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지식, 빼앗긴 삶의 터전
⟪노동자가 만난 과학⟫은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되찾다니? 과학이 언제 자본의 것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그런데 과학을 인간과 사회, 자연에 관한 지식 체계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처음부터 ‘자본의 것’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다.
예컨대 ‘식물 특허’가 그렇다.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여러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자기 땅의 우림과 삼림에 있는 식물 등의 자원에 대한 선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 선 지식의 일부가 제국주의, 산업자본주의 시기에 여러 국가, 기업, 박물학자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용되거나 식물 특허를 통해 독점적 수익을 올리게 되는데 이를 ‘생물해적 행위’라 부른다.
오늘날 이런 식물 특허를 강대국들이 갖게 된 이유는 19세기 제국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몇백 만 종의 식물 표본을 갖고 있는 영국의 큐식물표본관, 프랑스 자연사박물관 등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런 지식 체계와 실물 표본은 두고두고 ‘돈이 된다’. 예컨대 브라질이 독점하고 있던 천연고무 생산기지의 지위를 영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 식물 표본과 연구를 통해 빼앗았다. 동남아시아에 대규모의 고무 플랜테이션을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고무뿐이 아니다. 스리랑카의 차, 말레이시아의 팜유, 인도네시아의 사탕수수, 베트남의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 즉 ‘한 가지 작물만 대규모로 생산하는 농장’이 영토를 뒤덮었다. 그런 영토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지역 사람들을 농장 노동자로 전락시켰으며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 풍토병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선주민들이 처음에 제국의 이방인들에게 가르쳐준 것은 작은 지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책의 1부는 이처럼 제국주의가 극성했던 19~20세기, 제국이 어떻게 선주민들의 지식을 과학으로 구성해내면서 그 과학을 또 자기들의 돈벌이로 이용하거나 제국의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는지를 생물해적 행위, 의학,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 등을 통해 밝히고 있다.
박재용, ⟪노동자가 만난 과학⟫, 빨간소금, 2025
거대과학과 자본에 포섭된 과학
2부는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현대자본주의와 과학을 다루고 있다. 대량살상 무기인 핵폭탄 개발을 목표로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가 그 출발이다. 원래 과학은 혼자 혹은 서너 명, 많으면 몇십 명이 팀을 이루어 연구하곤 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10만 명이 넘는 과학자,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일본의 두 도시에 핵폭탄 투하로 이어졌고 2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죽었다.
저자에 따르면 맨해튼 프로젝트 같은 ‘거대 과학(Big Science)’의 출현은 군대와 관련이 있다. 20~21세기 내내 거대과학 계획, 가령 아폴로 달 탐사라든가, 인간게놈프로젝트, 현재 진행형인 아르테미스계획 같은 우주과학도 군사력, 군대와 관련 있다. 또 흔히 GPS라 불리는 위성항법시스템 역시 원래는 군사용 기술이었는데 지금은 민간에 오픈해 널리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를 ‘스핀오프 기술’이라 부른다. 이같은 스핀오프 기술을 핑계 삼아 국가와 군산복합체 등은 군사 기술 개발에 돈을 쏟아붓는 것을 정당화하곤 하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라고 저자는 일축한다.
21세기 들어 이제 거대과학은 국가의 손에서 나와 초국가 민간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공공의 이익과는 관계 없는 기업의 이윤에 놀아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질병이 의학을 통해 어떻게 돈벌이가 됐는지, 나아가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특허권을 살펴보면서 이제는 과학이 자본의 축적체제에 포섭되어 버렸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민중의 과학을 위하여
저자는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3부에서 우선 과학에 대한 기존의 여러 관점을 검토하고 비판한다. 가치중립적 과학관, 과학 만능주의, 기술결정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부과학이다. 그중 청부과학은 지금도 종종 목격되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과학 연구를 왜곡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50년대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뒷돈을 대서 진행한 연구들인데, 이들은 ‘흡연과 폐암의 직접적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라면서 규제를 미루기 위한 ‘과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런 전략은 200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대단히 효과적으로 작동했고 그 결과 담배 회사의 이윤은 보장되었다.
이렇게 기존 관점들을 비판한 저자는 과학을 둘러싼 새로운 흐름들을 소개한다. 과학 지식과 논문에 쉽게 접근하고 무료로 받아볼 수 있도록 하자는 ‘오픈 액세스’ 운동, 일종의 권력이 되어버리곤 하는 데이터를 공개하라는 ‘오픈 데이터’ 운동, ‘오픈 사이언스’ 운동 등이 있다. 또 과학 연구에 일반 시민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활동인 ‘시민과학(Citizen Science)’도 있다. 직업으로서의 과학자, 즉 전문가들만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환경, 기후변화, 공중보건 같은 복잡한 문제의 대두도 시민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저자는 적정기술운동, 제3세계의 과학기술운동, 기후위기와 과학, 장애인 등 소수자와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를 다루면서 저자는 비록 그 시도와 노력이 충분하거나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 한계만큼 의의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시도와 모색들이 개별 지역이나 부문을 넘어서 지구적 연대로 이어지고 과학기술 체제의 구조적 전환을 위한 정치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우산이 되어 줄 관점주의의 복권
언젠가부터 우리는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유튜브를 보면서 시국을 논하고, 주식 투기꾼들의 방송이 좌파를 대신했다. 투기를 위해서는 정치, 사회, 인문, 역사, 세계 각국사, 심지어 예술과 과학도 알아야 한다며 다채롭고 휘황 가득한 레퍼토리를 진열한다. 활동가들도 그런 프로그램을 본다. 투기꾼들에게서 학습받는 시대라니.
우리가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그 언젠가’는 아마도 다른 주체성을 빚어 낼 공간과 조직, 관계가 파괴되어 원자처럼 뿔뿔이 흩어진 이후부터일 것이다. 그 시작은 찰나 같은 ‘한 순간’은 아니었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슬그머니 왔다. 그 가랑비를 떠올려 보자면 이렇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에 근무했던 어떤 이는 경기도 도시에서 청와대까지 출근하면서 세리(SERI) 보고서를 매일 한 부씩 읽었다 했다. 출퇴근 시간을 합하면 통근버스에서 딱 읽을 분량이었다 했다. 그 덕분에 청와대 근무하는 내내 많은 주제와 분야, 쟁점에 대해 섭렵할 수 있었노라 했다. 이제는 삼성글로벌리서치로 이름을 바꾼 옛 삼성경제연구소는 그 가랑비 중 하나였다. 자본의 관점에서 설파된 논리, 철저한 (자본적) 관점주의의 관철은 ‘제 눈에 들보’가 들어찬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눈을 갈아 끼운 것과도 같았다.
또 이런 순간도 떠오른다. 1990년대 전국의 노동 단체들이 진행하던 강좌와 교육의 주제는 다양다종했다. 여러 분야의 연구자, 평론가, 직업을 갖고 있는 강사들의 교육 결과는 책으로 묶여 나왔고 그 책들 제목에는 ‘노동자의’ 또는 ‘노동자를 위한’ 같은 관형어가 붙곤 했다. 노동은 노동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학문과 담론, 연구, 예술을 하는 이들도 자신들의 활동과 일이 어떻게 ‘노동’과 연결되는지 늘 묻곤 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자신들의 시간에 되먹임되곤 했었다.
이제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돈이 되냐’의 관점에서 그 모든 지식과 예술, 정보를 가르치는 시대에, ⟪노동자가 만난 과학⟫ 같은 책은, 제목도 용기 있지만 다시금 ‘관점주의의 복권’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노동과 삶은 자본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저자가 맺음말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경운동가들은 과학적 데이터로 무장하고” 싸우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분석하면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농민들은 “기후 위기에 맞서 대안적인 농법을 연구”한다. 과학과 노동자가, 사회운동이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건 저들이 뿌려놓은 편견일 뿐, 우리 삶과 운동은 과학과 함께하고 있다. 노동의 관점 하에서. 이처럼 노동의 관점에서 쓰여진 더 다양한 책들을 만나보고 싶다. 노동자가 만난 미술, 음악, 문학, 노래, 역사, 철학, 세계사… 철도, 정보통신, 기후위기, 식량, 의료… 음식, 작업복, 커피, 신발… 갖다 붙이면 다 된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어디서 바라보는가이다. 이 책이 내게 다시금 일깨워준 가장 큰 교훈이자 든든한 연대감 같은 것이었다. 다시 제 눈을 뜨게 하는 깜빡임 하나, 같은 책이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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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는 노동자역사 한내의 운영위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