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사퇴 카드에 국민연금 쟁점 급부상

유시민 사의 표명, 국민연금법 개정 논란 2라운드 돌입

유시민, 오전에 “할 일 많다”.. 오후에 ‘사퇴’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퇴의 배수진을 치고, 국민연금법 개정을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유시민 장관은 지난 6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서 국민연금법 개정안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유시민 장관은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 중요한 법률(국민연금법) 개정이 어렵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직 계속하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 않겠가”며 사퇴를 암시했다.

그러나 유시민 장관은 당시 인터뷰에서 언론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얘기하면 ‘유 장관 사퇴의사 밝혀’라고 보도할지 모르겠다”며 “원칙적인 입장을 얘기하는 것이다. 아직 할 일이 많고, 앞으로도 당분간 더 집중해야 될 일이 많다”라고 즉각적인 사퇴와는 거리를 둔 바 있다.

유시민 장관은 오전에는 언론을 향해 “‘유 장관 사퇴의사 밝혀’라고 안 써주기 바란다”더니, 그날 저녁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퇴의사를 밝힌 것. 결국 유 장관은 본인 스스로 뱉은 말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뒤집은 셈이었다. 때문에 유시민 장관의 사의 표명을 두고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지난 6일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회를 통과한 기초노령연금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힌 날이기도 하다.

유시민 장관 사의 표명에 정치권 긴장

유시민 장관의 사의 표명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다만 ‘국민연금법 개정안 국회 처리여부를 지켜본 뒤 결정할 예정’이라는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들의 발언을 인용한 언론보도만 흘러나오고 있다.

키를 쥐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은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가운데 각 정치세력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시민 장관의 사의 표명의 배경을 파악하는 데 분주한 모습이다. 여론의 주요 관심사인 국민연금법과 맞물려 있고, 잠재적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되는 유시민 장관의 향후 행보가 정치권에 미칠 영향에 대해 주판알을 튕기는 데 여념이 없는 분위기다.

그 정치적 의도와 배경이 무엇이든 정부의 기초노령연금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검토와 유시민 장관의 사의 표명을 계기로 국민연금법은 정국 최대 현안 중 하나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우리당 기회 포착, "노인들 가슴에 못 박는 정당" 한나라당 맹비난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물 만난 고기처럼 한나라당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유시민 장관의 사의 표명을 계기로 꺼져가던 국민연금법 논의의 불씨가 살아나는 만큼, 그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

장영달 원내대표는 “3월 국회에서 기초노령연금법은 통과되고 국민연금법 부결되었다. 그러면 기초노령연금도 불가능해진다”며 “한나라당은 본인들이 우리나라 많은 노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정당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원혜영 최고위원도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시켜 국민연금기금을 더욱 부실화하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며 “입만 열면 감세를 주장하던 한나라당이 당장 투표권이 없는 미래세대에게는 세금폭탄을 떠맡겼다”고 거들었다.

원혜영 최고위원은 이어 한나라당이 “미래세대의 문제를 대선 전략과 연계시켰다”며 “눈앞의 대선에만 급급해서 미래의 대선에는 아무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정당임을 스스로 선언한 꼴”이라고 맹비난했다.

한나라․민노, “국회에 책임 넘기지 말고, 조속히 사퇴하라”

그간 여러 번 유시민 장관의 사퇴를 요구해 온 한나라당은 유 장관의 사퇴를 촉구했지만, 열린우리당의 공세를 적극적으로 받아치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또 유시민 장관 사의 표명을 대선과도 연결시키며 그 배경과 정치적 의도를 잔뜩 경계하는 눈치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대선을 위한 중립내각을 위해서 유시민 장관은 하루빨리 장관직을 사퇴해야한다”면서도 “국민연금법 부결 사태로 인한 본인의 사퇴를 대선용 술수와 전략 수립을 위해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유시민 장관 사퇴와 국민연금법 개정이 연계되며 정치 쟁점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김형오 원내대표도 유시민 장관 사의 표명과 관련해 “사의를 표명했는데 아직까지 청와대에서 결정을 하지 않았다”며 “국민연금법을 가지고 다른 장난을 치기 위해서 ‘사표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유 장관의 조속한 사퇴를 촉구했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에 대해 강재섭 대표최고위원은 “빚을 2010년의 경우에 매일 678억 원 정도로 줄이고 기금 고갈 시기도 2065년으로 연기하는데 불과하다”며 “정부의 개정안은 보험료가 올라가고 급여율은 낮아져서 연금에 대한 저항과 사각지대가 더욱 확대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정부와 여권은 마치 엄청난 개혁이나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며 “적반하장처럼 그 (국민연금법 개정안 부결) 책임을 한나라당에게 전가하면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고 열린우리당의 비판을 받아쳤다.

한편, 한나라당과 함께 지난 2일 국민연금법 수정안을 제출한 민주노동당도 한나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김형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유시민 장관 사의 표명과 관련해 “장관의 사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시간을 끄는 것은 결국 사퇴를 정부안을 관철시키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된 책임을 국회에 넘기지 말고 장관에게 명확히 물어야 할 것”이라고 사퇴를 촉구했다.

유시민 책임 털고, 명분 잡고? 정치권은 책임에 발목 잡히고, 명분 놓치고?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이 ‘책임을 넘기지 말라’며 유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지만, 공은 국회가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유시민 장관은 스스로 국민연금법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책임’을 따지자면 국회에서 개정안을 부결시킨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정치권이야말로 직접적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여론의 화살도 이 같은 논리의 궤적을 따라 유시민 장관 보다 ‘노인표’를 의식해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만을 통과시킨 정치권에 집중되고 있다.

이를 예상이라도 했듯 정작 유시민 장관은 지난 2일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에 대한 국회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유시민 장관은 “내가 만든 법에 내가 반대표를 던졌다”며 “연금법 개정을 하지도 못하고 기초노령연금법을 만들어서 1년에 3조 원 가까이 또 납세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법을 통과시키는 대형사고가 났다”고 밝혔다.

한편, 각 정당들은 4월 임시국회 회기 중에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앞 다투어 밝히고 있다. 한덕수 총리가 밝힌 기초노령연금법에 대한 정부의 거부권 행사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해한다는 눈치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국민연금법과 기초노령연금법은 함께 입법되어야 하는 만큼 거부권 행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기초연금제 도입과 국민연금법 개정이 한 법안에 묶여있는 한나라당의 수정안 처리가 시급하다며,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했다.

유시민 장관의 사의 표명을 굳이 ‘사표정치’라고 언명하지 않더라도, 국민연금법 개정은 이미 정치쟁점화 되고 있는 형국이다.

유시민 장관은 ‘책임’을 운운하며 사퇴라는 배수의 진을 침으로써, 최소한 ‘명분’은 챙길 수가 있게 되었다. 또 한나라당을 비롯한 이번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부결시킨 정치권을 압박하는 기회도 잡게 되었고, 실제 이들이 긴박당하는 분위기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이 기회를 살려 국민연금법 논의에서 주도권을 잡고, 자신들의 안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연금연합'이 기세를 떨치며 계속 연대를 이어갈 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