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여성성에 대한 공격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대선을 말한다](4) '여성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기대 깨기

2012년 12월 19일 저녁, TV 화면에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장면이 나타났다. 그것도 개표를 아직 한참 남겨둔 시점에서. 빨간 옷을 입은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최초의 부녀 대통령’,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화려하게 그녀의 앞을 장식했다. 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현실이 되어버렸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

[출처: 박근혜 캠프]

대선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박근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자니까 여자를 지지할거냐’는 질문들. ‘여자니까 여자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은 남성들만이 정치적 주체로 전제되는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질문이자, 동시에 정치의 장에서 여성이 어떠한 대상으로 생각되는지를 보여주는 질문이다. 굳이 비교할 대상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어떤 남성들도 ‘남자라서 남자 후보를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남성 대표자는 당연히 보편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후보와 이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는 완전히 다른 상징성을 지닌다. 남성들의 투표 행위는 남자라서 남자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정치적 주체로서 대표자를 선택하는 행위이지만 여성들의 여성 후보 지지는 보편적 대표자로서가 아닌, 여성 대표자로서의 선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여성들의 정치의식을 비하하는 근거가 되기까지 한다. 이는 남성중심적인 정치 구도 속에서 남성은 특정한 정체성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여성은 어떤 '정체성'의 상징으로 위치지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구도 때문에 어떤 여성 후보가 스스로 여성 정체성을 자신의 상징으로 걸고 나왔을 때, 이 상징은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여성 대표자가 '여성'이 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행보가 아닌 상징적 정체성으로서 평가된다.

그런데 자칫 스스로에게 결정적인 독이 될 수도 있는 이 상징성을 박근혜는 일찍부터 자신의 것으로 전유해버렸다. 아마도 이것은 정치적 성과나 구체적 정책 대신 박정희의 딸이자, 정통 보수의 아이콘 같은 여러가지 상징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던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필연적인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당연히 박근혜의 당선은 단지 '여성'으로서의 상징성을 전유한 결과만은 아니다. 그녀가 지닌 모든 상징들이 그녀에게서 통합되어 드러난 결과인 것이다.

그녀는 어느 새 '어려운 시대에 가난한 한국을 급속도로 성장시킨 아버지와 어려운 이들을 몸소 찾아가 위로했던 어머니를 불행히 여의고,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진 채 스스로 정치적 경험을 쌓으며 성장해 온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여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미지에 따라 '아버지처럼 나라를 책임지고,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국민들을 돌볼' 대표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박근혜의 이미지에 4,50대 이상 연령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과 기대를 동일시했다는 사실이다.

중장년층 여성들의 박근혜 지지가 의미하는 것

“여자가 대통령으로 나온다는 게 우리나라가 내 생각은 그렇거든요....우리나라가 이만큼 컸구나, 남자를 제끼고 여자가 대통령으로 나왔다는 게, 다음을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 현재로는 굉장히 자랑스럽죠. ... 여자도 할 수 있고, 여자나 남자나 동등한 시대가 왔구나, 여자라고 소외되지 않고 여자도 이렇게 나랏일을 할 수 있는. 나는 그것을 가지고 여성으로 봤을 때 좋다는 거지." (면접자 A)

이는 박근혜의 여성 대표성에 대한 한 연구1)에서 연구자가 모 대학교 청소용역분회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면접 중에 나온 말이다.

6,70년대의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거쳐온 중장년층 여성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모순된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딸들에게 "너는 능력만 되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아야 그게 행복이지"라고 말한다. 여자라서 학업을 포기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평생을 시달리며, 임금노동을 한다 해도 결혼, 임신, 출산, 양육 등 여자로서의 삶과 연관된 여타의 조건들로 인해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던 이 여성들에게 박근혜는 자신들과 같이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도 여성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키운 '꿈의 대리인'이다.

가족과 사회에서 늘 소외된 위치에 있었던 많은 중장년층 여성들에게 박근혜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이룰 수 없었던 기대와 꿈을 실현시켜주는 존재인 것이다. 설령 박근혜가 이 여성들의 여성으로서의 험난한 경험들을 어느 것 하나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같은 여성’이기에 똑같이 그 무엇도 경험하지 않은 남성 보다는 훨씬 그녀들의 입장을 대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와 같은 배경을 볼 때, 중장년층 여성들의 박근혜 지지를 그저 '여성이라서 여성을 선택한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결국 박근혜의 상징성에 대한 중장년층 여성 유권자들의 기대는-그것이 비록 어긋난 기대라고 할 지라도-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과 성별 계급에 따라 여성들이 겪어온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들의 이런 현실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하지 않는 채로 박근혜가 여성이다 아니다를 따지거나 그녀를 ‘독재자의 딸’, ‘공주’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완전히 초점이 빗나간 것이며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그녀를 돋보이게 할 뿐인 것이다.

어긋난 기대와 잘못된 공격

그런데 박근혜가 이렇게 상징을 전유하는 동안 야권은 무엇을 했는가. 문재인 후보는 한심하게도 '여성 대통령'을 내세운 박근혜에 맞서 '대한민국 남자'를 내세우기에 바빴다. 비난이 일자 '대한민국 남자'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선거 기간 내내 문재인 캠프는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나라 사랑, 가족 사랑, 아내 사랑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주력했다. 문재인 후보의 사진에서 문재인은 늘 앞을 보고 있고, 그의 부인은 문재인을 보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그 이미지는 마찬가지였고 선거 공보물에서도 이는 그대로 재연되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안정적인 가정, 올곧은 가장이자 다소 무뚝뚝해 보여도 사랑 많은 남자와 그의 곁에서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내. TV 광고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가장 상징적으로 극대화되었다. 그는 연설을 준비하다 피곤에 지쳐 의자 위에서 잠이 들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위해 종종 걸음으로 물을 떠다 주고 행여라도 남편이 깰까 조심스럽게 뒤에서 그의 와이셔츠를 다림질한다.

아마도 이런 이미지는 많은 남성들과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든 어떤 여성들에게는 어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미지를 평생 자신의 일상 속에서 수행해왔던 여성들에게 이는 결코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안정적 가정 속에서 남편을 진심에서 우러나는 존경과 사랑으로 보살피는 문재인의 부인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그녀에게 동일시를 하는 대신, 문재인을 보며 평생 자신이 챙겨줘야 했던 지긋지긋한 남편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문재인에게 일생의 운명이자 동반자는 오랜 세월 그의 곁에서 함께해 온 부인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남성들 간의 연대와 깊은 유대의 사이에서 여성으로서의 문재인의 부인은 그저 그 옆을 지키고 그를 바라볼 뿐이다.

이런 이미지 속에서 그려지는 문재인의 여성 정책은 여성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 더 책임감 있는 남성으로서 여성들을 '챙겨주는' 정책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그의 이미지가 가져온 한계가 아니라 문재인 캠프의 가부장적 인식의 한계이다.

  홍성담 作 <골든타임 - 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 194×265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평화박물관 홈페이지]

이 와중에 더욱 한심했던 것은 다분히 남성중심적 시각에 근거한 야권 지지자들의 박근혜의 여성성에 대한 조롱이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논란이 되었던 홍성담 화백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서 박근혜는 산부인과 침대에 앉아 박정희를 출산하고, 의사들은 박정희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작가는 출산의 경험이 없는 박근혜에게 의도적으로 출산을 하게하고,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 받은 그녀가 아버지를 낳게 하고 있다. 의사는 그녀를 향해 경례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다시 탄생한 아버지에게 경례를 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박근혜를 통해 유신이 재탄생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겠지만 그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는 비단 박근혜에 대한 조롱일 뿐만 아니라 여성 권력과 여성적 상징에 대한 총체적 멸시로 보인다. 여성은 출산하는 존재일 뿐이며 진정한 권력은 그녀에게 있지 않다. 이러한 인식과 태도가 과연 단지 그 대상이 박근혜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작품을 둘러싼 비판들에 대응하는 남성 지지자들의 옹호는 더욱 궁색했다. 일례로 문화평론가 최영일의 옹호는 그가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주의적 인식 역시 부재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는 홍성담의 작품과 비교해 프리다칼로의 작품 <나의 탄생>을 언급하며 "이 작품 역시 한 여성의 자궁에서 아기의 머리가 나오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자칫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아이를 유산하고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작가의 내면세계를 그린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2)

  프리다 칼로 作 <My Birth>, 30x35cm, 1932

프리다칼로의 작품과 홍성담의 작품을 비교해 보라. 홍성담의 작품에 대한 비판은 단지 '출산하는 모습이 혐오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출산을 재현하는 방식의 문제이며, 출산 장면을 통해 여성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의 문제이다. 프리다칼로의 작품에서 출산은 희화화된 대상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고통스럽다. 게다가 그녀의 작품은 그가 오해하듯이 여성으로서의 유산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남성중심의 세상 속에서 고통스럽게 태어난 자기 자신, 여성 존재에 대한 것이다. 아이를 낳은 여성은 죽어 있고, 그 몸에서 태어난 아이 역시 고통스럽다. 이를 지켜보는 침대 위의 성모 마리아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프리다칼로는 아이를 낳은 여성 역시 자기 자신이며, 태어난 아이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최영일이 그녀의 작품을 단순히 여성으로서 아이를 유산한 경험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홍성담의 작품에 대해서도 여성의 출산에 대한 이와 같은 단편적이고 도구적인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철저히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여성성을 재현하고 해석하는 이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결국 박근혜가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전유하는 동안, 여전히 남성 중심의 정치와 인식에 갇혀 있던 야권은 그 무엇으로도 박근혜가 전유한 상징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지점을 명백히 드러내고 평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5년 동안 박근혜는 그녀에 대한 여성들의 어긋난 기대 속에서 더욱 자신의 왜곡된 여성 대표성의 상징을 강화해갈 것이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의 왜곡된 상징을 깨기 위하여

한편, 선거 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박근혜의 여성성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은 주로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경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결혼도, 출산도 해보지 않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살아보지도 않은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는 남성은 어떻게 여성들을 포괄하는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결혼이나 출산의 경험이 없는 여성, 남성을 사랑하지 않는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말들은 여성이 여성이자 동시에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보편적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모든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이 사회에서 구성되는 수많은 정체성들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모든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대표자에 대한 착각과 왜곡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간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당연히 박근혜는 여성들을 대표할 여성 대표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 근거는 그녀가 보편적 여성들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녀가 여성들의 역사와 이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경험이나 위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녀가 하고자 하는 정치가 과연 여성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 철저한 가부장체제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 차별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신체, 온갖 생명들에 얼마나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에 대해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평가하고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그 평가와 비판은 박근혜만이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로 이어져야 한다.

박근혜가 여자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여성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기대를 깨고,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정치를 만들고 무엇을 대안으로 보여줄 것인가이다. 박근혜 정권 5년은 그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 주
1) 이진옥, ‘박근혜, 여성정치세력화의 폐문인가 관문인가?’, <여성, 대선 정치를 말하다> 토론회, 2012.10.25
2) <미디어오늘> 11월 21일자, '진중권, "유신출산, 새누리 법적 대응 방침 유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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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가부장제 , 홍성담 , 프리다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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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국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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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는 여성이 대통령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주 진보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그렇다고 여성주의에 대해 차별화된 시각과 박근혜 당선자의 여성대통령 담론보다 급진적인 여성정책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여성대통령론을 조롱하기 바빴고, 진보진영만의 여성정책에 대해 고민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독자

    오늘 기사에서 2012년 접대비가 8조라고 하는 걸 봤습니다.

    진보진영에서 만연한 성매매와 유흥업소 문화에 대해 전면적인 개혁을 선언합시다.

    민주노총에서 접대NO! 룸살롱NO! 캠페인 벌여봅시다.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명분있고, 기업들도 따라올 것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도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밤에 술을 따르는 접객원으로 일하느라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 조금만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나면 유흥업소에 노출되게 됩니다.

    여성가족부 조사(2010년 성매수 실태보고서)에서 성매매의 74%가 유흥업소를 경유해 이뤄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우리나라 식품위생법 시행령 22조1항에서는 유흥주점영업에서 손님의 유흥을 돋구는 부녀자인 ‘유흥접객원’을 둘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부터 한번 바꿔봅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