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데모도 못 했다

[특별기획: 검은 땅을 먹고 살았다] 여성 광부 이야기① 선탄부, 광업소 세탁일 하며 사 남매 키운 이칠기(74) 씨

[특별기획1] 까막동네: 쇠락한 탄광촌 마을 사람들

1) “35년간 탄가루를 마셨고, 폐암에 걸렸습니다”
2) 탄가루가 내려앉은 퇴직 광부들의 마을, 까막동네
3) 여성 광부①: 가난해서 데모도 못 했다
4) 여성 광부②: 선탄 작업 도중 산재사고…다리를 잃어도 삶은 계속 된다
5) 여성 광부③: 광부는 두 하늘, 여성 광부는 세 하늘을 덮고 살았다
6) 탄광 노동자 죽음과 산재로 쌓아올린 석탄 산업
7) 탈석탄 전환 사회’, 폐광촌 주민 목소리는 없다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산 날이 20년이 안 돼요. 남편이 탄광에 다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그만두더니 어느 날 죽고 말았거든요. 그때 제 나이 서른쯤이에요. 가족도, 친척도 없는 남자여서 다시 피붙이가 있는 제 고향으로 가기로 했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다시 도계에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일거리를 찾아 도계에 정착했고 어머니를 만나 여기서 저를 낳았어요. 저 역시 결혼하기 전부터 광업소에서 선탄부로 일했고요.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단칸방에 세 들어 살기 시작했어요. 우리 형제 중엔 아들이 없어서 제가 부모님과 살게 됐어요. 제가 사 남매를 낳았는데 아이들은 친정어머니한테 맡기고 광업소 하청 일자리를 구해서 다녔어요. 당시 여자들 일이란 게 석탄을 옮기거나, 탄가루를 주워서 나르거나, 석탄에 섞인 이물질을 고르는 일이에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선탄부라고 불렀습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석탄을 나르면 거기 서서 돌을 골라요. 석탄을 나르려고 삽질도 많이 하고요. 석탄 가루가 많이 날리는데 마스크는 어쩌다 한 번씩 나왔어요. 오래 쓰다 보면 삭아서 벗어두고 일하기도 했고요.

석탄공사 원청은 마스크가 잘 나온다고 했는데 하청은 마스크 잘 안 줬어요. 빽 있는 사람이나 석탄공사 들어가서 일할 수 있지, 나머지들은 하청을 전전하며 일해야 했어요. 그것도 한두 달 다니다 ‘나가세요’ 하면 나가야 했고요. 그러다 보니 아프다 하면 나오지 말라고 할까 봐 아프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일만 했죠.

그때 몸 안 사리고 일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나하고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드물어요. 일할 때도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요. 돌 떨어져 죽고, 천장이 무너져 죽고, 많이 다치기도 하고요. 탄광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장례 치르고, 보상받고 하는 게 흔한 일이었어요. 남은 가족들은 이 지역을 떠나기도 하고, 부인이 다시 광산으로 들어와 일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사고가 자주 나면 무서워야 당연한 건데, 무서우면 일을 못 하잖아요. 그런가 보다 해야 해요.


나는 지난해 진폐 13급 판정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진폐 연금이 한 달 120만 원~130만 원 나와요. 이게 어떤 병이냐면,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기침이 나요. 한 달에 한 번씩 동해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는데 이 약을 안 먹으면 기침이 계속 나와요. 가래가 차는데 이게 목에 붙어서 나오지도 않아요. 사람들이 어디 놀러 간다고 해도 따라가질 못해요. 허리도 아프고 숨도 차고 관절도 안 좋아서 그냥 집에만 있어요. 그런데 집에만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탄가루가 오죽 날리면 이 동네 이름이 까막마을이겠어요. 집에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먼지가 목에 가득 들어찹니다.

애 키우면서 선탄부 하던 그 시절이 어땠는지 물어보면 나는 배고팠던 기억이 가장 생생해요. 정말 가난했거든요. 방세를 못 내서 욕도 얻어먹고요. 애들은 계속 배고프다고 칭얼댔어요. 애들 밥을 덜고 겨우 남은 밥이랑 나물을 조금 무쳐서 도시락으로 싸서 다녔어요. 그런 밥을 먹고 기운이 날 리가 있어요? 나중엔 볶은 소금을 가져와 한 숟가락씩 먹고, 물 한 번 마시고 버텼어요.

하루는 집으로 오는 데 빵 한 조각이 너무 사 먹고 싶더라고요. 근데 막상 먹으려고 하니까 애들이 걸리고, 애 봐주는 우리 어머니가 걸려서 먹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그 빵을 사 먹을 바에야 국수를 사서 먹으면 더 배부르지 않을까 싶고. 광업소에서 집까지 걸어오면 1시간씩 걸리는데 그 길을 죽어라 걸어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네요.

3교대 업무라 깜깜한 밤길에도 집을 나서야 했는데 애들 생각하면 무섭지도 않더라고요. 죽는 것도 안 무섭고, 귀신도 안 무섭고, 가난이 제일 무서워요. 옛날에 내가 데모를 못 한 것도 가난해서 그랬어요. 노조 사람들 모이는 그런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 나가면 돈을 걷더라고요. 사람들이 만 원을 내면 나도 만 원을 내야 하잖아요. 그럴 돈이 없었어요. 그다음부터 데모하는 곳에도 절대 안 나갔어요.


예쁜 옷 한 번 못 사 입어 봤어요. 그냥 일만 했죠. 선탄부 일하면서 격주로 일요일에 쉬고 한 달 만근을 채워 일했어요. 요새 사람들은 그렇게 일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할 거예요. 여자들도 탄가루 뒤집어쓰면서 3교대로 일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탄광 선탄부로 일한 세월이 40년입니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하청이라 급여가 적고, 여자라고 또 적게 쳐주니 놀지도 않고, 헤프지도 않았는데 항상 쪼들렸어요. 막내가 이 집을 사주기 전까지는 셋방살이만 했죠. 남의 집 전전하면서 서러운 일도 많았는데 우리 집이 생겼네요. 먼지 날리고, 가스보일러 없이 연탄 때는 집이어도 이 집에서 계속 살 거예요. 어차피 이사할 형편도 안 되고요.

광업소 하청 선탄부로 일하다가 나중엔 빨래해 주는 일을 했어요. 세탁소 하청 일을 한 거죠. 옷을 빨다 보면 피 묻은 옷들도 봐요. 갱내에서 사고 나면 한 번에 막 5명씩도 죽잖아요. 사고가 자주 났다고요. 그 사고들이 옷에 피로 다 남아요. 그걸 보면서 섬뜩했죠. 이게 개죽음인가 싶고. 그래도 사는 게 급해서, 우리 애들 살리는 게 급해서 무서운 것도 모르고 살았어요. 세탁일 말고도 식모도 나가고, 장사도 해보고 돈 되는 일은 다 했죠.

궂은일을 많이 해서 나도 같이 궂어졌어요. 사람들이 저보고 욕쟁이 할매라고 하더라고요. 사람 경계를 참 많이 했어요. 특히 남자들은 쳐다도 안 봤어요. 회식 때도 내 먹을 것만 먹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늘그막에 누가 남자 하나 구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화를 냈어요. 내가 젊을 때 고생해서 이제 연금 타 먹고 살고 있는데 남자한테 뺏길 일 있냐고 성을 냈죠. 다만 얼마라도 나오는 거 내가 쓰고 싶어요. 돈이 생기면 오롯이 아이들하고 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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