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1년 전 것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미국 외교관이 뉴욕 유엔 연단에서 “채무 지속 가능성과 사회경제적 평등”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고위급 토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행사로, 국제 외교의 상투적인 형식이다.
2024년 4월 15일, 유엔 총회장에서 열린 이 회의는 '지속가능성 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고위급 토론으로, 모든 이들을 위한 부채 지속가능성과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출처: UN 총회
바레인 등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제출한 ‘평화적 공존과 희망의 유엔의 날’을 제정하자는 결의안을 앞두고, 미국은 공식 표결을 요구하며 반대표를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트럼프의 미국은 유엔의 희망의 날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는 소수 의견으로 남았다. 파라과이와 페루는 기권했다. 미국만이 유일하게 양심적 반대 입장을 취한 국가였다.
“희망과 평화공존의 날에 대한 유엔 결의안.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믿기 어렵다.” 찬성(Green): 161개국 , 반대(Red): 미국 1개국, 기권(Yellow): 파라과이, 페루 2개국
이제 한 보수주의자가 원칙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엔이 7월 12일을 ‘희망의 날’로 지정하는 건 터무니없고, 설령 유엔 다수가 찬성하더라도 1월 28일을 ‘국제 평화공존의 날’로 만드는 데 아무런 실효성도 없다고 말이다.
유엔이 그렇게까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 정부의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을 대표해 발언한 에드워드 하트니(Edward Heartney)는 오랜 경력을 지닌 경제외교관이자 ECOSOC(경제사회이사회) 대표였으며, 그의 발언은 ‘민중판 칼 슈미트주의’(folk Schmittian)—여기서 칼 슈미트는 독일의 정치사상가를 말한다—적 맹렬한 공격이었다. 그 공격은 단지 평화공존의 날이나 희망의 날만이 아니라, 유엔의 지속가능발전 의제 전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미국의 주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유엔이 내세우는 ‘평화공존’이나 ‘문명 간 대화’라는 개념이 실은 시진핑 사상의 전면 작전이라고 비판했다.
아래는 2025년 3월 4일,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의 공식 성명이다.
에드워드 하트니
ECOSOC 수석참사관
뉴욕, 뉴욕
2025년 3월 4일
작성 원고 기준 : 바레인 제출 – 국제 평화공존의 날
“감사합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강력히 지지합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 종교 또는 신앙의 자유를 통한 개인의 권리를 확고히 지지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미국의 안보와 전 세계적 관용, 상호 존중, 평화 증진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결의안에 대해 표결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의안이 ‘의제 2030’ 및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재확인하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언뜻 중립적인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의제 2030과 SDGs는 미국의 주권과 국민의 권리·이익에 반하는 ‘연성 글로벌 거버넌스’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미국 국민의 명확한 명령은 이랬습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인들의 이익에 초점을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최우선으로 돌봐야 하며, 이는 우리의 도덕적·시민적 의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SDGs에 스며든 ‘젠더’ 및 ‘기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시의적절한 수정 경로를 분명히 제시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제 2030과 SDGs 같은 글로벌주의 사업은 이미 선거에서 패배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지속가능발전 의제 2030과 SDGs를 거부하고, 더 이상 이를 재확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결의안 제목에 등장하는 ‘평화공존’이 중국의 ‘평화공존 5원칙’에 대한 유엔의 승인처럼 오용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들은 유엔 회원국 간의 공식 협상을 통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유엔의 정식 절차를 거쳐 승인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승인 시도는 유엔의 독립성을 약화시키고, 중요 절차를 우회하며, 회원국들이 유엔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박탈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는 중국의 인권 침해에 대한 국제 사회의 책임 요구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문명 간 대화’라는 개념은 시진핑 주석의 ‘글로벌 문명 이니셔티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민주주의, 인권, 정의 등 기본 개념의 의미를 재정의하여 중국의 정치 체제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유엔 헌장과 같은 기초 문서에 명시된 정의를 왜곡하여 중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발언이다.
여기서 동원되는 여러 대조들을 생각해보라.
* ‘중립적인 언어로 포장됨’ vs. 실은 특정 프로그램을 추진함
* ‘연성 글로벌 거버넌스’ vs. ‘미국의 주권과 국민의 권리와 이익’
* 선거와 국민의 명령 vs. 글로벌리즘
* 트럼프 vs. ‘젠더’와 ‘기후’ 이념
* 명확함 vs. 만연함
* 투표함에서의 심판 vs. 유엔 지속가능발전 의제
* 회원국들이 만들어가는 과정 vs. 중국식 개념의 강제 삽입
* 미국과 유엔 vs. 중국
* 트럼프 vs. 시진핑
이것이 바로 ‘트럼프식 민중판 슈미트주의’가 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을 비판하는 방식이다. 그 일부는 꽤 난해하기도 하다. 예컨대 “연성 글로벌 거버넌스”라는 용어는 약 10여 년 전 국제관계 이론 관련 학술지에서 잠깐 유행했던 개념이다.
이 성명에서 미국은 내용 면에서 글로벌리즘과 ‘젠더’ ‘기후’ 의제에 맞서 미국의 이익과 자국민 우선주의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SDGs는 ‘중립적 언어’로 쓰였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정치적 의제를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단지 젠더와 기후를 넘어서,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의 정치적 프로젝트까지 유엔 시스템에 끌어들이는 통로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를 ‘민중판 슈미트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칼 슈미트가 1929년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치가 은폐한 정치적 현실을 해부할 때 사용한 대조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1932년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도 그는 비슷한 도식들을 제시한다.
초기 19세기 자유주의자들, 예컨대 벵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 같은 이들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대조들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려는 자신들의 의제를 ‘구성’했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정치 자체—즉 주권적 결단의 권력—은 일련의 대체적 가치 체계, 규범, 그리고 실제 사회적 과정들에 의해 제약되었다. 이들 각각은 자신을 ‘진보’로 제시했지만, 사실상 각기 다른 형태의 권력이었다. 그것이 종교적이든, 문화적이든, 경제적이든, 법적이든, 과학적이든 간에 말이다.
슈미트에게 있어, 나치당의 “국가혁명”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일은 이 반정치적인 권력의 철창을 폭파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나치당과 결별하기 전까지 제3제국의 최고 법률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매우 중대한 판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사용한 언어 역시 유엔이 직면한 선택지를 과장된 역사적 어휘로 포장했다. 그 성명은 세계 여론의 법정과 역사책을 겨냥해 작성된 대서사시 같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엔에서 그것은 미국의 “해방의 날”이었다.
반응은 어땠을까?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라 불리던 체제의 중심 기둥들을 여러 차례 공격해 왔다. 그 공격이 급소를 찌르면 세계가 요동친다. 트럼프가 세계 무역질서를 뒤엎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다. 금융시장에서 수조 달러가 증발했다. 미국의 국채시장과 통화마저 흔들렸다.
그런데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SDG와 파리기후협정은 모두 2015년에 체결되었다. 이 둘은 현대 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의 양대 주춧돌이다. 만약 이 둘이야말로 소위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구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식 거부가 야기한 두 사례—SDG와 무역—는 반응의 강도 면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무역 정책에 대해서는 전 세계가 과민 반응하고 있지만, 3월 4일자 에드워드 하트니의 서한은 사실상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파이낸셜 타임스>나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된 독자 서한 하나가 유일하다. 온라인상에서도, 심지어 트위터에서도 거의 반응이 없었다.
나 역시 SDG를 일상처럼 파고드는 친구의 제보로 그 놀라운 미국 정부의 성명을 알게 되었다. (고맙고, 미안하다 JH.)
이런 무반응은 트럼프의 관세로 인한 전방위적 스캔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사실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유엔 SDG에 대한 슈미트식 비판은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를 신화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다시금 보여준다. 그들은 SDG를 마치 자신들이 거부하는 세계질서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양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이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실이 증명하듯이—허공에 칼을 휘두른 셈이다.
물론 2015년의 전체 의제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기후정책에는 일정 부분 진지함이 있었고, 특히 글로벌 에너지 투자 지형을 전환시켰다(이에 대해서는 곧 추가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하지만 SDG의 훨씬 더 광범위한 포부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무지갯빛 원형 로고가 가득 담고 있는 약속은 화려하지만, 유엔 스스로 평가하듯 이행 수준은 참담한 수준이다.
게다가 2015년의 약속을 저버린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내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에 쓴 글에서도 밝혔듯, 우리는 지금 서방 전체에서 해외 원조 정책의 반혁명을 목격하고 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폐쇄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만이 아니다. 영국 또한 원조 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전반적인 글로벌 개발에 대한 포괄적 약속으로부터의 전면적인 후퇴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이 모든 원조를 전면 중단한다는 초기의 공포 시나리오는 트럼프식 과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세계 각국의 최신 원조 예산을 종합한 결과는 참담하다. 4월 중순 기준 최신 집계에 따르면, 원조 삭감 규모는 거의 40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중 대부분은 최대 공여국인 미국과 독일의 삭감에서 비롯되었다.
이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형식적인 수사가 아니다. 유엔의 ‘희망의 날’ 결의안 투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희망의 날’을 비웃기 전에 오버슛와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윔 카르통(Wim Carton)의 신랄한 비판을 살펴보라. 이들은 오바마식의 ‘희망’과 ‘낙관주의’가 어떻게 전 지구적 지속가능성 정치의 연료가 되었는지를 지적한다. 긍정적 사고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전 세계 원조 예산에서 삭감된 400억 달러는 현실의 돈이다. 이 삭감은 전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이는 세계 무역 시스템의 어떤 충격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수백만 명의 생명을 위협하는 조치다.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왔듯이, 진정으로 포괄적인 세계화를 걱정한다면, 부유국 간의 무역 협정에 대한 미세 조정보다 아프리카를 (합리적인 조건으로) 세계 경제에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가 훨씬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글로벌 북반구의 여론은 거의 요동하지 않는다. 대규모 시위도 없다. 시장의 반응도 없다. 아프리카의 인구학적 대전환은 수억, 어쩌면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수조 달러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다른 도전 과제들에 직면한 지금, 2015년에 설정되었던 이중 과제—기후 문제와 지속가능한 세계 개발—는 그저 버려지고 있다.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자유주의의 쇠퇴 한가운데서 어떻게 T. S. 엘리엇의 1925년 시 ‘텅 빈 사람들’(Hollow Men)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텅 빈 인간
우리는 박제된 인간
함께 기대선
머릿속은 짚뿐이네. 아아!
우리가 속삭일 때
우리의 말라붙은 목소리는
마른 풀잎을 스치는 바람 같고
깨진 유리 위를 지나가는 쥐의 발소리 같네
이 마른 지하실에서
형태는 있어도 형체는 없고, 그림자는 있어도 색은 없고
힘은 있어도 마비되어 있고, 몸짓은 있어도 움직임은 없네
...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폭음이 아닌, 흐느낌으로.”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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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