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냐, 빈곤이냐

《풍요》(Abundance)는 주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주목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간이다이 책은 미국 민주당원들에게 왜 그들의 정당이 트럼프에게 선거에서 패배했는지(비록 그 차이는 근소했지만)를 설명하려고 한다저자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과 데릭 톰슨(Derek Thompson)은 각각 자유주의 성향의 주류 언론인 <뉴욕타임스>와 <더 애틀랜틱>에서 활동하는 작가로서민주당과 자유 민주주의’ 지지자들이 정부 내에서 노동자 계층(미국에서는 중산층이라고 부른다)이 필요로 하는 물건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인프라 프로그램과 녹색 기후변화 대응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왜 실패했을까저자들에 따르면그 이유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평균 실질 소득이 하락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민주당 정부가 국민의 필요를 충족시킬 물건을 생산하는 능력을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분배가 아니라 풍요침체가 아니라 성장만이 필요했다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환경 규제나 평등 조치가 아니라 단순히 더 많은 것들’, 즉 풍요였다민주당과 자유주의 엘리트는 오직 오염 규제나 주택 사업도로 건설 같은 것에만 관심을 쏟았고이에 따라 자본주의(더욱 정확히 말하면 대형 자본 결합체)가 물자를 제공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저자들은 생산자원프로젝트를 어떻게 하면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추진할 수 있는지를 여러 예시를 통해 제시한다정부 규제와 중산층의 님비즘(not in my backyard)만 사라진다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예를 들어 주택 문제를 들면서저자들은 미국의 주택 위기즉 치솟는 임대료와 감당할 수 없는 집값이 순전히 공급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이 주택 부족은 제한적인 구역 규제와 지역 사회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발생했고이에 따라 가장 필요한 지역에 주택이 지어지지 않아 집값이 폭등했다고 설명한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문제도 예로 든다화석 연료 사용을 막기 위한 환경 규제가 오히려 청정에너지 대안을 대규모로 배치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주장한다예를 들어 태양광 패널 설치나 이를 전력망에 연결할 송전선 건설 시도는 주택 개발을 막으려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같은 풍요주의자(Abundist)’인 맷 이글레시아스(Matt Yglesias)는 노동자 계층의 필요 충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자유주의 좌파가 상류 중산층 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결과라고 본다그는 이들이 "개방 공간조용함고급 취향조화로운 사회 질서를 역동성번영그리고 성장 덕분에 가능한 광범위한 절대적 상향 이동성보다 우선시하는 영국 지주계급 태도를 채택했다"고 지적한다바로 이 이해관계들이 정부와 기업이 풍요를 제공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들의 핵심 주장은 부유한 중산층 부동산 소유자들이 일을 추진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지역 주민 참여와 소송을 통해부유한 주택 소유자들과 이익 집단의 좁은 범위가 차이를 만들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막는다《풍요》는 바로 이 집중된 이해관계를 무너뜨리자고 촉구한다아이러니하게도이들은 저자들의 친구이자 이웃들이기도 하다.

미국이 더 이상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며중요한 기술을 구현하는 데에도 뒤처지고 있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그러나 미국이 왜 합리적인 가격의 괜찮은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지가 정말 규제 과잉과 님비즘 때문일까미국이 왜 젊은 세대에게 엄청난 학자금 부채 없이 고급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는지가 정말 규제 과잉과 문화적 엘리트주의 때문일까미국의 도로와 다리가 왜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가 정말 계획 규제와 소송 때문일까?

분명히미국이 주요 경제국 중에서 가장 비싼 의료비용을 지불하면서도 가장 낮은 건강 지표를 기록하는 이유는정부와 납세자가 자금을 지원하여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건강 서비스를 갖추지 않은 유일한 주요 경제국이기 때문이다대신미국은 거대한 민간 건강 보험사와 병원이 요금을 부풀리고 지급과 서비스를 회피할 기회를 틈타 운영된다.

교육 수준이 악화한 이유도 공공 교육 투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정부가 학생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떠안겨 자격 취득을 주저하게 만든 탓이다.

미국의 부실한 인프라도 수십 년 동안 정부 지출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지님비즘이나 규제 때문이 아니다미국의 철도망이 작고 느리고 부실한 것은 민간 부문에 맡긴 결과로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방치했기 때문이다중국에서는 막대한 국가 투자를 통해 불과 십여 년 만에 철도망과 교통 체계를 혁신했다.

《풍요》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클라인(Klein)에게 보편적 공공 건강 보험 모델을 지지하는지 묻자그는 현재 상황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민주당의 건강 관리 정책 핵심으로 메디케어 포 올(Medicare for All)을 추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답했다그는 그 이유가 의료계의 기득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주요 이유는 정치권에 로비를 퍼붓는 건강 보험사제약 회사사모펀드 소유 병원의 막강한 권력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그리고 이해관계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정당한 해결책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19세기 미국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투쟁을 포기했어야 했을까?

저자들은 미국의 주택 위기에 대해 큰 비중을 둔다그들은 규제지역 사회의 계획 반대 등이 위기의 원인이라고 비판한다그러나 설령 그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주택 위기의 진짜 원인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미국에서는 인구 증가율과 가구 형성 증가율이 둔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충분한 주택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

추정치는 다르지만전문가들은 미국의 주택 부족 규모를 약 370만 채에서 680만 채 사이로 보고 있다만약 더 많은 주택이 건설되어 수요를 충족한다면주택 가격은 하락하거나 최소한 상승을 멈출 것이고소득은 주택 구매 가능성 격차를 좁히기 시작할 것이다그러나 현재의 건설 속도라면 현재의 주택 부족을 해소하는 데 7.5년이 걸릴 것이며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왜 저렴한 주택이 충분히 건설되지 않는가이는 민간 소유 건설 부문이 수익성이 없는 한 주택을 건설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최근 몇 년간 주택 부족과 높은 비용 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더 많이 등장했다그렇다면 미국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및 주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공공 소유 국가 건설 기관이 주도하는 전국적 주택 건설 프로그램이 존재하는가물론 없다여기는 미국이다그런 정책 제안은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풍요》 의제는 표면적으로는 트럼프주의 우파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는 사회주의 좌파를 겨냥한 공격이다저자들은 좌파가 불평등과 차별 문제에만 집중하고 노동자 계층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 증가에는 집중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그렇다면 저자들이 제시하는 더 많은 물건을 얻기 위한 해법은 무엇인가바로 건강환경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규제들조차 철폐하는 것이다참고로영국의 '노동당(Labour)' 정부에서도 같은 주장이 나온다수백만 채의 주택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역 계획 규제와 환경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미국(또는 영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다만 사소한 규제와 관료주의가 방해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더 많은 물건과 노동자 계층이 필요로 하는 풍요를 원한다그러나 이 책은 풍요를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즉 화석 연료 대기업사모펀드 거물들건설 회사들그리고 미국의 건강 및 교육 부문을 지배하는 민간 부문의 이해관계자들이 아니라계획 규제를 주요 문제로 지목한다.

게다가 저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불필요한 장애물만 제거되면 사람들의 삶을 혁신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는다저자들은 완전히 기술 결정론적 접근을 취한다. "정부가 더 크냐 더 작냐는 잘못된 질문이다정부는 더 나아져야 한다정부는 자신이 따르는 규칙이 아니라 제공하는 성과를 통해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AI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를 보자. AI는 "노동을 줄이지만... 임금을 줄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AI는 "인류의 집단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므로이익이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정말 그럴까오픈AI(OpenAI),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구글(Google), 엔비디아(Nvidia) 같은 기업들이 AI 도입으로 얻은 이익을 우리 모두와 공유할까지적 재산권과 신기술에 대한 독점적 통제가야말로 풍요를 실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이 책의 제목은 풍요로 가득하지만답변은 빈곤하다.

[출처] Abundance or scarcity? – Michael Roberts Blog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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