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고백의 전쟁, 마더

[배고프다! 영화] 봉준호의 <마더 Mother, 2009>

기억은 고백의 엄마다. 기억이 고백을 낳는다. 기억해내지 못하면 고백할 것도 없다.


도준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고백하지도 못한다. 엄마는 기억을 재촉한다. 시계태엽 돌리듯 관자놀이를 지그시 돌리면 기억이 되돌아온다. 결국 기억이 고백을 낳았다. “엄마가 나 죽이려고 했던 거.” 엉뚱하게 다섯 살 시절의 사건을 기억해낸 아들 앞에 엄마는 고백하고야 만다. “그 때, 얼마나 어려웠으면 엄마가 같이 죽으려고...” 이렇게 해서 기억과 고백은 위치를 바꾸고야 만다. 기억을 강요하던 엄마가 고백을 강요당한다.

기억은 고백의 엄마다. 기억이 고백을 낳는다. 그러나 이 과정은 순산이 아니다. 기억은 기억‘되는’ 것이지만, 고백은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된 것을 고백하기 위해, 양심과 갈등, 결심이라는 분만의 고통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양심과 갈등의 고통을 회피하고, 결과적으로 고백은 엉뚱한 장애를 안은 모습으로 태어난다. 날조된 사실, 순수의 외피를 두른 거짓. 혹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고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뒤늦게 도착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진실. 자백은 강요된 고백이다. 엄마는 아들 도준의 자백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믿지 마.”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말을 먼저 뱉어낸 사람은 진태다. 그리고 엄마는 진태의 말 중에서 중요한 한 마디를 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나도 믿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마더 Mother, 2009>를 지배하는 것은 “나도 믿지 마.”의 역설이다. “나도 믿지 마.”는 유명한 역설이다. 도달할 수 없는 진리값. 나도 믿지 마를 믿는 순간, 나는 그를 믿으면 안 되고 따라서 나를 믿지 마라는 말도 믿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원히 회전하는 혼돈 속에서 엄마는 단호하게 얘기한다. “엄마한테만 말해.”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동네’에서, 엄마는 유일한 진실의 매개자로 스스로를 자처한다. 아들도 모르는 진실을 엄마는 혼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중이 진실을 외면하고 공권력이 진실을 호도하는 현장에서 엄마의 진실한 투쟁이 시작된다.


지저분하고 좁은 변두리의 읍내에서 엄마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한 소녀를 매개로 형성된 파렴치한 공동체의 속살이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며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소녀를 방치하고 더 나아가 소녀를 수탈하는 공동체, 은밀하게 그러나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반인륜적 범죄의 현장을 지켜보는 엄마의 시선은 피로할 뿐이다. 엄마는 너무나 피로한 나머지, 소녀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느낄 여력도, 한 소녀를 처참하게 망가뜨린 공동체에 대해 분노할 정의로움도 잊었다. 오히려 피로함도 잠시, 엄마는 아들을 위해 다시 공동체의 기억들을 들춘다. 그리고 긴 여정 끝에 엄마가 도달한 곳은 원점이다.

원점 - 잔혹한 사실들이 교차하는 현실 세계에서 엄마는 긴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비비고 벌판으로 나와 춤을 춘다. 원점에 도착하고 나서야 엄마는 진정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진실을 알게 된 대가는 의외로 크지 않다. 이제 엄마 역시 “나도 믿지 마.”라고 말해야 할 사람들의 대열에 동참했음을, 자신 역시 하나의 비밀을 간직하고 이상한 동네의 일원이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뿐이다. 진실을 찾아 투쟁했으나 이제 진실을 대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 말이다.


엄마는 결국 아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아들을 구출하고 엄마는 모든 것을 잃었다. 엄마에겐 아들이 모든 것이었으니, 결국 엄마는 모든 것을 얻고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은 셈이다. 아들을 대신해 잡혀 들어온 종팔에게 묻는 엄마의 질문 한 마디는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법 하다. “엄마는 있니?” 재소자에게 얻어맞고 한쪽 얼굴이 부었던 자신의 아들을 닮은 종팔, 자신의 아들만큼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종팔, 자신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지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종팔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엄마의 긴 여정은 끝이 난다. “엄마는 있니?”라는 짧은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다. “(나는 너의 엄마가 되어줄 수 없는데) 엄마는 있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를 위해서 아파해 줄) 엄마는 있니?” 종팔이 고개를 젓는 순간, 엄마는 이제껏 자신이 투쟁해왔던 고난의 여정보다 더 멀고 아득한 어떤 것을 느끼게 된다. 아들을 구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아득함.

영화는 잔혹하다. 특히 엄마에게 잔혹하다. 엄마의 옆에는 아들이 있고, 아들은 언젠가 기억해내고 고백을 강요할 것이다. 다섯 살 시절을 기억해냈던 것처럼, 낯설고 엉뚱한 순간에 미처 준비되지 못하고 방심하는 순간에 고백을 강요할 것이다. 아들은 엄마와 공범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들은 기억하고 엄마는 자백한다. 엄마가 한 동네의 수상한 기억을 모두 현실 세계에 재현시켰던 것처럼 아들은 엄마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엄마는 자기만이 아는 혈 자리에 침을 놓고 세상의 춤 속으로 뛰어든다. 아프고 맺힌 것들 모두 풀어주고 잊게 해주는 혈 자리에 대한 욕망은 현실의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크고 작은 죄들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최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성의 기괴함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모성에 대한 영화로만 볼 필요는 없다.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모성, 진실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실, 정의를 향해 수렴되지 못하는 선함의 기괴함을 향해 동시에 묻게 된다. 이 기괴함의 엄마는 어디에 있는가? 집착적인 모성이, 파편화된 사실이, 독단적인 선함이 돌아가야 할 고향은 어디에 있을까. 보편과 진실과 정의가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시대의 뒤틀린 표정을 향해 연민과 동정, 사랑을 내어줄 그 어떤 것 말이다.

“나도 믿지 마.”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의 분열된 삶, 그들의 춤사위가 이 시대의 표정이다. 한편 자기만은 믿어달라는 사람들이 더 많아 혼란스러움이 가중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영화 <마더>가 개봉할 즈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하나의 상징이 새로운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우리는 엄마가 아니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녀와 종팔이를 위해 울어줄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자.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만을 기억하지는 말자.

by(e) G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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