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정치의 달인 JP ‘조문정치’ 나서다

[팩트를 채우는 미디어비평] 남로당 간부의 딸 박영옥과 결혼한 김종필

[출처: 한국일보 2월 25일자 8면]

김종필의 아내 박영옥 씨가 죽었다. 언론은 빈소에 앉은 김종필에 매달렸다. 김종필은 아흔의 나이에도 ‘조문정치’로 다시 한 번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YTN이나 TV조선 같은 케이블방송들은 하루 종일 김종필이 빈소를 찾은 정치인들에게 내뱉는 덕담 한 마디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생중계를 이어갔다. 주류 언론들도 김종필의 입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도 25일자 6면에 이란 문패를 단 기사를 실었다. 한겨레 기사는 김종필이 이완구에겐 “밖에서 대통령에 쓴 소리 자랑 말라”고 했고, 김무성에겐 “대통령 잘 도우면 반대급부 있을 것”이라고 했고, 문희상에겐 “여야 싸워도 밖에선 같이 놀아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람들은 김종필이 김무성에게 말한 ‘반대급부’가 새누리당 차기 대선 후보 보장쯤으로 확대해석하면서 요란하다.

김종필의 죽은 아내 박영옥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촌언니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동희, 무희, 귀희, 상희, 한생, 재희, 정희까지 모두 7남매를 두었다. 박영옥은 박정희의 넷째 형 박상희의 딸이다. 이번에 죽은 박영옥의 아버지 박상희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인 친구 황태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와 건국동맹에서 활동하고, 해방 뒤 남로당 간부(경북도책)로 1946년 대구 총파업에 가담했다가 경찰과 교전 끝에 숨졌다. 황태성은 대구 총파업 실패 직후 북으로 올라갔다.

북한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김종필과 인연이 있는 박상희의 절친 황태성을 남으로 내려 보내 남북관계 정상화를 타진한다. 남으로 내려온 황태성은 죽은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박영옥의 엄마)을 찾아가 김종필과 박정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태성은 북한의 밀사로 죽은 박상희의 사위인 김종필을 종종 만났다. 황태성은 당시 서울 최고급 호텔인 반도호텔에 수개월이나 투숙했다. 김종필은 황태성에게 공화당 건설을 자문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은 미국 정보기관에도 흘러갔다. 미국은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가 과거 형 박상희의 소개로 남로당에 관여한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박정희는 자신의 과거를 씻고 미국에 반공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 황태성을 처형했다. 사람들은 박상희가 경북도책을 맡을 만큼 남로당 핵심이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좌우합작을 꾀한 신간회에 가입한 여운형 정도의 중도좌파였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박상희가 1946년 10월 대구 총파업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다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숨진 건 사실이다.

이런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한 김종필은 육군사관학교 8기생이었다. 김종필은 1948년 사범대학에 다니다가 빚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죽은 뒤 군에 입대한 후 일주일도 안 돼 탈영했다. 얼마 뒤 김종필은 다시 입대해 혹독한 사병 생활을 하다가 시험을 치고 육사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군은 장교가 절대 부족해 육사 8기생을 무려 1,300명이나 뽑았다. 8기생은 1년 만에 졸업해 1949년 5월 23일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육사 8기생은 10년 뒤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군 수뇌부를 규탄하고 군의 쇄신을 주장하는 정군운동의 핵심이 됐다. 김종필은 육군본부 작전정보실에서 박정희 실장 아래 북한반장으로 소령 생활을 지냈다.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 박영옥에게 첫눈에 반해 청혼했다.

황태성 공작금 헐어 만든 KBS 1TV

김종필은 1961년 5월 15일 서울 안국동 광명인쇄소에서 5.16 쿠데타를 알리는 유인물을 찍었다. 덕분에 김종필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한국 언론과 김종필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군사정부의 핵심인 정보부장 김종필은 오재경 공보부장관을 불러 1961년 연말까지 TV 방송국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1인당 GDP 80달러였던 1961년 방송 기자재를 살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김종필은 오재경에게 “한국은행 지하실 창고에 간첩 공작금 압수한 돈이 20만 달러는 되는데 그것을 다 주겠다”고 했다. 20만 달러는 처형당한 황태성에게 압수한 돈이다. 그 돈은 지금의 KBS 1TV 개국 자금이 됐다. 군사정부는 1961년 12월 31일 국영방송 KBS TV 개국식을 열었다.

김종필의 공작정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쿠데타 군은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이 남긴 외상 술값이 모두 1억 4천만 환이라고 공개했다. ‘요정 정치’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민심은 나빠졌고, 덕분에 쿠데타 군은 국민들의 환심을 샀다. 오늘날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이 노무현 수사내용을 과장해 언론에 흘리는 공작정치는 반세기 전 모두 김종필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김종필은 자유당, 민주당만큼 썩었다. 김종필은 공화당 창당자금을 만들려고 억지와 불법으로 ‘4대 의혹사건’을 저질렀다. 인위적 ‘증권파동’으로 선의의 군소 투자자들이 사기 당했다. 민간 호텔 건설에 정부 예산과 군대 장비까지 동원한 ‘워커힐 호텔’, 횡령과 부정행위를 낳은 ‘새나라 자동차’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파친코 사건 역시 김종필의 작품이었다. 자유당, 민주당 구 정치인들은 받은 뇌물을 정치조직 관리에나 썼지만, 김종필 같은 정치군인들은 억척스럽게 개인 배를 채웠다.

3만 명이 넘는 공작원을 두고 8개 사단이 쓰는 돈보다 많은 정부 예산을 마음껏 주무르며 공작정치로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았던 김종필과 사회주의자로 죽은 박상희의 딸이 만난 것 자체가 한국사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