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의 보충물

[주례토론회] 사회적 경제 비판

[편집자주-토론내용]

경제민주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그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하나

작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정책의 아젠더를 선점하려는 정치세력들간의 논쟁에서 우리는 매우 이례적이고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당시 보수 이데올로기의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조선일보가 전지구적으로 불고 있는 ‘자본주의 4.0’이라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바람을 소개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자고 설파했고, 곧이어 박근혜 후보진영에서 경제민주화를 대대적으로 들고 나왔다. 설령 그 진의가 선거승리를 위한 술책이라 하더라도, 이후 대선논쟁과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경제민주화 담론은 계속 거론되고 있다. 왜냐하면 야당을 비롯한 시민사회 및 진보진영에서 경제민주화 공약 준수를 계속 요구하고 있고, 나아가 ‘창조경제론’으로 변질된 경제민주화를 바로 잡기 위해 ‘사회적 경제’로의 구조적인 경제개혁과 ‘협동조합’ 육성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지난 <주례토론회>에서 ‘창조경제론’을 살펴보았다. 거기에서 근혜노믹스의 ‘창조경제론’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로 이어져 온 신성장동력 찾기의 또 다른 버전임을 지적했다. 또한 지난 대선시기 각축을 벌였던 다른 후보들과 정치세력들에 대해서도 상호간의 이념적, 정책적 뿌리가 대동소이함을 지적하면서,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다”라는 진정성 논쟁만이 남았다고 비판했다.

과연 실체에 비해 지나칠 만큼 과잉된 현재의 경제담론과 논쟁들은 대선이라는 정치일정에서 종종 드러나는 특별한 현상인가, 혹은 한국사회에서 경제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적 분출의 대리전인가, 이제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외 경제 환경의 불안정성과 내부적 정책혼선으로 인해 ‘창조경제론’의 동력이 저하되고 있고, 반대 진영에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격돌할 경제담론논쟁 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는 우리사회에 ‘자본주의 4.0’,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등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이론적 실체와 역사적 전개과정을 조명하고자 했다.

자본의 새로운 전술, ‘경제적인 것’에 ‘사회적인 것’을 얹어라

80-90년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워싱턴 컨센서스)이 세계를 휩쓸던 시절,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통해 위기를 탈출하고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려고 했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국가 실패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경제종속과 불평등문제는 더욱 심화했다. 이에 반발하면서 퍼지기 시작한 반세계화 운동은 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터져 나오게 된다.(99년 시애틀 WTO 반대투쟁) 이를 전후한 시점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는데, 98년 세계은행 수석부총재에 새케인스주의자인 스티글리츠가 임명된 것이다. 주류진영에서는 시장 중심적 편향에 과도하게 기운 신자유주의적 국제개발원조 방식에 대한 내부적 반성이 일고 있었는데, 이것이 비주류 경제학자였던 스티글리츠를 세계은행의 수장으로 앉힌 것이다. 이후 50-60년대 이후 사그라들었던 산업정책의 사회학적 이념이 경제학 패러다임에 다시 들어오면서, 점점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워싱턴 컨센서스)은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로 변형을 일으킨다.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사회적인 것’(지역, 커뮤니티, 문화, 관습)으로부터 이탈되었던 ‘경제적인 것’(자유시장)에 다시 ‘사회적인 것’들을 얹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신자유주의가 추구한 순수한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의도한 구조개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는데, 위로부터의 제국주의적이고 수탈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참여를 북돋우면서 구조개혁의 실행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등장한다. 이전엔 근대화를 위한 발전에 금융화와 탈규제가 단골처럼 등장했지만, 이젠 지역커뮤니티가 활성화 되어 ‘사회적 자본’이 구축되어야만 제대로 발전한다는 논리가 부상한 것이다.

‘사회적 자본’의 개념은 말 그대로 사회학적 개념이 경제학 개념으로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퍼트넘이라는 학자가 지역커뮤니티가 활성화 된 곳에서 왕성한 경제 활력과 선순환 구조를 관찰하면서 유명시킨 말이다. 여기에 새로운 주체로서 NGO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사회적 신뢰구축이 중요한 정책과제가 된다.(신뢰, 협동, 자조, 시민사회 주도성)

이러한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의 내용들은 개발도상국에게는 빈곤퇴치전락의 핵심으로 포함되고, 선진국에서는 ‘위기관리’ 개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2007-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신경제론의 핵심인 인적자본 개념은 점차 쇠퇴하고 ‘사회적 경제’와 ‘사회적 자본’ 개념이 더욱 일반화 되게 된다. 이는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위기에 처한 자본이 자신의 위기관리 전망에 국가와 NGO를 적극적으로 배치시킨 결과이다.

이제 ‘사회적인 것’은 경제구조 재편과 경제주체의 동일화라는 두 축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자본주의 4.0’,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등의 키워드로 상징되는 경제구조 재편의 문제의식은 대동소이하다.(주례토론회 <‘창조경제’는 창조적이지 않았다> 참조) 여기에 경제주체의 동일화를 끌어내기 위해 ‘공정’, ‘지속가능성’, ‘호혜성’, ‘자발성’ 등등 주체화양식의 키워드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주체화과정에서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조직이 굉장한 탄력을 받는다. 가령 태안기름유출사태에서 보듯, 정작 사고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은 보상축소에 골몰하고 있을 때, 온 국민이 나서서 해안의 기름때를 모두 닦아 냈다. 복지정책과 밀접한 세 개 부처인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안전행정부가 관련시민단체와 자원봉사조직 관리에 적극적인 건 단순한 업무협조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사회적 자본’의 토대가 여기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요즘 ‘000 마을 만들기’ 운동이 곳곳에서 한창인데, 만약 지역주민들이 자발성과 협동, 상호신뢰가 없으면 사업은 지속불가능해고 일회성 전시행정으로 끝나고 만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사회책임투자, 윤리적 소비

이렇게 ‘사회적인 것’들이 들어찬 경제적 토양에 조직형태로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이 최근 우후죽순처럼 확대되고 있다.(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 2012년 협동조합법 제정) 사회적 기업이 기존 기업들처럼 임노동 관계에 따른 위계질서를 갖는 경영구조라면, 협동조합은 1인 1표에 근거한 수평적 경영구조를 갖는다.

사회적 기업의 진출분야는 대부분 사회서비스 분야에 치중되어 있다. 그 이유는 김재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이 어느 언론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설명보다 등장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더 좋겠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량 실업사태로 양극화가 심화되자 정부가 공공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정책을 폈으나 문제는 이 정책 자체가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한국은 공공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데도 사회적 안전망이 상대적으로 미흡해 충분히 대처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이 고조됐던 것이다.” -국민일보 2013.7.2

현재 사회적 기업은 828개가 운영 중인데, 생존율이 94%에 달한다. 1990년대 후반 붐을 이뤘던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2∼4%였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생존율이다. 그런데 현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한 5년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독자생존을 해야 할 시점에 직면했다. 그러나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 중에서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 현장 분위기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우대정책을 정부가 제도적으로 지원하길 요구하고 있다.(김종각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본부장) 이러한 의존적 관계는 사회적 기업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공공서비스의 영역을 외주화하면서 탄생했던 사회적 기업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애초부터 복지정책의 하위파트너 관계에서 출발한 사회적 기업에게 ‘독자생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최근엔 지난해 말 협동조합법 시행을 계기로 협동조합 설립 붐이 일어나고 있다. 7개월 동안 1,461개가 생겼다.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횡행하는 우리나라에서 소위 “뜻있는 사람끼리 뭉쳐보자”라는 대중적 욕구가 분출한 현상이라고 분석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처럼 협동조합도 독자생존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내부적 경영에 관한 조합원들간의 민주적 소통과 교류는 스스로의 몫일 지라도, 외부적인 판로 개척의 문제는 주관적 의지로만 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개인 자영업자가 여럿이 모인 자영업체로 바뀌었다고 해서 사업모델이 저절로 혁신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자금조달 문제이다. 사업자금을 처음부터 충분히 쌓아놓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자금을 받거나 창업투자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에 ‘사회적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사회책임 투자펀드’가 큰 역할을 한다. 말 그대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에 투자한다는 의미인데, 유엔은 이미 2007년 책임투자개념을 정립시켰다. 이후 ‘마이크로 파이낸싱’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여러 자금투자모델들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사회책임투자’라는 개념은 여러 정책적인 자극을 주는데, 대표적으로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의 투자방향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반 대기업들에게도 ‘사회공헌사업부’를 만들어 기업이미지 관리나 사회공헌에 참여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또한 기존의 윤리적 소비 개념을 ‘착한소비자’가 ‘착한기업가’에게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ISO 26000" 인증마크) 이것을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만든 것이 ‘크라우드 펀딩’이라 불리는 것이다. 말 그대로 대중들의 참여로 자금을 모으는 것인데, 이를 위한 제도적 방안도 이미 정립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드러나는 논란들

그렇다면 이렇게 첫 걸음마를 데고 막 일어나기 시작한 ‘사회적 경제’에서 드러나는 논란은 무엇일까? 먼저 많이 지적되는 것이 자본주의적 대안으로 신화화된 현상이다. ‘국가의 실패’와 ‘시장의 실패’라는 두 가지에 대해서 이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를 상정하는 것인데, 서구에서는 이미 ‘제3의길’을 통해 20년 전부터 회자된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IMF 이후 경제불평등의 심화와 최근 2008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선전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나 앞에서 정리한 그림에서 보듯, 현재 창업되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은 국가 기능에 하위파트너로 조응하거나 시장영역으로부터 자금조달과 판로개척 문제로 종속되어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인 것’을 다시 경제학에 끌고 들어온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의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위싱턴 컨센서스)을 보충하기 위해 정립된 개념이 듯, 현재 회자되는 ‘사회적 경제’ 담론도 자본주의 폐해를 완화시키고 보완시키기 위한 개념이다. 심지어 요즘은 ‘사회적 경제’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것을 체제를 변혁시키는 새로운 대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말로 정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러 비판들 중 사회변혁에 미달하는 하는 관점이라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변혁이라는 관점은 탈각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과 혼동하는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사회적 경제’ 담론은 과잉된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 “돈벌이 경제가 아닌 살림살이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약육강식의 돈벌이 경제와 협동 상생의 살림살이 경제라는 말이 대비되면서, 대기업 중심의 불합리한 ‘갑을관계’가 판치는 경제구조를 경제민주화와 협동의 경제로 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설파된다. 이를 위해 1인 1표의 민주적 운영원리가 깃든 협동조합이 대안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까지 확장된다.

하지만 협동조합운동 100년의 역사에서 지적되는 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구성원들의 유입과 세대간 격차로 인해 관료적 위계질서에 편입되거나 자본주의 기업으로 퇴행할 우려가 늘 상존해 있었다. 또한 다른 협동조합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관계 속에서 타 조직에 배타적 경향을 띨 수밖에 없고, 이는 조직들 간의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현재 다시 활성화 되고 있는 협동조합들은 이미 거대화된 국가(권력)과 시장(돈)이라는 매개물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협동조합방식의 경제운영원리에 국가와 자본이 조응하도록 거시적인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면 이것은 다시 체제변혁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순환논리에 빠지고 만다.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기간산업 국유화’나 ‘노동자자주관리’와 같은 담론이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충물이 대체물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영미식 ‘소셜벤처기업’과 같은 보충물 만이 허락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영원리와 주체의 도덕성에 기댄 ‘사회적 경제’ 담론은 ‘사회적인 것’이 보편적인 상수가 아닌 변수라고 이해될 때, 올바른 논쟁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것’은 목표가 아닌 ‘현존하는 것’으로서 확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신자유주의(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에 영합하는 것 일수도 있다는 자기 경계와, 극복하려고 했던 ‘배제’의 문제를 없애서 이를 해결하기보다 배제의 분할선을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예를 들어 협동조합의 신화로 알려진 ‘몬드라곤’의 성공비결에 대해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바스크 민족주의이다. 지역주의 동일성에 기초한 공동체주의는 타 공동체에 대한 분할선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몬드라곤’이 세계화하면서 브라질 등등에서 현지법인 조합원들과 고용-피고용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앞서 말한 배제의 분할선의 재배치를 강하게 상기시킨다.)

앞으로 제기될 쟁점들

그래서 자연스럽게 거시적 부문의 구조변혁으로 논점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제를 사회로 끌어당기는 운동이 분출하였고, 이는 고도금융을 제어하고 국가에 의해 재분배정책을 취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80-90년대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경제는 사회에서 다시 떨어져 나갔고,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다시 경제를 사회로 끌어당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회적 경제’의 등장이 바로 그러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히려 반대로 사회가 경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30년대 대공황 이후 분출한 뉴딜적 재분배정책(사회방어운동)과 현재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핵심적 이유는 국가이다. 국가가 위기를 관리할 능력 저하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신자유주의 국가의 최소화)

그런데 이런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도 비대칭적인데, 미국처럼 헤게모니 국가로서 기축통화를 통한 위기관리능력을 가진 나라가 있는 반면, 유럽채무위기국가들처럼 경제종속에 의해 위기관리에 아주 무력한 나라가 있다. 또는 중국처럼 독자적인 정치체제로 자본운동과 시민운동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국가도 있다. 두 강대국의 행태를 보면 국가기능의 핵심인 화폐관리와 노동력 관리를 중심으로 위기를 적극 관리하면서, 여기에 ‘사회적인 것’들을 배치하고 있다. 사회를 경제로 끌고 들어오는 형태의 전략이다. 그래서 ‘국가의 재등장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국가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위기관리국가이며, 재등장이라기보다 변형, 변모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사회적 경제’ 담론의 중요한 축으로서 시민사회 주도성은 그 중심을 잡기 어렵게 된다. 국가-시민사회-자본 공조체제에서 힘은 국가로부터, 돈은 자본으로부터 전달받는 시민사회가 독자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제도적 동형화 발제문 참조) 그렇다 보니 3주체를 이끌어가는 ‘창발적 제4섹터’라는 개념까지 등장하면서 현실의 곤란함을 관념적 이론모델로 대체하려는 경향마저 등장한다. 현실의 곤란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면 국가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인 것’은 문제의 해결점 혹은 종착점이 아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그걸 딛고 넘어서야 할 출발점이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 담론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제3영역’이라는 자기 우월적 관념에 머무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딛고 극복해야할 문제점은 어느 영역에서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사회적 경제’ 담론과 협동조합의 이념에 보이는 커다란 관심과 열망이 단순한 유행이 될지, 아니면 ‘사회적 경제’ 담론이 사회변혁의 매개물이 될지, 이는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의 보충물에서 시작된 ‘사회적 경제’ 담론의 역사를 성찰하고 자기변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론문 끝]

아래는 발제문 전문이다.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1)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중앙대 한예종 강사)


오늘날의 위기는 축적의 위기와 동일성의 위기로 파악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금융세계화 경향은 사실상 ‘강탈에 의한 축적’에 가까웠고 지구적인 외환, 금융, 재정 위기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민중적 저항들을 거치면서는 더 이상의 강탈조차 힘들어졌을 정도로 축적의 위기에 다다랐다. 다른 한편, 세계화로 은유되는 ‘시장의 퇴행적 확장’ 경향은 얼마간 안정적이었던 ‘국민적-사회적 국가 형태’를 쇠퇴하게 했고 이에 따라 더 이상 포섭되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배제의 고통을 경험하게끔 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프로그램이 제시된다면, 적어도 그것은 생산과 소비 그리고 소유와 분배 등에 있어 대안적인 교환양식이어야 하며, 동시에 주체화와 타자화 그리고 인간관계 등에 있어 대안적인 교류양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사회적 경제’는 주로 교환양식의 측면에서 제기되는 의제에 해당한다. 전체 경제에서 사회적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0.04%로 극히 미미한 수준이지만, 적어도 담론적 차원에서는 대항 헤게모니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로 각 분야에서 진지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2) 이러한 사실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적 경제라는 문제가 정치적 입장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한 담론이지만 그 방향성은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회적 경제에 얽혀 있는 위기관리에 대한 기대와 발전에 대한 전망은 다양한 이해관심들에 따라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는 운동의 의제화, 공공성 강화의 시도, 복지의 대체 입론, 윤리적 시민성 고양 기획 등등이 과잉결정‘되고 있는’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정된 것이 없다는 현실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유도한다. 하나는 미결정 상황이라면 우리들 누구라도 거기에 개입하여 정치적 방향을 구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기 위해 과잉결정의 ‘블랙박스’ 안에 무엇이 얽혀 있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대안적 교환양식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언어의 모호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쟁점들을 추출하고자 한다(3절). 이를 위해 사회적 경제 담론이 제기된 배경과 그 자체의 역사성(1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들(2절)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도록 할 것이다.


1. 사회적 경제의 역사적 쟁점

(1) 대안적 교환양식 혹은 새로운 경제학적 가상

1990년대에 지식기반경제라는 용어가 출현한 이래로, 이 용어는 새로운 ‘경제학적 가상’(economic imaginary)3)을 매개로 하여 경제 관행이 새롭게 조직됨을, 어쩌면 이미 조직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제학적 가상이란 말이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경제라는 물질적 영역과 가상이라는 상징적 영역은 서로 무관하거나 오히려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이데올로기라는 타자 없이,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가 경제라는 타자 없이 존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다. 어느 시대의 어느 국면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경제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야 제대로 관철될 수 있었고 이데올로기는 경제에 힘입어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표 1>4)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한 번 수립된 경제학적 가상은 단순히 이 가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사)완결적 구조를 지닌 기호체계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경제 관행은 물론이고 일상의 사회 실천을 조직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식기반경제’라는 담론을 유력한 표상으로 가지게 됐을 때, 이것은 (생산 차원에서) 지식이나 창의성같은 비-물질적인 대상을 허구적으로 상품화하는 새로운 변화 그리고 (주체화 차원에서) 인간 주체를 무한히 자기계발하게 하는 새로운 변화와 조응하는 셈이었다.5) 요컨대, 경제학적 가상은 축적 논리와 동일화 메커니즘에 두루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의 세계를 질서 짓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지식기반경제가 됐든, 아니면 그것의 모체로 지목받는 신자유주의가 됐든, 그것의 정치적 효과는 비교적 자명해 보인다. 1990년대의 축적 위기에 직면하여 고안된 탈출구는 ‘지식’을 정점으로 하는 비-물질의 개발이었다. 이를 두고 자본의 실질적 포섭 운운하면서 노동자들의 역량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있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의 동학은 전혀 녹녹하지 않아서 대중들의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새로운 허구적 상품으로써 ‘시장의 퇴행적 확장’을 촉진하는 역설을 창출했다. 그 사이에 순수한 프롤레타리아라는 형상들은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횡적으로 동일화하기보다는) 성찰적으로 자기-동일화를 반복하는 모순에 처했다.

이렇게 한동안 지식기반경제가 지배적인 가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지구적 금융위기와 이로 인한 금융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들이 중심부 지역마저 강타하면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잉태한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집합적으로 소망하기 시작했다. 경제 영역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일상 영역에서는 소셜 네트워크(와 이를 통한 치유)를 강조하는 경향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뿐만 아니라 새누리당마저 ‘경제민주화’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것을 결코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화라는 말이 가지는 이념적 보편성에 비해 이들의 실제가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가 하는 점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근 몇 년에 걸쳐 거의 유일한 대안(적 교환양식)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담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누적적 위기로 인해 세계경제 질서에 있어 근본적 재고가 요청되는 시점이고, 동시에 국민주의의 이념적 시효가 다함으로써 생겨난 배제의 정치에 대응하여 새로운 가상적 보편성의 창출이 긴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출몰하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사회책임투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유가치 창출, 사회적 기업, 마이크로 크레딧, 공정 무역 등이 한편에 있고, 사회적 자본, 소셜 미디어, 윤리적 소비, 마을 만들기, 공공예술과 관계미학, 자원봉사활동, 재정 재능 기부 등이 다른 한편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의 지배적 관행들, 즉 ‘고삐 풀린’ 금융, 주주가치경영, 벤처기업, ‘약탈적’ 담보 대출, 자유무역, 그리고 인적 자본, 1인 미디어, 과잉소비, 주거 격리, 상업화된 대중예술, 자기계발, 스펙쌓기 등과 흥미로운 대척점을 보여준다. 축적 논리와 동일화 메커니즘에서 한동안 역량, 유연성, 계산가능성, 개별성 같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네트워크, 지속가능성, 공정성, 친밀성 같은 덕목들이 응전하고 있는 태세인 셈이다.

이와 같은 추세가 언어유희 내지는 단순한 유행현상 정도로 그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이런 말들은 지배계급과 중간계급, 심지어는 민중계급조차도 동의하는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자본주의 4.0을 보도할 때 경향신문이 사회적 경제를 기획하고, 야당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제시’할 때 여당 후보도 경제민주화를 ‘약속’한다. 이러한 역설은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교환양식과 그에 준하는 새로운 교류양식이 대다수 민중계급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에 의해서도 추구된다는 점을 입증한다.

물론 사회적 경제에 관한 이론적 논의와 실천적 관행들은 비교적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국가와 시장이 주도했던 지난 시기의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본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곤 한다.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 담론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나,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결코 쉬울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이 가지는 대안적 측면이 과연 무엇이고 여기서 담론 내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은 없는지, 실제 대안 프로그램으로 적용됐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은 없는지, 아울러 경제 담론으로서 경제 외적인 영역들을 얼마나 포괄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질문들은 비교적 까다로운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은 어떠한 이론적 곤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2) 지배 내 구조라는 은폐된 논점

먼저 사회적 경제 담론이 대안적 교환양식으로 추인받게 된 역사적 궤적을 따라 가보자. 사회적 경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목적을 가진 경제활동’을 포괄하지만, 때로는 제3섹터나 비영리부문 같은 용어들과 혼용되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6) 그러나 사회적 경제에 관한 담론들은 19세기부터 있어 왔으며 1970년대 축적 위기와 더불어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제들과 더불어 정교화되고 있다. 애초에 사회적 경제는 △정치경제 논리를 대체하기 위해 경제의 사회적 속성을 해명하고자 시도됐던 이론적 작업, △분배 문제 등과 같은 경제적 정의 실현에 관한 포괄적 프로젝트, △당대의 사회적 위험에 결사체주의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경제적 사회적 운동 등으로 (서로가 무관하지만은 않았던) 여러 뿌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세 가지 전통이 혼융되어 현행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7)

20세기를 거치면서 대안적 실천으로서 사회적 경제는 공제조합, 농업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등의 지류들로 현실화됐다. 이들 협동조합이 영리적 관심의 부차화를 비롯해 공동출자, 공동목표, 공동책임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조직과 다른 형태를 가진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노동계급이 직접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등 착취 메커니즘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결사체(association) 조직들이 대안적인 생산양식으로서의 속성을 가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적 경제가 내포하는 가능성의 조건들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물론 케인스주의 이래로 국가가 주도하는 관리자본주의의 속성이 강화되면서 사회적 경제 영역이 일정 부분 제도화되거나 주변화되는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1970년대 대량생산체계에 위기가 닥치고 복지국가 위기론이 격화됨으로써 사회적 경제 부문이 재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수순에 가까웠다. 1977년 데로쉬가 ‘사회적 경제 기업’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이래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운동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소비 등등으로 구축된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 담론은 ‘국가의 실패’ 및 ‘시장의 실패’ 이후로 상상가능한 대안의 최대한도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사회적 경제 부문이 가지는 불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고려해보도록 하자. 사실 초기의 협동조합 운동 역사에서도 이에 대한 비관적 전망은 줄기차게 제기된 바 있었다. 특히, 사회적 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생산관계에서의 대안적 가능성이 점쳐져야 하는데, 다른 협동조합 조직들에 비해 (몬드라곤 같이 다소 신화화된 몇몇을 제외한다면) 대다수 노동자협동조합들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 조직이 조합원들의 배타적 소유 경향 때문에 관료제적 위계질서에 빠짐으로써 결국에는 자본주의적 조직으로 퇴행하기 십상이고(조직 자체의 문제), 나아가 조직 내 민주적 질서를 확립했다 하더라도 비조합원이나 다른 조직들에 대해서는 소집단 이기주의 경향을 내비치며(조직들간의 문제), 궁극적으로는 조직 규모 자체가 영리 기업에 비해 약소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로 확산될 만한 생산양식으로 보기 어렵다(전체 경제와의 문제)는 문제들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마르크스가 ‘경제적 관계의 무언의 강제’라고 말했던 것을 사회적 경제에 대해서도 중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나아가 다수의 집합적 시민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생산의 자연법칙’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 부문이 (특히 협동조합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협동 사회라는, 복지를 동반한 공화적 제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 즉 사회의 전반적 조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8) 실제 역사에서도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공제조합과 노동자협동조합은 사회보장 체계 내로 통합됐고, 신용협동조합과 농업협동조합은 소규모 투자에 국한됐으며, 소비자협동조합 등은 단순 경제조직으로만 명맥을 유지했다. 사실상 ‘사회의 기술적 관리자’로 전락한 것이다.9)

사회적 경제 담론의 생산자들은 사회적 경제의 역사적 문제들에 대해 다소 기계적인 방식으로 논점을 끌어내는 데 치중해왔다. 이를테면 과거의 협동조합에 관해선 △노동자의 지위에 존엄을 부여하는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 △노동자 개인이나 경영진이 효과적 경영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 △조합원 자격을 제한하거나 하면서 소규모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성공하더라도 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해산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자본조달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 △생산방법과 시장거래에 있어서 보수적인 경향이 있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곤 한다.10) 이러한 논점들은 사회적 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원인들이라기보다는 문제점 그 자체를 재기술한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협동조합에 대한 마르크스의 역사적 평가 자체보다는 ‘무언의 강제’라는 그의 설정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설정에는 교환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대면적 관계에 더하여 외재적인 제3의 관계가 작용하는데, 이는 체계에 대한 반작용적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개조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재생산하게끔 하는 지점으로서 지배 내 구조(structure in dominance)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끔 한다. 요컨대, 사회적 경제가 왜 역사적으로 패착을 보였는가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라는 대안적 운동이 어떻게 해서 경제와 사회를 관리하는 데 기여했는지가 더 중요한 논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은 ‘기술적 관리자’의 지위를 벗어나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경제라는 교환양식에 있어서, 경제 자체가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전반적 조건들로서 이데올로기나 국가 등과 같은 논점들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두 가지 이상 징후

(1) 담론과 그 효과: 접합과 배제

최근 사회적 경제 담론들 중 일부는 대안으로서의 전거를 들기 위해 폴라니를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폴라니의 대안적 경제 모델은 경제라는 언어에 필요 충족에 초점을 둔 ‘실체적 정의’와 비용 편익 달성에 초점을 둔 ‘형식적 정의’가 중첩되어 있음에 착목하면서, 시민사회의 실체적 경제로써 시장의 형식적 경제를 인간화하고 제어하는 것을 기본원리로 삼는다.11) 따라서 폴라니로부터 아이디어를 추출하고자 하는 사회적 경제 담론들은 전자의 ‘살림살이 경제’를 후자의 ‘돈벌이 경제’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나아가 돈벌이 경제 원리를 살림살이 경제 원리로써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 등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삼곤 한다.


<표 2>12)에서 보는 것처럼, 이때 ‘실체적 경제’란 등가적 교환이 아니라 상호성과 재분배에 기초한 선물 교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제적 동기를 정치 사회적 동기에 착근시키며, 국가에 복종하는 신민도 아니고 시장에서의 원리적 이익추구자도 아닌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이 모델 자체만으로 사회적 경제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선진자본주의 맥락에서는 이와 같은 호혜적 경제 체계를 (경제인류학적인 관심사를 넘어서) 국가-시장-시민사회 간의 ‘규범적 균형’을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 담론의 ‘현대화된’ 설정은 정당화 기제로서 사회적 목적, 주체 설정으로서 이해당사자들의 사회적 소유, 타당성 논리로서 호혜와 연대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 등등의 논리들로 확장되고 정교화되기에 이른다.13)
사회적 경제 담론과 폴라니의 논의를 결부시키는 시도들은 사회를 기업 형식으로 대체하는 것에 반대하고 시장경제를 사회 속에 재착근화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부여받곤 한다. 그러나 그 순수한 의도와 달리 여기에도 일정한 난점이 존재하게 된다. 먼저 폴라니의 실체적 경제학 자체만으로는 사회적 경제라는 대안적 교환양식이 시장 제도와 양립을 추구하는 것처럼 인식될 여지가 있다.14) 사회적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보완재라는 소극적 관점이 아니라 대체재라는 적극적 관점을 유지하는 한, 폴라니의 논의, 그 중에서도 실체적 경제는 하나의 참조점일 뿐이지 그 자체로 ‘해답’이 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폴라니의 사회의 자기 방어 운동 명제는 뉴딜을 비롯한 역사적 사례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적 경제에 있어서도 일정 정도 기시감을 부여할 수도 있다. 특히 사회적 경제 담론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의 형식들 이후에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폴라니 수용에 있어서 제기되는 의문점들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볼 만하다.

첫째, 선물 경제 원리 같은 것들이 오늘날에 적용됐을 때 중요한 점은 원리 자체가 아니라 그 원리가 어떻게 굴절되느냐 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의 모체로서 시민사회가 국가나 시장과 맺는 체계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진 탓에 오히려 그로 인해 촉발될 문제들이 더 많을 수도 있으며, 시민사회 자체도 순수한 결정체가 아닌 이상 우리는 더 많은 이론적 논점들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고려사항들은 실체적 경제 자체를 이상화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이유에 해당한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사회적 경제에 관한 일반이론이 아니라 이것을 급진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문제는 폴라니 자신에 있다기보다는 최근 들어 폴라니의 도덕경제론이 유통되는 맥락과 관계되어 있다. 예컨대 폴라니는 좋은 자유와 나쁜 자유를 구분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상, 표현, 결사, 집회, 선택의 자유 등은 19세기 정치경제학의 산물로서 작동한 것이지만 동시에 ‘악한’ 자유들을 생산하기도 했다.15) 그렇기에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깔끔하게 분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 얻는 자유와 새로 잃는 자유의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뿐이다.”16) 이는 자유 개념이 근본적으로 경합적임을 함의하는 주장으로서, 자유뿐만 아니라 실체적 경제 역시도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 관계들에 의해 현실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사회적 경제 담론에 있어서도 관건이 되는 것은 이 담론이 현실화되는 정치적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실체적 경제라는 관념 자체는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폴라니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보편적 상수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최근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폴라니는 이론적 교리로서만 등장할 뿐, 그 자신이 토로했던 현실적 곤궁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둘째, 경제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폴라니에게는 빈곤 구제라는 쟁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자기 방어 운동이 불가피성으로서 인식된다.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시작하여 경제가 재착근됨으로써 자유방임주의가 후퇴했던 시기들(사회적 자유주의의 시기)을 돌아보건대 경제가 완전히 탈착근된 자기조정적 시장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논지를 최근으로 옮겨와서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적 경제에 맞물려 추론을 해보더라도 유사한 설명 구도가 형성된다. 사회 또는 사회적인 것을 우회하는 어떠한 통치나 지배도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인 셈이다. 바로 이때 폴라니에게 사회적인 것은 관계의 형식으로서 사회성의 측면(socius)보다는 공동체주의적인 가치가 응집된 사회부조의 측면(societas)으로 집중된다. 이는 사회적인 것이 이론적 대상이거나 정치적 구성물이 아니라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일종의 당위적 원리로서 이해된다는 점을 함의한다.

전술했듯이 폴라니의 논지에서는 실체적 경제나 사회적인 것이 보편적 ‘상수’로 배치되며 그 자체가 모든 문제의 해답으로서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서로 연관된 두 가지 논점이 따라붙게 된다. 첫째, 사회적인 것이 상수가 아니라 ‘변수’라면 어떻겠는가. 사회적인 것을 상수로 상정하는 문제설정에서는 인간주의적 서사를 통해 순수한 시민이라는 형상과 다소간 낭만화된 시민사회라는 영역이 전제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서사들이 종종 들어맞지 않기 일쑤이며 오히려 지배적인 주체 형상과 활동 공간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게 해준다. 둘째, 사회적 경제를 비롯하여 최근 제기되고 있는 공동체 논리가 신자유주의와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면 또 어떻겠는가. 이를테면 푸코주의식으로 착근된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이것은 ‘국가의 통치화’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착근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역시도 통치의 이상적 영토를 자율과 책임성의 테크놀로지로부터 공동체의 테크놀로지로 찾아가는 과정일 수 있다.17)

이러한 문제점은 사회적 경제라는 하나의 이념적 모델을 실제 세계에 적용했을 때 ‘담론의 헤게모니적 접합’이라는 쟁점이 제기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해서 다른 생산양식을 자신의 (확대)재생산에 끌어들이면서 스스로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되는지에 관한 문제18)와도 연결되는데,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가 시장경제를 재착근화하더라도 그 불안정성 때문에 사회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힘, 즉 정치 없이는 그 어떤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쟁점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일례로 1930~50년대 독일에서 탄생했던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형용사는 경제에서는 (등가적 교환을 넘어) 효율적 경쟁의 원리를, 사회보장에서는 (연대가 아니라) 자기 책임과 국가 보조의 원리를 도입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19) 요컨대 특정한 정치적 조건 하에서는 사회적인 것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경제적인 것을 더욱 급진화하는 역설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설정이 없을 경우 사회적 경제 담론이 물화될 수도 있다는 쟁점도 만나게 되는 셈이다. ‘사회적’이라는 언어는 논란의 종결자가 아니라 논란의 생산자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담론의 접합 과정에서 특정한 효과가 수반되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경제가 보통 도덕적이고 순수하며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데, 실제 결과도 그러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전술했던 것처럼 사회적 경제 담론은 배제의 문제에 대응하는 취지를 가지는데 이는 사회적 경제의 문제설정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포섭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포섭의 시도가 기술적으로 완전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의문을 품어본다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배제된 자들을 문자 그대로 모두 포용하는 데 성공한다고 낙관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배제의 영역이 재산출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예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들에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협동조합운동들이 부침을 겪는 가운데 몬드라곤이 가장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스크 특수주의가 있었다.20) 이러한 조건은 자본주의적 기업의 일반적 관행이라는 외적 압력 속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방지하고 조합원의 이탈을 막을 수 있었던 구심점 구실을 했다. 문제는 몬드라곤이 세계화하는 방향으로 발전 궤도를 그리면서 나타나고 있다. 현지의 자본주의 기업들을 인수해 자회사로 전환시키면서 이제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은 절반 이상을 비조합원으로서 일반 피고용자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유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몬드라곤 회원들은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신뢰하기 어렵고 게으르며 성공적인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동기를 결여했다”고 판단하고, “자회사들 내의 조합들에 대해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오고 있다.21)

둘째, 사회책임투자 부문은 투자 포트폴리오에 오른 사회책임경영 기업이나 협동조합들에 자금 순환을 가능케 해주는데 이러한 구도는 자못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과거의 국민적-사회적 국가 형태에서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사회책임투자라는 관행은 사회부조에 쓰이는 자금들이 주로 시장-시민사회의 회로에서 순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사회적 권리의 요구와 행사에 있어서 새로운 위계가 발생하게 됨을 적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시민 개인이 사회보장을 요구하기 위해선 그 자신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투자자가 되지 않고서는 권리 요구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재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사회적인 것에 관한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성원권(membership)이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라 투자자에게만 주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22) 어쩌면 이것은 외부불경제의 내부화를 통해 역설적으로 (축적 조건의 재생산을 자기 스스로 관장하는) 자기조정적 시장의 신화가 관철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23)

이러한 양상들은 사회적 경제가 배제의 현실적 조건들에 대응하여 사회적 포섭에 성공적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배제의 분할선을 새롭게 획정해가는 측면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이 나타내는 공동체 효과가 결과적으로는 배제의 새로운 수준을 동반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을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는 하나의 해결책에 머무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하는 측면이 있다. 사회적 경제에 관한 일반이론이 강조될수록, 문제가 해결된다기보다는 지배 내 구조의 힘에 의해 오히려 과잉결정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2) 제도와 그 효과: 동형화와 물화

실제에 비해 담론적 과잉이 나타나는 현상은 이 새로운 교환양식이 지역과 계급 등을 초월해서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고용 창출과 사회적 서비스 수요에 대응하고자 하는 국가, 지속가능성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아 장기수익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시장, 빈곤과 비인간화의 위협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시민사회 등의 삼자적 이해관계가 사회적 경제라는 언어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건은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거친 이래로 오늘날 사회적 경제 담론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중반 무렵의 사회적 경제 담론과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실제로 (주체의 차원에서) 19세기의 사회적 경제 담론이 노동자들의 집합적 대응 전략으로 제기되었던 데 반해,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 담론은 주로 시민사회 차원에서 제기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해당 시대별 담론이 무엇을 표적으로 삼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의제의 차원에서) 19세기의 문제가 자본주의 산업화와 시장경제라는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의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실업과 복지 후퇴라는 좀 더 좁은 범위로 초점화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래서 (형태의 차원에서) 과거의 사회적 경제 부문이 국가나 시장과 무관한 성격으로 오늘날 말하는 제3섹터로서의 순수형에 가까웠다면, 최근에는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공조체계로서 상대적으로 혼합형에 가깝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러한 공조 형태를 일컬어 ‘제4섹터’ 또는 ‘창발적 제4섹터’(the emerging fourth sector)라고 개념화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사회적 기업가, 펀드 가입자, 비영리부문 종사자, 경영인, 피고용인, 일반 대중, 결사체 회원, 정책입안자, 학자, 법률가, 회계사, 컨설턴트 등등이 참여하고 각자의 이득을 취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그동안 국가-시장-시민사회 등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이제 공동의 언어와 전망을 필요조건으로 여기고 공동 작업(collaboration)을 충분조건으로 삼는다.24)

‘사회 같은 것은 없다’던 영국 보수당에서 ‘큰 사회’(big society)라는 선거 모토를 들고 나왔던 것처럼, ‘실용’과 ‘성장’을 외치던 한국 여당에서 ‘공정 사회’와 ‘경제민주화’ 같은 말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배-피지배의 논리에서 보자면, 국가와 시장을 제외했던 과거의 사회적 경제는 지배질서에 있어 원리상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사회적 경제는 어렵지 않게 관리될 수 있는,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로 포섭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큰 사회와 경제민주화가 과거와 같이 국가가 아니라 사회적 기업 같은 것들을 통해서 충족된다는 논리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25)

사실상 거버넌스 형태에 가까운 사회적 경제 부문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제약조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논점이 바로 신제도주의 등에서 언급하곤 하는 ‘제도적 동형화’(institutional isomorphism)26)라고 하는 일종의 동질화 현상이다. 사회적 기업이 됐든 협동조합이 됐든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육성과 진흥이라는 맥락에 위치되는 이상 정부와 기업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자원을 통제하는 측으로부터 나오는 특정한 규범과 요구사항을 따라야 하는 고충을 겪게 된다. 실제로 사회운동 차원에서 사회적 기업 등에 몸담았던 종사자들이 자신이 활동가인지 피고용자인지 그리고 조직형태가 비영리조직인지 영리기업인지 혼동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와 맞닿아 있다.27)
물론 그 과정은 타율적 강제나 막연한 모방 또는 자체적 규범화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개된다. 이를테면 대다수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사회적 기업 육성법」(2007)이나 「협동조합 기본법」(2012) 같은 법률에 의해 동기화되고 정부 기관이나 기업 부서에 활동 결과를 계량화해서 성과 보고해야 하는 사정들을 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관료제적 관습이나 영리기업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해야만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강제적 동형화). 또한 사회적 경제가 일종의 붐처럼 확산되고 있는 이상 신생 기업이나 조합의 경우 조직의 목적이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이 일반적인데, 이때 기존에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기업이나 조합을 모델로 삼으면서 자기 조직의 전망을 설정하는 사례들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모방적 동형화). 뿐만 아니라 (중간)관리자나 조합원들이 각종 전문가 집단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동질화되는 직간접적 경로가 될 수 있다. 실제 종사자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어 학습과 내면화만큼 빠른 지름길은 없기 때문이다(규범적 동형화).28)

그리고 우리는 동형화 과정(특히 모방적 동형화 과정)에서 과연 무엇이 패턴 설정자(pattern setter) 역할을 하느냐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패턴 설정자가 생산 소비 분배를 아울러 대안으로서의 적합성을 가진다면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도 일정 정도 출구를 모색할 길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추진되는 사회적 경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한국이 2000년경에야 사회적 국가 형태를 경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29) 제3의 길로서 사회적 기업 등과 같은 서구 사회의 포스트복지 담론을 모델로 삼는 것은 다소간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이를테면) 베네수엘라의 국유화나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자주관리 같은 사례들은 구조적으로 삭제되고, 대리운전 협동조합이나 동네슈퍼 협동조합 등이 모범적 사례로 추인되는 것이 보통이다.30) 이와 같은 경향은 두 가지 쟁점을 내포하는데, 하나는 사회적 경제 내에서 생산관계의 변혁과 같은 정치적 쟁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의 패착을 예외로 한다면) 국가의 실패를 채 경험하기도 전에 위기관리와 발전의 전망에서 국가의 자리를 지워버리거나 후퇴시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적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의 경험은 서구의 표준화된 경험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한국의 국가 형태는 주지의 사실처럼 (사회)보장보다는 (사회)동원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이러한 역사는 복지의 문제를 공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기보다는 개인이나 가족 같은 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 쪽으로 수렴시켰던 게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로 권위가 집중되는 풍토가 지속되는 등, 서구 사회에 비해 국가권력이 시장권력이나 사회권력에 대해 비대칭적이라는 점 역시 제기될 수 있다. 결국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에서는 사회적 경제에 관한 담론과 현실이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어떤 경우에는 현실이 담론을 견인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담론에 이끌려 다니고 때로는 경합하는 담론들에 치여 기형적인 형태로 창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요소는 국가, 시장, 시민사회에 고루 산포해 있다.

국가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하여금 정부 지원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이 문제는 제4섹터와 같은 아이디어를 통해 얼마간 봉합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사회적 기업 육성법」이나 「협동조합 기본법」 제정 이전에 자생적으로 존립해왔던 몇몇 조직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고용창출이나 사회서비스 수요 충족 등과 같은 지배의 기술에 종속되게끔 하는 경로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기존의 조직들마저도 지원 혜택을 위해 기관들로부터 ‘인증’을 받고자 하는 경우에는 관료제적 병폐와 성과지상주의로 인해 대안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전망이 소원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현장에서 ‘나라가 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푸념이 종종 들리는 것도 이러한 문제점들과 무관하지 않다.

시장의 경우에도 사회적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과서적 기술 내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보통은 지속가능성과 장기수익성을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을 언급한다고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들이 사회사업팀이나 사회공헌팀을 운영하는 경우는 내부적으로 기업의 이미지 제고 전략과 맞물려 있거나 외부적으로는 ISO 2600031) 같은 국제 규제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마저도 관리자나 실무자들의 경우 CSR을 생산활동, 고용창출, 세금납부 등에 국한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팽배하고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반기업 정서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이는 경향32)이 작지 않아서 ‘규범적 균형’으로서의 사회적 경제라는 이념형과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요컨대 (당연한 귀결일 수 있겠지만) 영리기업들에 있어서 사회적 경제 부문은 그들 자신이 ‘제4섹터’에 참여를 하더라도 대안이 아니라 부차화된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시민사회 차원에서 발견될 수 있는 취약성은 첫째로 정치운동과 경제전략, 즉 체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 안에서 적응해야만 하는 제약조건 사이에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는 게 원만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개인과 조직의 존립 및 유지를 위해 제도적 동형화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역설은 비교적 예상가능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흔히 말하는 ‘대중들의 의식 문제’도 중대한 장벽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서 생산품을 만들어도 그에 걸맞은 적정 소비가 이뤄져야 하는데, 사회적 경제 담론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거나 관련 정보가 아예 부재한 경우들이 많아 경제적, 사회적 생태계 자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33) 마지막으로, 사회적 기업 종사자들이나 협동조합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경제를 둘러싸고 세대간 온도차가 존재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것을 청년 세대들이 상대적으로 정치적 관심이 적어서 생기는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사회적 기업에 신규 채용되는 경우 조직의 기존 목표를 공유하지 못한다거나 직접 창업하는 경우에는 대안적 가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문제들이 발생하곤 한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들을 집약했던 것이 ‘소셜 벤처’와 같은 사례였다. 이 말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사회적 경제 조직 그리고 창업을 통한 고용 창출이라는 시장경제 전략이 극적으로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물론 2012년 들어 사회적 경제 조직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사회적 기업에서 협동조합으로 이전되고 말 자체의 넌센스가 널리 공유되면서 전보다 덜 언급되긴 하지만, 이 말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의 벤처 열풍과 2000년대 말 지구적 금융위기 즈음의 사회적 기업 열풍 사이에 묘한 근친성이 있음을 내포한다. 즉, 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국가, 이윤 창출의 사회적 토대 및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장, 경제적 성공 내지는 생존을 희구하는 시민사회 등의 삼각구도 속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주재료가 창의성에서 사회성으로 바뀌었고 동력이 성공에서 생존으로 조정됐다는 정도일 뿐이다.

소략하자면, 사회적 경제에는 제도적 동형화의 위험이 뒤따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전례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접합되느냐에 따라 물화의 위험34)도 수반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근래 들어 사회적 기업이 아니라 협동조합이 강조되는 추세에 접어든 게 사실이지만, 협동조합 체계 역시도 제도적 동형화와 더불어 담론의 헤게모니적 접합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적 관계의 무언의 강제를 돌파할 수 있는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라는 고전적 질문의 테두리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는 셈이 된다.


3. 사회적 경제라는 가상의 함의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 종종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로부터 달아난 덕분에 외려 자본주의가 공고해지고, 내쫓은 신자유주의가 뒷문으로 슬쩍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답이 제출되는 순간 그와 동시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또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던지곤 한다. 비판가들의 분석에 얼마간 동의하면서도 가끔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사회적 경제에 관련하여 그런 혼란이 생겼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라는 형용사가 가진 어떤 신비함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적인 것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무언가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문제 삼고 넘어서야 할 대상일 텐데, 우리들은 종종 이 언어가 전도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그 자체로 물신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사회적 경제 담론에 빠져 있는 근본적 공백 두 가지와도 관련된다. 하나는 정치라는 쟁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라는 쟁점이다.

사회적 경제 담론의 인상적 특징은 다분히 당위적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 = 윤리적인 것 =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간혹은 그 자체로 성장과 분배의 완결적 구조를 가진 일반이론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도 이러한 정당화 논리를 강화하곤 한다. 사회적인 한 그것이 정답이라는 이론적 독단에 의해, 정치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인 것의 탄생이 “진보에 대한 믿음을 대체”해버리고 결과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을 사회적인 것과 경제의 대립으로 전위”시켰던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을 재연하는 것 같기도 하다.35) 예컨대 현실에서는 국가권력이 문제적이라 토로하면서도 담론에서는 국가를 협상의 대상으로 중성화하는 관습은 사회적 경제 담론이 국가와 자본의 동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 담론은 시민사회 영역을 다소간 낭만화하는 문제들로 이어지게 된다. 경제에서 시민사회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논지는 그 바탕에 시민사회의 주체들이 ‘순수성을 담지하고 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옳으며 종국에는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부당전제를 깔고 있다. 사회적 경제 담론이 경제학 담론으로서 주체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체계에 대한 대안운동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라면 사정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경제적 관계를 바꿔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재생산을 추동하는 이데올로기와 주체화양식의 뇌관을 건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 담론 내에서 징후적으로라도 주체에 관한 문제설정을 독해해낸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호혜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 인간’이나 ‘그들의 교류관계’ 정도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가 자기-동일성을 확보한 평등한 존재들의 2자관계로 수렴되고 현대사회가 이들의 ‘네트워크’ 내지 ‘직조’(fabric)로 구상되는 한, 착취와 배제를 양산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지배 내로의 구조’(structure in dominance)에 관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대안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소망과 달리 현실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는 전혀 대칭적인 영역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구체적 개인들이 계급 젠더 민족 인종 등을 초월해서 서로가 평등하다고 상정될 수 있는 보편적 조건이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결을 달리 하긴 하지만 ‘제3항’이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나타나는 정치의 공백과 이데올로기의 공백은 사실상 동일하다. 여기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이론적 문제설정을 구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경제는 담론의 헤게모니적 접합과 제도적 동형화의 막다른 길에서 별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듯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정확히 바로 그 의미에서 사회적 경제는 반(反)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학적 가상이 가지는 이론적 함의들에 대해 정리해보자. 이 문제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는 교환양식의 가상으로서 사회적 경제가 필연적으로 주체화를 비롯한 교류양식에서도 어떤 새로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사회적 경제가 신자유주의의 대체제인지 보완재인지 살펴봐야 하고 아울러 지구적 수준뿐만 아니라 한국적 이례성에 대한 논점들도 기입해야 한다는 점이며, 셋째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문제에서 은폐되어 있는 혹은 과소결정된(under-determined)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사회적 경제가 교환양식으로서만 제기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파생한 사회적 삶의 위기를 해소 내지 유예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지하듯이 오늘날의 위기는 축적의 위기뿐만 아니라 동일화의 위기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상징이나 주체화 같은 교류양식의 문제설정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몬드라곤의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난 외국인 차별 문제는 함의하는 바가 결코 가볍지 않다. 조합원 자격이 국민 또는 종족민에게만 제공되고 비국민은 피고용 노동자로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 경제 프로그램만으로는 배제의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6) 그런 점에서 기존의 고용관계와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횡적 동일화 메커니즘에 대한 접근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회적 경제를 보충할 수 있는 동일화 메커니즘의 자리에 윤리적 시민성에 바탕을 둔 소셜 네트워크 담론 정도가 선택적 친화성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이는 사회적 경제 담론과 소셜 네트워크 담론이 내포하는 형식적 상동성에 근거한다. 앞서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 국가의 자리가 (부재 혹은) 후퇴해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와 유사한 양상이 소셜 네트워크 담론의 원리에서도 재연된다. 자원봉사, 재능기부, 소셜 미디어, 소시오메트리, 관계미학 등 오늘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담론과 관행에서 개인들은 평등하고 합리적인 주체들로 상정되고 그런 한도 내에서 관계의 네트워크가 상상된다. 이것은 시장과 시민사회 나아가 국가까지도 평등한 행위자로 간주하는 사회적 경제의 설정과 닮아 있다. 사회적 경제가 국가라는 제3의 매개를 부재 처리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역시도 횡적 동일화를 매개하는 자아-이상의 집합적 대상이나 대타자 없이 평등한 관계가 도출될 수 있다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관계의 메타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개별성(또는 상호주체성)에 기초한 2자관계로서 대안적인 교환양식과 교류양식을 입론한다는 것은 불평등, 억압, 배제 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나아가 그러한 문제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신기루’를 창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둘째, 적어도 현재의 사회적 경제에는 신자유주의의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의 측면이 나타난다. 일견 사회적 경제는 최소 국가보다는 국가가 포함된 공조체계를, 탈규제보다는 재규제를, 그리고 자기 책임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개별화보다는 전체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관행들에 대립각을 세우고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단절적이고 대체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고 보충적인 측면도 있다. 사회적 경제를 향한 상상에는 전자의 신자유주의적 원리들이 제거됐다기보다는 오히려 내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것을 통한 위기관리와 발전의 전망이 (흡사 제도주의에서 ‘경로의존성’이라 개념화했던 것처럼) 포스트 뉴딜 또는 포스트 복지의 국면 위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난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회적 경제 담론에서는 국가가 과잉통치한다든가 시장 특히 금융이 억제된다든가 하는 논점들이 관철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정치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중도좌파마저도 거둬들임으로써 헤게모니화했다는 점,37) 경제적으로는 마이크로 파이낸스 같은 사회적 자본의 대안적 관행마저도 국제적 금융 네트워크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는 점,38) 복지 차원에서는 사회안전망이 추구되기는 하지만 ‘통치의 탈국가화’에 조응하여 전문가 집단이 전면에 나서는 ‘국가의 준자율적 비정부조직화’(the quango-ization of the State; 즉, 특수법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39) 등이 지적된다. 따라서 과거에는 국가가 주도했던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순환이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후과(後果) 속에서 시민사회의 자조성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러한 논점은 사회적 경제의 담론과 관행이 나타나고 있는 한국적 맥락을 통해서도 징후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이례성은 사회적 경제의 시도가 사회적 국가의 경험이 없었던 바탕 위에서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 본격화와 (거의) 더불어 전개된다는 데 있다.40)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나 ‘MB노믹스 하의 공정사회’ 같은 레토릭들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넘어 특정한 실질성을 확보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국적 상황은 애초부터 신자유주의가 사회적인 것을 전제로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또는, 사회적 경제가 문자 그대로 사적, 경제적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물론 그 때의 사회적인 것이란 뉴딜식으로 국가를 매개로 연대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순환을 위해 결사체나 공동체와 연결된다는 전제 하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는 결국 정치라는 쟁점, 이를테면 국가와 이데올로기 같은 논점들을 내포한다. 사회적인 것의 기본 특징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어디로도 환원할 수 없는, 두 가지 영역이 융합하는 하이브리드한 이형적 영역”이고,41) 그 기원 역시도 공적 영역에 진출한 사적인 관심사로서 공적 영역에서 엄존했던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관심을 대체한 데서 찾을 수 있다면,42) 우리는 사회적인 것이 어떠한 구실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가 처음 출현했을 때 이것이 ‘정치적’ 경제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반대급부로서 제출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경제의 축자적 의미가 경제는 사회적이라는 데 있긴 하지만, 그 이면으로는 경제가 정치적인 것과 절연할 것을 요구하는 모종의 반(反)정치적 태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경제 담론이 (국가 그리고 자본과의 파트너십 형태로) 공공성 강화와 시민성 발현을 목적으로 삼고, 계급투쟁이나 배제와 같은 언어들을 간과한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닌 듯하다. 물론 패턴 설정자를 서유럽 모델에 두고도, 또한 ‘외부자들’을 불가피하게 남겨 놓더라도, 사회적인 것이 잘만 구축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홉스적 적대의 문제들은 효과적으로 감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 안에서조차 또는 사회적인 것 자체만으로는 적대라는 문제가 전소될 수 없음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인 것은 그 자체로 해답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사회적인 것이 경제와 대립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경제 담론은 그 대립을 지양하는 한편, 마치 그 자체로 정치와 대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상상’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정세에서 부상한 사회적 경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리-보충으로서 오히려 위기를 가중시킬지 모른다는 의심마저 사고 있다. 물론 국가라는 쟁점을 (기묘한) 방식으로 우회하는 한 대안적 교환양식으로서의 적합성도 불투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는 나쁜 것인가. 사회적인 것을 통한 위기관리와 발전의 전망은 나쁜 것인가. 물론 아직까지 우리는 전체적인 답을 내놓을 순 없다. 첫째로 사회적인 것 없이 정치를 구상하는 게 가능하겠는가라는 문제 때문이고, 둘째로는 (현장 상황에 비춰보자면) 짧은 역사로 인한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경합성 덕분에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는 그나마 개입의 공간이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결론은 한 가지다. 당분간 우리는 사회적 경제가 됐든 혹은 그 무엇이 됐든 사회적인 것 앞에서 이론적, 실천적 동요로부터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리란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이것 역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란 사실 때문이다.




1) 이 글은 『문화/과학』, 73호(봄호), 2013에 같은 제목으로 수록된 글을 많은 부분 수정보완했다. 필자는 오늘날 사회적인 것의 문제가 물질적인 교환양식과 정신적인 교류양식에서 동시적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번 글에서는 ‘사회적 경제’ 담론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교환양식에 집중하고자 하며 교류양식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지면을 통해 논의하고자 한다.
2) <한겨레>, “새정부·민간 함께 ‘사회적경제 펀드’ 조성해야”, 2013년 1월 2일자.
3) Bob Jessop, “Critical Semiotic and Cultural Political Economy”, Critical Discourse Studies Vol. 1, No. 2, October 2004, 159 174쪽.
4) 같은 글, 169쪽.
5) 이에 대해서는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를 참조하라.
6) 장원봉, 「사회적 경제의 대안적 개념화: 쟁점과 과제」, 『시민사회와 NGO』, 5권, 2호, 2007. 이하에서 사회적 경제에 관한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물론 필자 본인의 것이지만, 역사기술 자체는 많은 부분 장원봉의 논문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7) 이러한 전통들이 최근 들어 사회적 경제를 구상하는 상상력의 원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라투르를 필두로 하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에서 결사체주의의 이론적 원형으로서 (뒤르켐과 대립하고 사실상 패배했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로 복귀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이는 것 역시, 현존해왔던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초기 ‘결사체’주의 전통을 일종의 ‘오래된 미래’로 간주하고자 하는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최근 젊은 연구자들을 위시로 해서 생시몽이나 오언을 다시 보고자 하는 시도들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8) 칼 마르크스, 「임시중앙평의회 대의원에게 보내는 개별적 문제에 관한 지침」, 김성한 옮김, 『맑스·엥겔스의 농업론』, 아침, 1990, 159~160쪽. 이에 덧붙여 마르크스는 △경제제도 표면에 저항하는 소비 협동조합보다는 이 제도의 토대를 공격하는 생산 협동조합에 열중할 것, △총수입의 일부를 기금으로 돌려 새로운 협동조합의 설립을 촉진하고 그 취지를 널리 알릴 것, △흔한 부르주아 주식회사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는 주주든 아니든 평등한 분배를 받을 것 등을 협동조합 노동의 원칙으로 삼았다.
9) 장원봉, 앞의 글, 15쪽.
10) 존스턴 버챌, 장종익 옮김, 『21세기의 대안 협동조합 운동』, 들녘, 2003, 46~47쪽.
11) 홍기빈, 「옮긴이 해제: 시장경제 유토피아와 사회의 발견」,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거대한 전환』, 길, 2009, 629~630쪽.
12) 홍기빈, 「칼 폴라니와 한국에서의 사회적 경제」, 『새롭게 다르게』, 창간호, 2011의 내용을 요약 정리함.
13)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목적, 사회적 소유 그리고 사회적 자본을 구성요소로 해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 장원봉, 앞의 글, 27쪽.
14) 이상우, 「우석훈과 사회적 경제」, 『마르크스 21』, 3호, 2009년 가을호, 296쪽.
15) “다른 동료들을 착취할 자유, 공동체에 덜 기여하고도 과도한 이득을 취할 자유, 공적 이득에 사용될 것으로부터 기술적 혁신을 영위할 자유, 교묘한 획책을 부려 공적 재난으로부터 사적 이익을 취할 자유” 등이 그것이다.. Karl Polanyi, “Our Obsolete Market Mentality”(1947), in: George Dalton(ed.), Primitive, Archaic and Modern Economies: Essays of Karl Polanyi, Boston: Beacon Press, 1968, pp. 74-5.
16) 칼 폴라니, 홍기빈 옮김, 앞의 책, 594-5쪽.
17) Nicolas Rose, “The Death of the Social? Re-figuring the Territory of Government”, in: Economy and Society, vol. 25(3), 1996.
18) 그런 의미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 사이에서 규범적 균형을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더라도 “자본주의적 권력이 자신의 내재적 경향에 따라 경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결사체적 권력을 침식하게 되어, 결국 자본주의가 다시 뚜렷하게 지배적으로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릭 올린 라이트, 권화현 옮김, 『리얼 유토피아』, 들녘, 2012, 188쪽.
19)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그에 대한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던 질서자유주의에 관해선 미셸 푸코, 심세광 옮김,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를 참조하라.
20) 버챌, 앞의 책.
21) 라이트, 앞의 책. 344쪽.
22) 김성윤,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 사회자본론, CSR, 자원봉사활동 담론들의 접합」, 『진보평론』, 48호, 2011.
23) Geoffrey M. Heal,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 An Economic and Financial Framework”, in: The Geneva Papers on Risk and Insurance - Issues and Practice, vol. 30(3), 2005.
24) Heerad Sabeti, “The Emerging Fourth Sector: Executive Summary”, http://www.fourthsector.net (2013년 1월 12일 검색).
25) 물론 현재 한국에서 중앙정부와 도시정부에 따라 약간의 온도차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고용노동부가 사회적 기업을 주로 일자리 창출의 목적으로 지원하는 데 반해, 서울시의 경우엔 그에 더하여 윤리적 시민성과 시민복지를 도모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시민들의 요구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간과하고 사회적인 것만 반영하고자 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정치적이기도 하다.
26) 동형화는 “어떤 단위체가 같은 환경조건에 직면한 단위체를 닮아가게 하는 제약 과정”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제도적 동형화라 함은 “조직들이 자원과 고객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제도적 정당성, 즉 경제적 적합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적합성을 놓고 경쟁”을 하는 맥락에서 나타나는 동질화 양상을 가리킨다. Paul J. DiMaggio and Walter Powell, “The Iron Cage Revisited: Institutional Isomorphism and Collective Rationality in Organizational Field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ume 48, Issue 2, April 1983, 149쪽.
27) “사회적 기업의 경우 비자본주의적·반자본주의적 입장들이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 같은 인상과 정부가 인증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제도화해 간 과정이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김병기, 「사회적 경제에 대한 토론문」, 한국사회포럼 기획토론 발표문, 2009년 8월 27일(이상우, 앞의 글, 301쪽에서 재인용).
28) 그들은 이러저러한 과정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경제, 혹은 사회적인 것과 기업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원리적 모순들을 거의 체념조로 봉합하게 된다. ‘사회적 기업도 어차피 기업이잖아’, ‘계속 지원을 받으려면 수치화할 수밖에 없어’, ‘(사회적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원래 이런 거구나’,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게 있는 법이야’ 등등. 그런데도 오늘날 사회적 경제의 환경조건들은 별다른 문제해결의 기미 없이 조직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정부나 영리기업과의 파트너십 구조를 재촉하는 실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경험적 연구를 진행 중이다.
29) 이 당시 한국은 ① 5%에 이르는 공적 사회 지출을 기록했고(이는 서구 국가들과 달리 복지 지출이 증가한 결과였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② 1995~8년 고용보험 도입과 확대 그리고 2005~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으로써 포괄적인 사회보험제도의 골격이 갖춰졌으며, ③ 2000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시행됨으로써 복지정책에서 시민권, 사회권 성격이 강화되었다.
30) <한겨레>, “대리운전자도 동네슈퍼도 “협동조합으로 양극화 막자””, 2012년 11월 30일자.
31) ISO 26000은 사회적 책임 개념과 원칙에 있어 조직 거버넌스, 인권, 노동관행, 환경, 공정 운영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와 발전이라는 7대 핵심 주제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이 국제인증은 40여개 국가의 기술 규정과 소비자 평가 기준으로 활용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미국 등에서 ISO 26000 인증 마크 부착 제품만 수입하겠다고 공시하는 등 사실상의 무역장벽으로 작동할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2년 8월부터 고시, 보급하고 있다.
32) 임항, 「지금 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인가」, 이장원 엮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 한국노동연구원, 2008.
33) 최근에는 서울시에서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협동조합 상품에 대한 공공구매 물량을 늘리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에는 거꾸로 생산 단위에서 상품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제가 예상되기도 한다.
34) 이러한 경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Ben Fine, 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Pluto Press, 2010 참조.
35) 자크 동즐로, 주형일 옮김, 『사회보장의 발명』, 동문선, 2005, 141쪽.
36) “시장을 착근시키는 사회적, 정치적 배치는 프레임이 잘못 잡히면 또 다른 방식으로도 억압적일 수 있다. 미스프레이밍이란 착근된 시장이라는 보통은 민족적 범위와 인민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종종은 초민족적 범위 사이의 부조화를 두고 내가 만든 신조어이다. 미스프레이밍의 억압은 [사회] 보호의 배치들이 시장의 부정적 효과들을 “외부자들”에게로 외재화할 때 나타나는데, 이는 부당하게도 위험에 노출된 인민들 중 일부를 배제하는 한편 타자들을 보호하는 비용을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Nancy Fraser, “Marketization, Social Protection, Emancipation: Toward a Neo-Polanyan Conception of Capitalist Crisis”, in: Craig Calhoun and Georgi Derluguian(eds.), Business as Usual ― The Roots of the Global Financial Meltdown, the Social Science Research Coucil and New York University Press, p. 152.
37) Stephanie Lee Mudge, Precarious Progressivism: The Struggle Over the Social in the Neoliberal Era, ProQuest, 2007.
38) 김성현, 「국제금융기구와 빈곤 축소 프로그램」, 『경제와 사회』, 80호, 2008, 302-3쪽.
39) Nicolas Rose, 앞의 글, p. 350. 그리고 사카이 다카시, 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 그린비, 2011, 123-6쪽. 물론 이러한 양상은 흔히 제3의 길이라 일컬어지는 네오사민주의 또는 진보된(advanced) 자유주의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다.
40) 사회적 국가의 경험과 관련해서는 박정희 시기가 쟁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사회복지가 도입됐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국가 주도로 물질적 보장이 이뤄지지는 못했던 까닭에 표준적인 의미에서는 사회보장 국가라고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국민들 사이의 횡적 동일화를 통해서는 상징적 차원의 보장이 이뤄진 측면이 존재한다.
41) 사카이 다카시, 앞의 책, 93쪽.
42) 한나 아렌트, 이진우 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특히 2장 참조.


<참세상 주례토론회 안내>

“부자들의 사회주의, 가난한 자들의 자본주의”를 넘어

한국의 대기업 노동자들은 계급형성으로부터 <해체적 변형> 과정으로 진입한 것일까요? 현재 나타나고 있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대 행위의 쇠퇴와 사회적 폐쇄는 계급의 해체적 변형의 표현일까요?

다음 주례토론은 울산지역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인터뷰하고 현지 자료와 함께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조사 연구한 논문입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변화와 투쟁양상의 변화과정 속에서 오늘날 계급연대의 문제를 고민해 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IMF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노조운동과 노동계급의 변화
유형근(사회학 박사)
7월 23일(화) 오후 7시, 우리타워 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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