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자주적으로 권력을 만든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조합원의 생존권과 생활권을 지켜내고, 착취와 억압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고 단결하고 투쟁한다. 경제적 이해를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노동법률과 제도, 사회 구조적 문제를 바꿔내는 실천을 한다. 자본과 정권의 개량적 조처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모으고, 민주주의 운영원리를 실현하고, 민중과 연대하면서 노동운동을 펼친다. 아래로부터의 단결과 투쟁에 기초한 노동조합운동의 힘, 그것은 단연코 권력이며, 따라서 권력은 모든 노동자의 소중하고 절박한 소망이다.
자본은 이러한 노조의 사회적, 정치적 관심과 실천을 단 한 번도 고운 눈초리로 바라본 적 없다. 단사 노무관리에서부터 법제도와 공권력을 등에 업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왔다. 때로는 회유와 포섭을, 때로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노동자의 모든 실천을 적대시했다. 노동자가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발언은 틀어막고, 총파업투쟁은 진압으로 일관했다.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해치기 위해 전방위적 교란과 선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시기 노동조합운동은 자본의 공세로부터 자주성과 변혁성을 견지하며 안으로 노동자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를 지켜왔고, 밖으로 곧 한국 사회 민주주의 발전의 거름이 되었다. 유무형의 착취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만들고 사수해온 것이 노동조합이고, 그 끈질긴 과정이 노동조합운동이며, 어느덧 당당한 사회적 발언권을 갖게 된 것이 민주노총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이, 민주노총이 더 많은 힘,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편부당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마땅하고, 정당하고,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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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지난 26일 기아자동차 노조 간부 인사 청탁 비리와 관련해서 '대국민사과'를 하였다. 자본과 대부분 언론들은 '10년 만에 생긴 좋은 일'이라며 툭툭 치고 지나간다. 머리 스다듬는 시늉 마냥 훈계하기도 하고,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며 성을 내기도 한다.
대국민 사과는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노동운동 간부", "노조 간부들에게는 더 엄격한 도덕률이 요구된다", "진상조사를 통해 엄격한 징계 조치로 도덕성을 회복하겠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더 건강하고 높은 도덕성을 가진 집단으로 거듭날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비정규개악안을 강행 처리한다면 단호한 투쟁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총의 사과문은 한마디로 인사청탁 금품수수 비리 사태의 진단과 해결에 대한 진정성을 담지 못했다. 사과문은 상투적이고 외교적인 것 이상의 내용이 없었다. 민주노총이 사과할 내용은 노조 간부의 인사청탁 금품수수 비리 자체로 족하다. 그 점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노조 간부의 '땅에 떨어진 도덕' 문제가 사태 배경과 원인의 핵심인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은 간부 비리 사과와 함께 노동조합의 간부조차 인사청탁 금품수수 비리에 포섭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 구조와 똑바로 싸우고 있지 못한 노동조합운동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 반성하는 언급을 해야 했다.
노동자는, 노조 간부는 하느님 나라에 간택된 선민이 아니다. 지옥구덩이 같은 고된 현실에서 투쟁과 저항으로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도덕은 가진 사람들, 부자들, 지배자들, 여유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지, 없는 사람들, 빈자들. 피지배자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하기 위해 한 끼 밥부터 챙기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니다. 빵을 훔쳤다 하여 죄를 묻더라도 배고픔과 굶주림의 정상 참작이나 그 배경 맥락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듯, 징계와 도덕 재무장을 사과의 핵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심각하게 돌아볼 일이다.
현재 검찰이 확보한 정·관계 인사가 포함된 추천인 리스트에는 단체장과 국회의원뿐 아니라 광주시 간부, 시의원들도 다수 포함돼 있으며, 특히 광주시와 시의회 관계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금품수수를 한 민주노조의 간부가 예외는 아니지만, 정작 도덕과 바른생활 책이 필요한 사람들은 도덕 이야기를 한 마디도 안 한다.
민주노총이 사과할 대상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대국민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이어야 한다. 우선 실업과 불안정노동에 처해 있는 민중을 향해야 한다. 수천만 원의 돈도 없고, 정치인이나 지역 유지, 심지어 노조와의 빽마저 없어 몸뚱이만 믿고 입사원서를 낸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적시하며 사과해야 한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과 좌절과 분노를 헤아리고, 비리 간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공세와 싸우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반성의 언급이 없다는 점도 아쉽다. 당장 불법 파견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와 곳곳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서 힘겹게 싸우는 민중을 향해, 자본의 관행을 폭로하고 응징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운동 전반에 널려있는 실리주의적 행태를 반성한다는 이야기를 담아야 했다. 자본과 정권의 노무관리, 노동정책에 맞서 현장의 모든 일상에서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까지 이제 민주노조운동이 협상과 타협과 실리 중심이 아니라 자주성과 변혁성을 견지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넣어야 했다.
이 참에 물을 만난 듯 민주노조운동의 권력을 비난하는 일이 많아졌다. 절대권력은 절대 망한다는 잣대를 갖다대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습다. 노동조합운동은 아직 힘이 없으며, 권력이라 하기에는 볼품없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싸울 최소한의 저항력마저 잃어가고 있다. 공세에 맞서 뭐라도 좀 할라치면 내부교란, 이데올로기 공세, 공권력 투입 등을 통해 즉각 진압해버린다. 공세에 맞선 투쟁에서 좀 버텨내기도 하고, 역공세도 취하고, 자본과 정권이 위협도 좀 느끼고 그럴 때 '아, 노동자가 이제 권력이 좀 있구나'라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노조가 기업 경영 일부에 겨우 한 발 들여놓은 것을 두고 절대권력이 어쩌네 하는데 정말 낯 간지럽지 않는가. 더군다나 지금 노조의 기업 경영 참가의 수준이란 게 자본이 노조의 저항을 순치하기 위해 열어놓은 노무관리 영역을 벗어난 게 있기나 한가.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권력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약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더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 다만 노조 간부 일부가 행사하는 상층의 권력이 아니라 현장에서 아래로부터의 단결에 기초한, 조합원 민주주의에 기초한 권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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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는 인사, 투자, 합병, 고용 등 기업 경영 전반에 지금보다 더 많이 개입하고 더 많이 발언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노조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사청탁 금품수수와 같은 비리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따라서 기업경영 참가의 모든 사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전 조합원에게 투명하게 보고하고 승낙받아 집행함으로써 이런 비리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정규직 비정규직 양극화 논리, 대기업노조와 정규직 책임 논리, 강성노동운동 비난 논리 등 노동조합운동을 괴롭히는 논리와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자본과 정권은 마치 호기를 잡았다는 듯이 민주노조운동 죽이기 공세를 펼치고 있다. 비정규법안 통과 시도와 노사정 타협체제 구축 시도는 10년 민주노조운동의 분수령이 될 사안이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과 원혜영 열린우리당 정책위원장, 그리고 이목희 제5정책조정위원장이 비정규직법안을 2월 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혼탁한 틈을 타고 미뤄왔던 비정규법안을 처리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의 상층을 동물원 우리와도 같은 노사정 타협체제로 몰아 길들이겠다는 심사다.
민주노조운동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노동조합운동의 자주성을 키우기 위한 전향적인 결단도 내려야 한다. 금품수수 비리 사건은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이 명백히 실리주의의 덫에 빠진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자주성을 상실한 반노동자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의 근본 원인인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자본의 포섭에 실리적으로 휩쓸리게 되는 한 비리는 언제든지 재연될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무장한다 하더라도 실리적 유혹 앞에서는 누구나 흔들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재정의 자립, 재정 운용의 자주성 확보는 중요하다. 민주노총은 이미 대영빌딩 건물 임대와 운영 기금을 받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고용보험과 국가예산 확보 및 남북교류협력 기금'을 요청해서 받게 된다면 노동조합운동의 자주성의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럽다. 정부의 기금에 의존하는 재원 확보가 아니라 조합비에 대한 조합원과 노조, 연맹의 자주적 결의를 기초로 힘을 키워야 한다.
징계와 도덕 재무장이 아니라 단결과 투쟁을 통해 자본과 정권의 내외 공세에 맞서고, 이로부터 노동조합운동의 아래로부터의 권력을 키워가는 것, 이것이 오늘 인사청탁 금품수수 비리 사건이 노동조합운동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