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 네 조합원 곡기를 끊다

“뱃속의 생명을 앗아간 자본에 맞서”

김혜란, 이경희, 김경옥, 이옥순.

서울의 봄은 아직 멀었다. 꽃은 피어도,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옷은 가벼워져도, 봄이되 봄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 다시 불러본다. 김 혜 란, 이 경 희, 김 경 옥, 이 옥 순.

이들에게 자신을 부르는 이름은 이미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해고자로 부른다. 복직이 되지 않는 한 이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해고자로 남을 것이다.


두툼한 잠바에 빨간 조끼. 스티로폼을 시멘트 바닥에 깔고, 침낭과 담요로 꽁꽁 둘러싸고 앉아있다. 봄 햇살 따사로운 3월 31일, 공덕동 중앙노동위원회 앞.

서울의 봄

비가림 천막도 없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코오롱 여성조합원이다. 단식 2일째, 배고픔보다는 추위에 떨어야 했던 지난 밤 이야기를 한다.

“해가 지니 정말 추웠어요. 자꾸 침낭 속으로 파고들어갔어요. 머리와 다리를 모으고, 온몸을 움츠리고, 움츠리고. 담요 위로 천막 쪼가리를 덮고. 담요와 침낭이 밤이 깊어가니 촉촉이 젖어요.”

이경희 씨의 넷째 손가락은 휘어있다. 물론 복직투쟁을 하다 다친 거다. 손을 한번 보여 달라고 하자 “부끄럽게…”하며 손에 낀 하얀 장갑을 벗는다. “손 못 생겼죠.”
  이경희 씨

차마 사진을 찍지 못했다. 손가락을 보는 순간 울컥 감정이 앞서고, 부끄러움에 꺼냈던 카메라를 다시 집어넣었다.

손 못 생겼죠

이경희 씨를 ‘코오롱 전사’로 만든 장본인은, 이경희 씨를 해고한 코오롱 자본이다.

“쇠는 두들기면 강해진다고 하잖아요. 1년이 지나니 그 말을 알겠어요. 처음 해고를 당하고는 내가 (회사에) 잘못한 일은 없었나 고민도 했어요. 정말 내가 하고 있는 투쟁이 쪼그마한 죄책감은 없는가. 1년이 지나니 그 마음을 없애주더라 구요.”

이경희 씨는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옆에 있던 김혜란 씨가 말한다. “회사가 노동운동을 하게 했어요.”

내가 들은 최일배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노사협조를 강조했던 사람이었다. 정리해고자 명단에도 들지 않았다. 정리해고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대상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을 냈다. 그러자 회사는 그를 해고자로 만들었고,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 노동운동가로 변신시켰다.

쇠는 두들길수록 단단해진다

“우리 마음도 똑같아요. 모두 손목을 끊고, 아니 더한 일도 하고 싶어요. 위원장이 손목을 끊었다는 말에 너무 놀랬고, 허탈했어요. 위원장보다 우리 마음이 더 아프고, 철탑 동지보다 밑에서 지켜보는 우리가 더 힘들어요. 내가 손목을 끊고, 내가 철탑에 오르는 게…. 죄인 같은 기분이에요.”

코오롱 조합원 인터뷰 내용을 쓸 때는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필요가 없다. 404일. 많이 울면 눈물마저 마른다고 했는가. 하지만 코오롱에서는 ‘이보다 처절할 수는 없다’는 말이 하루하루를 지나면 더 처절해지기에 깨지고 만다. 눈물샘도 더욱 자극이 된다.

본사진격투쟁 때도, 이웅렬 회장 집에서도, 철탑 위에서도, 단식농성장에서도 눈물 마를 짬을 주지 않는다. 인터뷰이나 인터뷰어나 서로 먼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먼 산에 눈을 주며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코오롱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김혜란. 중학교를 마치고 코오롱에 들어왔다. 산업체학교를 다니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와 얽힌 코오롱 이야기를 하자면 사나흘 밤을 새도 끝이 없고, 할머니들이 말하는 “내 이야기를 쓰면 소설책 열권은 넘을 거야”가 똑 맞아 떨어진다.

코오롱과 인연, 소설 열권은 쓴다
  김혜란 씨

김혜란 씨가 꼭 이겨야하는 이유가 있다. 코오롱이 앗아간 생명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임신 4개월이었던 그는 해고의 스트레스로 유산을 하였다.

“남편에게 미안하죠. 유산된 것을 알고는 복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죠. 다 때려죽이고, 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었죠.”

다섯 살 난 딸이 있다. 언제 집에 갔는지도 헷갈려한다. 두 달은 넘은 게 확실하다였다. 눈에 밟힌다고 한다. 노숙을 하며 하늘의 별을 보면, 딸의 눈이 초롱초롱 눈가에 내려와 눈물이 된다고 한다.

“언니는 집에서 잘 이해해줘요. 평소에 언니가 워낙 잘했어요. 시어머니도 언니 하는 일을 믿고 격려해줘요.”

임신 4개월, 해고 스트레스로 유산

물론 김혜란 씨만이 아니다. 30일 최일배 위원장을 면회 오셨던 최 위원장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내 아들은 갇혀있으니 걱정 안돼. 하지만 철탑에 있는 사람이 걱정이지. 다들 우리 아들 같은 애들인데 어떡하냐.”며 자신의 아들보다 다른 조합원 걱정을 먼저 하셨다.

아들 면회를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는 눈물을 닦고 면회장에 들어갔다. 밖에서는 울어도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되겠냐며. 아들과 대화도 마찬가지다.

“너니까 그리라도 했다. 난 내 아들을 믿었다.”

어머니의 말에서 최일배 위원장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최 위원장은 이웅렬 회장 집에 조합원을 데리고 들어가기 전에, “혹시 현수막 같은 것 걸면서 썼던 칼이 있으면 다 꺼내 놓으라”고 했다.

내 아들을 믿었다

며칠 뒤 중앙위원회 판결에 대해 물어보았다.

“올바른 판결이 나기를 바래요. 하지만 판결이 우리 싸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거예요. 전원 복직, 합법적 집행부 인정과 교섭, 부당노동행위자 처벌의 우리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우리는 한 몸, 한 목소리로 맞설 거예요.”


이경희 씨의 말을 듣는 순간 48명의 해고자는 48명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들에게 개인의 이름은 사라지고, 해고자라는 한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옆에 있던 김혜란 씨가 거든다.

“우리 요구가 무리한 요구인가요. 회사가 어렵고, 정당한 선별 기준과 절차라면 정리해고 받아들이지요. 문제는 조합원이 뽑은 집행부를 인정하지 않고, 교섭 자리도 만들지 않는 회사가 해고를 감행한 진정한 이유를 알고 싶어요. 집행부 인정하고, 이야기를 하면 모두 쉽게 풀릴 수 있어요. 너무 작고, 너무 당연한 요구마저 무너지니, 구속이 아닌 목숨을 거니 거지요.”

너무 작고 당연한 요구

정리해고 뒤, 정리해고자를 가로막기 위해 쓴 용역비가 한 해에 백억이 넘는다고 한다. 코오롱의 정리해고 이유에 대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또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철탑 인터뷰를 하고 내려오기 싫었던 것처럼. 이곳은 고압전류도 없는데 나를 끌어당긴다. 중노위 정문 앞, 시멘트 바닥에 착 달라붙은 엉덩이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봄은 언제 오나요.”

김혜란 씨의 질문에 십년 전에 썼던 시 한 편 남기고 돌아왔다.


공단의 봄 2


봄은 언제 온다냐
개나리 벚꽃 피어도 춥기만 하던 공장

프레스 사이로 슬그머니 햇살 기어든 날
칙칙한 겨울 작업복 잠바 벗으며 한마디씩
워매 더운그

겨울 가자 여름이라

올해도 공단에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