014년 우산운동 기간에는 일부 학생 지도자들이 노조에 파업을 호소했지만, 송환법 반대 시위에선 노동자 수천이 그들 노조에 파업을 조직하자고 촉구했다.

소위 지도자 없는, 조직되지 않은 시위대가 100일 이상 응집해 발전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누구나 임시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급진적인 행동을 제안할 수 있다. 시위를 주도하는 핵심 그룹, 즉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실업 청년과 다양한 활동가들도 좌파와 우파 모두를 포괄한다. 이데올로기적 합의보다 행동을 우선시하는 입장은 이 시위가 극단적인 이질성을 극복하는 열쇠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 홍콩 시위대의 상당수는 조직을 불필요하거나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정치조직이나 노동단체에 대한 회의감이 깊기 때문이다. 또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협력이 훨씬 쉬워지면서 엄격한 조직의 필요성은 약화했다. 홍콩 좌파 활동가 아우룽위(Au Loong Yu)는 “오랜 시간 활동해온 조직 활동가의 노력은 종종 무시될 뿐 아니라 노동자의 심각한 상황에 대한 무관심도 종종 접할 수 있다”며 “많은 사람들은 이제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나서자고 호소하지만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노동자를 일종의 즉석요리로 취급하는 문제도 있다”고 한다.

새로운 운동 조직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를테면, 보다 급진적인 좌파 조직 중 하나는 학생노동행동연합인데, 이 단체는 학생과 노동운동과의 연계를 추구하고 직접행동을 조직하고 있다. 한편, 홍콩 시위가 미국민주주의진흥재단(NED) 등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음모론도 상당하지만 실제 지원을 받고 있는 조직이 있더라도 이들은 소수이며 이번 시위에도 발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홍콩 시위, 모두의 문제

홍콩의 정치는 시위의 여파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우선 전통적인 야당인 소위 범민주진영은 이미 2014년 우산 운동 때부터 주변화 돼 있었는데, 그들의 신뢰도는 이번 시위에서 다시 추락했다. 또 지난 2014년 우산운동의 젊은 지도자조차도 현재 운동에서 주요한 인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주요 정치 담론은 독립파와 자치파로 나뉘어져 있다. 독립파는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데, 우파 또는 홍콩 지역주의를 대표하며 중국인에 대한 차별과 외국인 혐오주의를 선동한다. 또 사회적 약자의 노동권과 사회보장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자치파는 홍콩의 민주적인 자기 결정권을 중시하지만 독립파와는 다르게 반중국 정서에는 거리를 둔다.

홍콩 시위가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활동가들은 소수다. 또 이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반중국 정서로 인해 더욱 소외돼 있다. 그러나 홍콩 지역활동가인 람치룽(Lam Chi Leung)에 따르면, 2005년 WTO 반대 시위와 2007년 건설 노동자 파업, 2013년 노동자 파업 이후 더 많은 운동가들이 신자유주의에 도전하기 위한 계급 정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좌파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좌파 사회주의와 우파 지역주의, 민족주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무엇이 좌파 정치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논의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는 중국 시민사회와 사회운동과의 더 많은 협력을 통해서만 홍콩 대중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014년 홍콩 우산운동 마지막 날 청년들은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그리고 이들은 더 큰 시위로 그 약속을 지켰다. 이번 홍콩 시위 역시 또 다른 교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현실은 비단 홍콩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지구적 위기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모두에게 동일한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홍콩 시위는 이미 세계 변혁운동의 중요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워커스 59호]

[참고자료]
https://www.scmp.com/news/hong-kong/hong-kong-economy/article/3027016/hong-kong-keeps-top-spot-worlds-freest-economy
https://www.nytimes.com/2019/07/03/opinion/hong-kong-protest.html
https://www.nytimes.com/2019/09/16/world/asia/hong-kong-1967-riots.html
https://www.jacobinmag.com/2019/06/hong-kong-extradition-bill-protest-movement
https://www.jacobinmag.com/2019/09/hong-kong-protests-extradition-b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