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거권 운동과 실험들

[특집호] 철거민 투쟁과 새로운 주거 실험, 그리고 스쾃운동


[출처: 홍진훤]

1989년 11월 17일, 도시빈민들이 고려대학교에 모여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했다. 철거민과 노점상 등 도시빈민들은 이날 결성식에서 고립 · 분산돼 온 도시빈민 운동을 하나로 모아 생존권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당시 도시빈민은 서울 인구의 30%, 전국적으로 약 4백만 명에 이르렀다. 결성식에 모인 이들은 ‘도시빈민이 노동자·농민과 더불어 변혁운동의 3대 세력 중 하나’라고 선포했다.1 전국빈민연합의 결성은 1971년 광주대단지 철거민 투쟁을 시작으로 1980년대 목동, 사당동, 상계동, 신당동 등에서 이어진 도시빈민 투쟁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군사정권에서의 철거민 투쟁, ‘공공임대주택’이라는 성과

과거 군사정권과 김영삼 정권은 재벌 대기업의 부동산 투기를 강력하게 규제한 정권으로 꼽힌다. 이들은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도록 하거나, 재벌 ·자산가 · 고위공직자 등의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부동산 실명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당시 재벌에 대한 규제가 도시빈민과 서민의 주거 환경 개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들 정권이 추진한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으로 재벌은 엄청난 특혜를 누렸고,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 철거민 등의 도시빈민이 됐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파트 건설과 매매의 전 과정을 건설회사에 양도하는 ‘합동재개발’ 방식을 도입해, 폭력성을 은폐하고 가옥주와 세입자의 갈등을 부추겼다.2 80년대 말에는 서울 외곽과 경기도 지역에서 대규모 택지 개발 사업이 시작돼 많은 철거민이 양산됐다. 그 과정에서 목동 재개발 철거지역 주민들은 1984년 양화대교 점거 농성을 비롯해 100회 이상의 농성과 시위 등을 전개했다.3

이 밖에도 1985년 사당동 판자촌 철거민 투쟁, 같은 해 상계동과 신당동 투쟁, 1988년 돈암동 투쟁과 1989년 신정동 투쟁, 1992년 봉천동 투쟁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많은 성과를 남겼다. 목동 투쟁을 계기로 철거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 아파트 입주권 부여와 임대아파트 보장 등의 성과도 남겼다. 돈암동 투쟁 역시 영구임대주택 건설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상계동 투쟁은 ‘빈민생존권 부정하는 재개발 철폐’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세입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사회단체와 학생 등의 연대단체가 결합해 ‘도시 재개발 사업 전면 철폐’ 등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며 보다 진일보한 투쟁을 전개했다.4

80년대 철거민 투쟁은 ‘영구임대주택’ 건설과 철거민에 대한 법적 보장 명문화 등의 성과를 남겼다. 그런데도 이 같은 성과가 보편적인 주거 권리 보장이나 주택 · 토지의 공공성 강화 운동으로까지 확산하지는 못했다. 소득과 자산이 부동산에 집중되고, IMF 금융위기 이후 주택시장이 금융화되며 토지의 공공성에 대한 목소리가 설 자리를 잃어갔기 때문이다. 정부와 언론이 철거민 등 도시빈민의 투쟁을 ‘보상비 싸움’으로 왜곡하고 고립시킨 탓도 컸다. 최인기 빈민운동가는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땜빵식 정책이 오락가락했고, 경제개발과 성장이 압축적이고 급진적으로 일어나면서 주거권 운동은 후순위로 밀려났다”라고 설명했다.

주거 사각지대의 끝, 여성 노동자

공단에서 일하는 저소득층 여성 노동자들도 강제 퇴거에 내몰려 왔다. 1980년대 산업화 기간, 정부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공단 지역에 복지 아파트를 건립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를 위한 최소한의 주거 대책이었다. 정부는 서울 구로공단과 부천, 인천, 춘천, 대구, 부산 등 전국 6개 공단에 총 820가구를 공급했고, 약 1800여 명의 여성 노동자가 입주했다.

하지만 이곳은 ‘여성 아파트’라는 이유로 여러 통제와 사생활 침해가 이뤄졌다. 서울 구로 복지아파트에서는 무려 2000년대까지 입주자들이 밤늦게 병원에 갈 수도, 아파트 단지 안 공중전화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아파트가 노후화돼 누수나 균열 등이 발생해도 수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폭우가 내리는 날 천정이 벌어지고 집에 물이 쏟아져 여성 노동자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5

2011년에는 기획재정부와 아파트 운영 주체인 근로복지공단이 적자를 이유로 구로 직장여성아파트의 매각을 추진했다.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계약 기간을 2년(최대 4년)으로 제한하고, 계약만료자들에게 명도집행을 실시해 강제 퇴거를 시도했다. 2016년에는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 LH공사, 근로복지공단이 전국 6개 지역의 직장여성아파트를 철거하고 행복주택으로 재건축한다는 MOU를 체결했다. 직장여성아파트 자리에 들어선 행복주택은 애초 취지를 살려 일부 세대의 입주 자격을 여성으로 한정했지만, 곧 성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진정을 접수한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성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지난 11월에는 성남에 위치한 여성 노동자 전용 임대아파트가 성차별이라는 국민청원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회주택 비율이 30%가 넘는 네덜란드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노동조합 등이 사회주택 운동을 벌였고, 지난해 미국에서는 2만여 명의 세입자들이 ‘임대료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1990년에야 공공임대주택이 도입된 한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사회주택을 경험할 기회도, 주거의 대안으로 생각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6 한편에선 노동조합의 투쟁이 저임금 등의 노사관계에 집중돼 있다가, 이후 실질 임금이 상승하며 개별적 주택 구매를 통해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전장호 사회변혁노동자당(변혁당) 서울시당 대표는 “87년 이후 노동운동이 공장 중심의 운동으로 발전하다 보니 노사관계와 임금 등으로 한정돼 생활이나 정치의 문제로 전환할 기회를 놓친 부분이 있었다”라며 “한국은 유럽과 달리 노동운동이나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긴박한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대, 빈집과 공유지 점거 운동

2000년대 들어서는 새로운 주거 공동체를 위한 실험들이 나타났다. 2008년 해방촌에 문을 연 빈집은 손님과 주인의 경계가 없는 새로운 주거 실험 공동체였다. ‘빈집’의 장기투숙객이자 현재 공동체은행 빈고의 지음 활동가는 “빈집은 자본과 국가, 가족 어디에도 의존할 수 없고 의존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동등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던 과정에서 고안된 설정”이라며 “가족이나 공동체처럼 폐쇄되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성을 강조했다”라고 설명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빈집은 낯선 사람 그 누구라도 와서 머물 수 있고, 또 떠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처음 세 명으로 시작해 2011년에는 30여 명의 장기투숙객이 거주했으며 수많은 단기투숙객이 이곳을 거쳐 갔다. 이들은 정해진 분담금을 냈고, 마을회의와 집회의 등을 통해 역할을 정하고 생활 가이드를 구축해나갔다.7 지음 활동가는 “빈집은 주거권을 요구한 운동은 아니다. 우리의 능력을 통해 함께 주거 공간을 만들고, 낯선 타인과도 동등한 주거권을 공유하자는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라며 “적어도 빈집에서는 돈이 없어 살지 못하거나, 차별을 받거나, 더 적은 권리를 갖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밝혔다.

13년간 운영돼 오던 ‘빈집’은 올해 초 문을 닫았다. 빈집을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노력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부동산 가격 상승 또한 하나의 원인이 됐다. 사회적주택, 셰어하우스 등 주거 형태의 선택지가 다양해진 이유도 있었다. 빈집은 문을 닫았지만, 공동의 경제 질서를 위해 만든 ‘공동체은행 빈고’는 여전히 남아 각자가 가진 화폐를 공유지로 만드는 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다. 지음 활동가는 “빈집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주거 공동체들은 여전히 유지되며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빈고는 우리 모두의 집, 혹은 누군가의 공유지를 위해 같이 돈을 모으는 것”이라며 “이런 삶을 같이 살 사람들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 빈고가 생각하는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시빈민과 문화예술인 등이 공유지 등을 점거하는 일명 ‘스쾃(Squat)’ 운동의 흐름도 있었다. 2004년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을 점거했고, 이듬해에는 홈리스들의 종로 삼일아파트 점거 운동도 이어졌다. 2016년에는 시민과 예술인, 빈민 등이 경의선 공유지를 점거하고 커먼즈(commons) 실험을 펼쳤다. 이후 정부가 36억3525만 원의 소송을 제기하면서 2020년 4월 점거를 중단했다.

이처럼 주택 · 토지의 ‘소유’를 ‘공유’의 개념으로 전환하려는 운동이 이어졌지만,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주택과 토지의 ‘사적 소유’라는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기 어려웠던 측면이 크다. 김상철 경의선 공유지 시민행동 정책팀장은 “사유재산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가 민중운동에서도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어, 정주 또는 거주의 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 안정적인 자산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분들이 있었다”라며 “이는 개인의 사적 욕망이 커서라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모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인기 빈민활동가 역시 “현재는 토지공개념에 대한 문구 자체도 사라진 상황”이라며 “우선 주택과 토지의 소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각주>
1. 〈한겨레〉, ‘격동의 80년대 변혁운동 6. 도시빈민 생존권 요구’, 1989. 12. 8
2. 〈참세상〉, ‘전두환 정권과 도시빈민운동’, 최인기, 2010. 4. 22
3. 《가난의 시대》, 최인기, 동녘, 2012.3.7
4. 《가난의 시대》, 최인기, 동녘, 2012.3.7
5. 〈참세상〉, ‘여성노동자 주거인권의 사각지대-서울 구로 복지아파트’, 2001.7.15
6. 서울시 공공주택 박람회 자료집 ‘공단지역 노동자들의 주거현실을 통해 본 공공주택 공급 확대의 필요성’, 장진범, 2015.10.27
7. 주거실험 공동체 ‘빈집’에 대한 연구, 강내영, 20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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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택 비율이 30%가 넘는 네덜란드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노동조합 등이 사회주택 운동을 벌였고, 지난해 미국에서는 2만여 명의 세입자들이 ‘임대료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1990년에야 공공임대주택이 도입된 한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사회주택을 경험할 기회도, 주거의 대안으로 생각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6 한편에선 노동조합의 투쟁이 저임금 등의 노사관계에 집중돼 있다가, 이후 실질 임금이 상승하며 개별적 주택 구매를 통해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전장호 사회변혁노동자당(변혁당) 서울시당 대표는 “87년 이후 노동운동이 공장 중심의 운동으로 발전하다 보니 노사관계와 임금 등으로 한정돼 생활이나 정치의 문제로 전환할 기회를 놓친 부분이 있었다”라며 “한국은 유럽과 달리 노동운동이나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긴박한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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