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돌잔치 장면이 생생히 기억난다는 사람

[팩트를 채우는 미디어비평] 두세 살 때 아버지가 군인을 훈련시키던 모습도 기억하는 윤치영 초대 내무장관

서울고법이 초대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이 1982년에 받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취소했다.

윤치영은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 2.8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192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으로 활동한 점이 인정돼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일본을 위해 태평양전쟁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회에 참석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해 논란이 됐다.

[출처: 경향신문 12일자 23면]

국가보훈처는 2010년 서훈 취소 심사위를 열어 2011년 국무회의와 대통령 결재를 거쳐 윤치영의 서훈을 취소시켰다. 유족들은 이에 반발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1심에선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 고등법원이 원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윤치영의 집안은 한국 최고의 가문이다. 윤치호가 윤치영의 사촌 형이고, 윤보선 대통령이 윤치영의 조카다. 윤일선 서울대 전 총장과, 윤치왕 육군 의무감, 윤치장 주영대사, 윤영선 농림부장관 등 그의 가문엔 쟁쟁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섭생도 바르게 해 군인으로 일찍 죽은 윤치성을 빼고는 대부분 100살 전후까지 살았다. 윤치영 역시 1898년에 태어나 1996년에 죽었으니 98살을 살았다. 이런 장수의 비결 때문에 윤치영은 자서전 제목도 <윤치영의 20세기>다. 제목 그대로 윤치영은 거의 20세기를 온전히 다 살다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집안은 일제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까지 한국 보수를 대변해왔다. 윤보선이 제2공화국 대통령을 지내 진보인양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만만의 콩떡’이다. 윤치영의 친일행각과 권력 해바라기는 굳이 남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다. 그의 자서전 <윤치영의 20세기>만 읽어도 쉽게 드러난다.

윤치영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이던 윤치성 형님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 소장에게 시달림을 받은 사실과 함께 나는 한말의 비극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기게 되었다. 비분강개하는 지사들의 모습을 형님들의 사랑채에서 수없이 목도했다.” 일제에 비분강개하던 윤치성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 군인이 돼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무려 5개나 받았다. 우리의 문서기록보존소에 해당하는 일본 공문서관엔 윤치성의 서훈기록과 공적 조서가 잘 드러나 있다.

윤치영의 자서전에서 가장 엽기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나의 돌잔치가 생생하게 아직도 기억이 된다고 하면 아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지금도 그 당시의 일이 몇 가지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을 어쩌겠는가. (경기도) 안성 일대는 물론 기호 삼남지방에서 선정으로 이름 높았던 아버님의 막내아들(윤치영 자신) 돌잔치는 집안 식구들에게 한하도록 하여 조촐하게 치러졌다. 나는 두세 살 나이가 들면서부터 아버지가 거느리던 신식군대의 훈련 모습도 기억에 떠오르고 순교라 부르던 경찰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자신의 돌잔치가 생생하게 기억나고, 두세 살 때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윤치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친일의 비난을 자서전에서도 교묘하게 비튼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잡지에 기고한 전력에 대해서 윤치영은 이렇게 빠져나간다. “1940년대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지식인들을 동원해 승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을 여기저기 내걸도록 강요했다. 하루는 (3.1만세시위)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박희도는 내게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내밀었다. 박희도는 <동양지광>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저명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고 말했다. (중략) 나는 박씨에게 심한 항의를 했으나 일제 전시하라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자신과 임영신 초대 상공부장관이 박자가 잘 맞는 ‘트리오’로 요지부동의 팀워크가 이뤄어졌다고 했다. 이 트리오는 국제연합(UN) 한국위원당의 내한을 실현시켜 끈질긴 설득 끝에 1948년 5.10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능케 했다. 이처럼 이승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인정하면서 이승만을 내몬 4.19를 부정할 수 없었던 윤치영은 이 부분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주장한 것은 진정한 우리 국민의 소리였지만, 이 박사의 하야 주장으로 쟁점을 몰고 간 것은 교수 데모를 비롯한 모처의 3차례에 걸친 집요한 공작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정말 놀라운 ‘도마뱀 꼬리 자르기’다. 3.15는 부정선거로 규탄 받아 마땅한데 이승만에겐 죄가 없다.

이쯤 되면 9살 때 서울 교동에 2백 칸짜리 집에 살았고 192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 유학 시절 집에서 보내주는 넉넉한 학비 외에도 중국 특산물을 팔아 번 돈으로 고급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사교클럽에서 춤도 추고, 골프도 치러 다녔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박정희의 공화당 당의장으로 했던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