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내 물질순환 활성화를 통한 지역자립 농업을"

[특별기획 : 세계화와 한국농업](6) - 식량주권의 올바른 이해와 대응 과제

하루 2,000kcal 이상의 포식시대를 영위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식량위기는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식량안보를 비롯한 환경 및 생태계보전, 농촌 어메니티 보전 등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정작 당사자들은 침묵 속에 있고, 농민들의 절규가 대신하고 있다. 국민들의 이 같은 이해는 오늘 우리 농업의 엄연한 객관적 현실이다. 단적으로 식량보장 나아가 농업문제 해결은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고는 이룰 수 없는 과제이며, 그 만큼 어려운 난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오늘날 식량문제 논의가 올바로 풀리지 않는 한 책임이 운동진영에 분명하게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농업의 객관적·구체적 이해와 거리를 둔 운동진영의 논거는 추상적이다 못해 때로는 억지선동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최근 식량자급률 법제화 논의, 지역자급 등의 개념에서 우리의 식량문제와 농업발전 논의가 새로운 물꼬를 찾아가고 있다. 아직 원론적 수준이지만 식량자급률 법제화 등을 통해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식량주권 논의의 구체성도 확보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지금까지 식량문제, 국내 농업·농촌발전 요구는 '식량안보' 논의 이었다. 그러나 식량안보는 (생산량과 비축량을 함께 포괄하는) 공급량 차원의 접근으로 이 논리만으로 국내 농업·농촌발전의 국민적 이해를 구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식량자급률 25.3%, 쌀을 제외하면 3%라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1일 2000kcal이상의 포식 시대에 살고 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화 시스템 하 수입개방을 전제로 식량안보와 국내 농업을 논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 핵우산 아래 우리의 국가안보를 맡겨온 것과 동일한 이해이다. 식량안보상 뭐가 문제인가 하는 국민들의 반응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수입농산물의 실제 문제는 양보다는 안전성과 삶의 질 그리고 국토환경 보전에 있다. 수입개방을 전제로 한 먹을거리는 국민의 건강과 보건을 책임질 수 없다. 더불어 수입농산물 범람으로 인한 국내 농지 휴·폐경 확대는 우리 국토 자연·환경의 직접적인 파괴로 이어진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식량안보 차원만의 접근은 이런 문제를 올바로 해명할 수 없었다.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강조해 왔지만 역시 초점은 식량안보였다. 국내 농업·농촌문제의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못한 식량안보의 지나친 강조는 오히려 국민 공갈협박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국내 식량문제 나아가 농업문제 해결은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바로 우리가 원하는 방법,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서 자유롭게 먹을거리를 재배·유통·소비하는 권리 즉 식량주권을 올바로 확립하는 것이 그 유일한 대안이다.

식량안보만의 지나친 강조는 구체성의 결여로 과거 애국심에 호소한 우리 농업 지킴이 운동과 큰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논거조차 현실과 큰 차이를 두는 경우가 있다.

식량안보의 대표적 논거에는 미국 World Watch연구소의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의 인구폭발이 있다. 레스터 브라운은 오는 2030년 89억 명에 달할 지구인구와 이에 턱없이 부족할 세계 식량 공급량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레스터 브라운의 예견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의 인구 증가 둔화를 비롯한 세계적 차원의 출산감소 추세 속에 설득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 선진국 등이 오히려 인구증산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효율적 생산관리와 분배가 된다면 현 지구가 최소 레스터 브라운이 제시한 정도의 인구를 부양할 능력은 충분함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한편 레스터 브라운의 인구 예측이 자본의 세계 농업장악의 주요 논거로 이용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 측도 논리상으로는 똑같이 인류 미래를 책임지는 한 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레스터 브라운 등의 인구 예측은 생산성 중심의 농업 특히 오늘날은 다국적 기업의 유전자조작농산물 생산의 중요 논거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8억에 달하는 전 세계 기아인구도 식량안보의 중요한 논거이다. 그러나 8억 기아인구는 자본을 축으로 하는 세계화 시스템 하 열강들의 충돌, 거듭되는 전쟁 그리고 개별 국가 민주역량 부족 등이 종합 매개한 결과이다. 세계적 차원의 기아가 양이 아니라 분배라는 점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독재 권력과 외국자본의 농업장악으로 기아선상에 있는 다수 국가가 식량을 재배할 농장에서 수출용 기호상품과 사료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기아선상의 국가가 주요 농산물 수출국인가하면, 정작 곡간에는 최소한 국민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만큼의 양식은 지금도 비축하고 있다. 다소 다른 차원이지만 우리나라도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세대, 정부 지원 가정, 노숙자 등을 포함하면 근 200만 명이 먹을거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기아의 문제는 다음에 논하는 다국적 기업의 식량 장악에도 불구하고, 양의 부족이 아니라 식량을 구입할 돈의 문제인 것이다. 더불어 단순한 수입농산물 범람 차원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왜곡된 농업구조의 결과이다. 8억 세계 기아인구 역시 다국적 기업의 유전자조작농산물 생산 등 세계 농업장악의 주요 논거가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국적 기업, 곡물메이저에 의한 세계 식량장악도 식량문제의 핵심 화두다. 그러나 이 역시 다국적 기업 활동의 구체적 이해 전달 없이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오히려 다국적 기업의 활동으로 값싸고, 저렴한 농산물 소비가 가능해져 국민들의 후생을 증가시킨다는 역공격에 시달릴 수 있다.

다국적 기업의 세계 곡물식량 장악은 유통부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자에서 슈퍼마켓까지의 구호에서 보여 지듯이 세계적 범위에서 농업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의 장악을 전제로 한다. 세계적 범위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곳에서 가장 값싼 방법으로 농산물을 생산하여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곳을 찾아 최고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자본의 이익실현을 위한 다국적 기업의 농장경영은 조방적 경작으로 먹을거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대량의 농약살포, 화학농법의 만연 그리고 항생물질·생장촉진제 등 동물약품 오·남용이 행해진다. 유전자조작농산물 재배는 대규모 경작에서 종자와 농약사용 등 다국적 기업에 의한 패키지 농법의 강요로 발생한다. 농산물의 대륙간 이동 국가간 이동 과정에서 농산물의 부패 방지를 위한 추가적인 농약살포, 방사선조사 등이 행해진다. 결국 다국적 기업의 세계농업 장악은 값싼 농산물 제공은 국민후생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먹을거리를 공급함으로서 보건·위생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세계 곡물의 80%를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수입농산물의 60%는 카길의 몫이다. 세계 곡물시장은 소수 다국적 기업 곡물메이저에 의해 좌지우지는 때로 정치적 압력수단화 하여 수입국 주권의 치명적 손상을 입히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도 기상재해로 식량 공급의 어려움을 겪을 때 어김없이 곤경을 겪은 바 있다. 더불어 WTO협상과 그 결과인 세계 농산물 무역자유화의 전개에서 다국적 기업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음은 이제 누구나 널리 인식하고 있다.

결국 국내 식량문제는 '이것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의 문제제기에서 새롭게 출발할 필요가 있다. 바로 구체적 일상의 범위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접근과 선택권이 확보 즉 식량주권의 확립 그리고 이를 통한 국내 농업·농촌 발전을 의미한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국민설득은 식량안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건강 나아가 국토 자연·환경 보호논리가 함께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 3가지 원칙은 따로 독립될 수 없고,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최근은 특히 국토 자연·환경보전에 대한 이해가 강조되고 있다. 바로 지구적 범위의 환경문제의 궁극적 지향이 농지와 먹을거리 문제로 귀결될 것이라는 이해에서 비롯된다.


90년대 후반 이후 국내는 환경보전형 농업의 새로운 조류가 급속히 확산되어왔다. 환경보전형 농업을 통해 먹을거리 안전성 보장과 품질확보를 통해 WTO체제를 극복하자는 국가적 추동력도 함께 했다. 그러나 최근 급속히 확산되는 세계적 범위의 환경농산물 상품화 진전은 이 논거 자체도 무색하게 만든다. 국내 환경농산물 가공식품의 원료의 80%가 수입농산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단적으로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국내 농업의 침체 속에 이웃나라 중국에서 계획 생산된 환경농산물이 국내로 밀어닥치는 예도 넘쳐나고 있다. 환경보전형 농업을 통한 WTO체제 극복은 여전히 농산물을 상품으로부터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식량주권 그리고 국내 농업·농촌발전은 국가정책 및 국민 농업철학의 근본적 전환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세계화 시스템을 전제로 한 농업발전은 농산물을 오로지 돈벌이 수단, 상품으로만 취급해 온 자본의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 단위에서 농업상은 식량안보·국민건강·자연환경보전을 매개하는 생명농업·민족농업 최소한 지역농업으로의 지위를 가진다. 더불어 농민입장에서 농산물은 기본적 생계수단이자, 삶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생명체이다. 한편 국민적 합의는 농업발전에 대한 국가예산 지출의 승인이다. 국가는 국민적 동의에 기초하여 지속가능한 농업발전을 위한 예산규모와 투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과 EU의 농산물 국제경쟁력이 정부의 막대한 농업보조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너무나 상식적인 이해이다.

국가 범위에서는 지금까지 WTO체제 세계화 시스템을 전제로 한 농산물을 포함한 농업재화의 수·출입 즉 원격지간 물질순환의 지양이 선결과제이다. 그 대안으로 지역 내 물질순환 활성화를 통한 지역자립 농업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국내 농업의 최대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식량자급률 법제화도 지역 차원에서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지역 범위에서 소비의 계측과 함께 이에 필요한 농지규모, 노동력·생산수단의 확보 그리고 안전한 먹을거리 지향을 위한 생산방법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길을 재촉해온 국내 농업은 안전성, 자연·환경보전과 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국내 농산물은 과연 안전한가의 의문과 함께 환경단체들로부터는 농업의 다원적 환경보전 등이 다원적 기능 발휘에 대한 동의를 전면적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환경농산물 자유무역시대로 수입농산물이 무조건 유해하다는 논지는 더 이상 큰 설득력이 없다. 더 이상 상대적 안전성으로 우리농산물 소비를 국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안전한 농산물 확보를 위한 국내 농업의 전면적 체질 개선이 요구되며, 이는 환경용량 범위 내에서 지역차원의 합의를 통해 대안 모색을 통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역단위의 농업생산 체계의 새로운 개편은 현재까지 국내 소비구조와 동떨어진 채 자본에 의해 강제되어온 농업구조를 올바로 개선하는데도 보탬이 될 것이다. 국내 농업은 최근까지 육류 소비의 급속한 증가를 올바로 수용하지 못해 왔다. 오늘날 식량자급률의 급속한 추락도 결국은 사료곡물에 대한 대응 부재가 한 원인이다. 쌀의 절반 육박하는 소비에도 불구하고 0.1% 자급에 불과한 밀자급도의 갱신도 요구된다. 결국 국내 식량자급률 제고는 소비자의 기호를 반영한 생산구조의 재편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지역자급을 통해 실현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도시와 농촌간의 상생 그리고 지역과 지역간의 상호 순환을 통한 합리적 방안은 지역자급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일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하면 국가단위의 농업생산 규모와 발전상을 내어오는 접근도 가능해 진다.

국가단위 식량자급률 법제화가 자칫 특정 품목의 농산물 생산 장려로 이어질 경우 WTO체제와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국가단위 식량자급률 법제화는 세계화 시스템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바, 공급량 개념의 식량안보 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실현 가능성도 크게 희박하다. 따라서 지역단위의 식량자급률 접근은 WTO체제 하 농업발전 하에서 더욱 유용한 국가전략이다. WTO체제는 국가간 협의체이며, 지방자치단체의 고유한 업무 또는 자치를 근거로 한 논의는 간섭 대상이 아니다.

한편 식량주권의 구체화는 지금까지 세계화 시스템에서 강제된 대륙간·국가간 농산물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이다. 세계적 범위에서 농업철학에 대한 논의 진전을 통해 '농업은 상품이 아니다'는 합의와 함께 WTO체제, FTA논의 등에서 농업을 제외토록 해야 한다. 이에 농민운동 진영에까지 침투해 있는 WTO협상에서의 국내 농업의 개도국 지위 확보, 한·일 FTA에 대한 선택적 사고 그리고 중국의 상류소비 계층을 겨냥한 수출농업 모색 등의 보다 근원적 접근이 필요함을 마지막으로 강조해 두고자 한다.

연재기획 '세계화와 한국농업' 순서

1. 기획소개 '세계화와 한국농업'
2. 거꾸로 가는 한국농업
3. 농업의 세계화 누가 주도하는가
4. 농업 구조조정- 경쟁력 지상주의를 답습하는 노무현 정부
5. 협동조합의 역할과 미래
6. 식량보장을 말한다
7. 친환경농업이 한국농업의 대안이 되려면...
8. 한국농업의 길
덧붙이는 말

송동흠 님은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