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여성과 소수자,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 있나요?

[이슈3]

차례

① 미국의 점령은 탈레반 못지않게 나빴다
② 아프간의 여성과 소수자,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 있나요?
③ “아프간 여성들은 더 이상 족쇄에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④ 아프간 국가인권위원회를 지키기 위한 한국의 역할



2017년,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WhereIsMyName? (내 이름은 어디에 있나요?)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지어 죽은 후 묘비명에조차 자신의 이름을 공적 장소에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생증명서에는 아버지의 이름만 기록되고, 병원이나 약국에 가도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없었다. 결혼할 때도 청첩장에는 남성의 이름만 표시됐다. 여성은 한 남성의 아내나 딸,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이모’ 같은 호칭으로만 불릴 수 있었다. 여성의 몸과 얼굴, 이름은 남성의 소유로 간주했다. 가족 구성원이 아닌 ‘낯선 남자에게’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수치와 모욕으로 여겨졌다. 많은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불리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겪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이 용기를 내 이 캠페인에 동참했다. 그 결과 캠페인 3년만인 2020년 9월, 인구등록법 개정과 함께 여성도 신분증과 출생증명서에 이름을 등록할 수 있게 됐다.

한편으로 이 캠페인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탈레반을 대신해 들어선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와 2014년 정권을 이양받은 아슈라프 가니 정부에서도 여성 인권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은 탈레반의 심각한 인권 침해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대다수 여성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점령 후 미국은 또 다른 부패한 근본주의자들을 꼭두각시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카불을 비롯한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폭력과 약탈이 이어졌다. 수많은 여성이 성폭력·가정폭력·납치·명예살인을 겪었으며, 여성의 자살률은 해마다 높아졌다.

2012년 카르자이 대통령은 “여성은 남성 보호자 없이 여행해서는 안 되며 학교, 시장, 사무실 등의 장소에서 낯선 남성과 어울리지 않아야 한다”라는 울라마 회의(이슬람 율법 해석의 권한을 지닌 성직자들의 회의)가 정한 강령을 승인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해방을 조금씩이나마 열어 온 것은 고문과 죽음의 위험을 불사하고 여학생들을 위해 몰래 학교를 열고, 시위에 나섰던 여성들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존재하기 위한 투쟁

여성이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기 위해 싸웠다면, 성소수자들은 존재 자체를 위해 싸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곧 죽음, 그것도 매우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는 투석을 당하거나 큰 벽에 깔리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공개 처형을 당했다. 탈레반의 패퇴 후에는 사형 대신 장기 징역형이 적용됐다. 성소수자를 죽인 가족 구성원은 ‘명예살인’이라는 이름으로 감형을 받았다. 성소수자는 언제든 죽음에 대한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탈레반은 전쟁 이후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보란 듯이 더 강하게 성소수자를 처형했다. 온라인에서는 성소수자를 색출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라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고 약속 장소에 나간 성소수자가 탈레반에 강간과 구타를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온라인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표적이 돼 살해 협박을 받았다.

한쪽에선 전쟁으로 부모를 잃거나 극심한 빈곤에 처한 남자 아동·청소년들이 ‘바차 바지 Bacha Bazi’가 됐다. 군인과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어린 남자아이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바차 바지로 이용했다. 탈레반은 이들을 상대 진영에 침투시켜 전쟁의 도구로 삼았다. 바차 바지는 동성애와 상관없는 권력자들의 유흥 도구이자, 권력을 쥔 이들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바차 바지가 됐던 남성 청소년들은 자신의 피해를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경험과 피해를 드러내는 순간 ‘동성 성관계’로 처형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점령 기간 미국은 반 탈레반을 명분으로 미국에 협력하는 지역의 권력자와 군벌의 바차 바지 관행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무엇으로 존재와 이름을 찾을 수 있을까

여성과 성소수자의 해방을 명분으로 삼았던 미국의 보복 전쟁에서, 여성과 아동·청소년, 성소수자, 가난한 이들은 몇 배 더 큰 고통을 받았다. 폭격과 학살, 약탈로 인한 고통은 물론이고, 패권과 이익을 위해 극단으로 달려가는 군벌과 지역의 권력자, 탈레반, 외국 점령군 사이에서 이들은 자신과 공동체를 챙기며 살아남아야 했다.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해방은 없었다. 지난 역사에서 조금이라도 변화와 진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작은 돌파구를 찾아 끊임없이 투쟁하고 생존했던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위협에 저항하고 길을 내온 이들 또한 이슬람 신앙을 가진 여성과 성소수자, 저항의 공동체들이었다.

그 시간 동안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무엇을 했는가. 아프가니스탄 패권을 둘러싼 국내외의 정치적 아귀다툼 속에서 무슬림 집단을 악마화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수자의 인권을 명분으로 이용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전쟁을 정당화한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다시 한번 빼앗겼다.

한국 역시 그 책임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서 주인공 아미르는 어린 시절 형제처럼 자란 친구가 폭력을 겪는 모습을 보고 도망친 뒤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이후 탈레반에 바차 바지로 잡혀있던 친구의 아들 소랍을 목숨을 걸고 구해낸다. 그러나 결국 죽을 위기에 처한 아미르를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한 건 소랍의 용기였다.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억압받는 이들의 이름을 빼앗아 또 다른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와 생존의 길에 선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저항할 힘을 만들어 내는 일이, 이 폭력의 세계에 연루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