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딛고 내일을 향해 쏴라(下)

[기고]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50일간의 투쟁

2시기(2월 20일~25일) : 분노의 고양과 전선의 확대
외노협 일부 대표들의 돌출행동과 연대전선의 혼란


설 연휴를 거치며 어느새 언론의 관심은 조금씩 시들어 가고 있었지만, 여수 현지에서의 피해자 가족들의 투쟁과 전국적인 이주노동자들과 한국 사회운동의 대응은 불이 붙어 가고 있었다. 여수참사공대위는 20일부터 28일까지를 1차 추모기간으로 선포하고 대시민 선전활동과 정부규탄 대중 집회 성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수 현지에서는 설 연휴를 거치며 공대위와 유가족들의 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었다. 16일 투쟁의 성과를 이어 받아 20일 드디어 유가족들이 ‘화재 현장 공개’, ‘소장 면담 및 사과’ 요구를 하며 정부를 상대로 공개적인 항의 행동에 나섰다. 결국 여수 출입국관리소 소장은 유족들 앞에서 사과하며 삼배를 해야 했고 유가족들은 현장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공대위와 유가족이 최초로 함께 투쟁을 해서 승리를 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로 인해 유가족들뿐 아니라 공대위 역시 고무되고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세로 23일 여수 현지에서 유가족이 참석하는 추모제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25일 서울에서 열릴 추모행사 및 정부규탄 집회에 유가족들이 대거 참석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유가족들이 아직 공대위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분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지만 전 주에 비해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전국적으로도 투쟁이 확대되고 있었다. 서울 지역에서는 공대위 확대를 위한 본격적인 조직화에 돌입하여 단체들이 속속 공대위에 결합하기 시작했으며 대구에서 부산에서 대책위가 구성되고 투쟁 일정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서울시위원회 산하 각 지역위원회들은 대시민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범을 보여 주었고 MTU는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명운동과 25일 집회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울 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유가족, 왜?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여수 현지에서 공대위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은 25일 집회에 유가족 상경의 범위에 대한 논란이었는데, 이는 22일과 23일을 거치며 공대위(여수)의 전반적인 운영을 둘러싼 문제로 확대되었다. 20일 공대위(서울) 전체회의에서 당일 여수 지역의 투쟁의 성공에 힘을 받은 피해자 가족들이 25일 당일 전원 상경하여 서울 집회에 참석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26일 국무총리 면담을 원하고 있다는 요구가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공대위(서울)은 급하게 국무총리 면담을 요청하고 1박 2일의 투쟁 일정을 책임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21일 갑자기 유가족들이 서울에 상경하는 범위를 두고 동요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해 듣기로는 설 연휴 이후 여수에 복귀한 공대위(여수)의 한 공동대표가 유가족들을 상대로 국무총리 면담의 가능성이 없으니 상경의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2일 저녁에 열린 상황실 회의 도중 여수에서 유가족 대표만 참석하겠다는 통보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23일 여수 현지 추모제 참석차 여수에 내려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 22일 여수에서는 유족동의 없는 시신부검 규탄 및 보호소 참사 엄정 수사촉구 기자회견과 경찰서 항의 방문이 진행됐는데 이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애초 공대위는 서장 면담을 목표로 방문을 했지만 이를 협상하기 위해 경찰서에 들어간 한 공대위 공동대표가 4시 경찰 수사브리핑에 유가족 대표가 참관하기로 하는 협상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현장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고 집회 참가자들은 성과 없이 돌아가야 했다. 여기에 23일 오전에는 공대위(여수)의 다른 공동대표가 공식적인 통보 없이 자체적으로 유가족들과 간담회를 하는 모습이 목격이 되고 통역을 담당했던 사람으로부터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또한 당일 여수 지역의 한 신문에 공대위(여수)가 화재 진상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확보해 26일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는 공대위에서 전혀 논의된 바 없는 기사가 실린다. 이에 공대위가 신문사에 사실관계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자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추모제 장소에서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23일 여수지역 시민 추모제가 있었고 추모제가 끝난 후 저녁 공대위(여수) 집행위원회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 공대위 일부 대표들이 공대위에서 합의된 내용에 반하거나 혹은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부분에 관해 여수 현지 시민단체들과 상황실 활동가들로부터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후 전체회의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심도 깊게 토론하는 것으로 결정이 날 무렵 갑자기 관련 공동대표들이 제기된 문제에 해명을 하겠다며 집행위원회 참석을 요청했다. 그들은 23일 오전 유가족 면담에 대해서는 유가족들의 요청이 있어 공대위의 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를 했다는 점을 그리고 기사에 대해서는 결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해명했다. 해명 이후 활동가들이 공동대표에게 공대위 전체의 합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해 줄 것을 요구하자 관련 공동대표는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며 고성을 지르고 손가락질을 하며 집행위 참석자들에게 공식 회의석상에서 하대를 하는 상식 이하의 행동을 했다. 회의는 파행적으로 중단된다.

  이날 유족들은 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이주노동자들이 희생자 영정을 들었다. [출처: 이주노동자방송국]


다음 날 피해자 가족들은 자체적인 공식 회의를 통해 25일 서울 집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25일 서울역에서 개최된 여수화재참사 희생자 추모 및 정부규탄집회는 유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개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과 한국 사회운동의 분노를 반영하여 2003년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투쟁 이후 최대 규모(1천명)의 집회가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다. 당일 집회 행진신고가 정부의 탄압으로 불허되었지만 현장에서 연행될 경우 바로 보호소에 구금되거나 추방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쓴 이주노동자들과 한국 사회운동단체들의 투쟁을 통해 청계광장까지 인도행진을 쟁취하고, 행진 중 지속적으로 차도진출을 시도하면서 저 파렴치한 정부에 대한 규탄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갈등과 혼란

그런데 이 날 집회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당일 집회에서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이주노동자운동의 역사를 되짚으며 “초기 단계 민주노총 차원에서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사실 지금 여수참사대책위가 꾸려져 있지만, 일부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며 “저는 부위원장을 떠나서 그 단체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그 단체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이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시킬 것(민중언론 참세상, “경찰 통제로 얼룩진 여수참사추모대회” 인용)”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외노협은 당일 집회 중간에 대부분의 대오를 뺐다.

물론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같은 대책기구에 포함된 단체를 해당 대책기구가 주최한 행사에서 ‘추방’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비판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연대운동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발언은 당시 정황을 돌이켜 보았을 때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4대 요구를 기반으로 한 공동의 합의와 공동의 행동을 중심에 둔 공대위의 연대운동 원칙은 이미 외노협 일부 대표자들에 의해서 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 유가족들의 분노와 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운동 진영의 투쟁의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일부 공대위 소속 단체 대표들은 분노에 찬물을 끼얹고 연대전선에 갈등과 혼란을 불러 왔다. 물론 피해자 가족들이 결국 서울 집회에 참석을 하지 않은 것은 단지 공대위 일부 공동대표들의 영향만은 아니었다. 24일 오전에 중국 대사관에서 ‘외교적’인 수사로 공대위 주최 집회에 참여하지 않기를 권고하는 연락을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냈으며 이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공대위의 외노협 소속 대표들이 공대위 전체의 합의와 무관한 돌출행동을 하며 피해자 가족들의 투쟁이 상승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연대운동의 혼란을 가져 옴으로써 당시 한국과 중국 정부와 공대위 사이에서 동요하던 피해자 가족들이 투쟁전선에서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공대위로서는 피해자 가족들의 투쟁을 상승시키고 연대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3시기(2월 25일~3월 12일) : 경찰 최종 수사 결과 발표와 대응, 전반적 교착상태

이런 상황에서 25일 서울 집회 이후 서울과 여수 공대위 합동 상황실 회의가 열렸다. 물론 여수-서울간 긴밀한 소통의 회복과 25일 집회를 전후로 한 공대위 내 혼란 및 갈등에 대한 명확한 평가와 문제 해결이 주요 안건이었다. 공동 상황실 회의는 많은 논란 끝에 결과적으로 지금은 공동의 투쟁이 한창이므로 구체적인 평가는 이후로 미루고 지금은 공동의 4대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투쟁에 모두 매진할 것과 이후 활동은 공동의 합의와 공동의 결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회의의 결정은 실현되지 못했다. 외노협 소속 대표자과 여수 현지에 결합했던 활동가들은 이미 23일 여수 추모제 이후 투쟁 전선에서 물러났다. 외노협 출신의 활동가들은 그 날 이후로 여수 현장에서 퇴각했고 공대위(서울)의 활동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반면 외노헙을 제외한 공대위는 25일 집회 이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여론을 확대하기 위해 거리 추모제 등의 이후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정부의 책임전가 “직접 증거는 없어도 방화범 인정”

이런 상황에서 3월 6일 경찰의 사망자 한 분을 “점화를 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으나 본 사건의 방화범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최종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경찰이 내세우고 있는 근거는 매우 불충분할뿐더러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화재 당시부터 있었던 것인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 멀쩡한 라이터를 방화도구로 지목을 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엇갈린 진술을 하고 있는 몇몇 진술자의 증언의 일부만을 채택하고 있다. 더구나 화재 발생 후 9분이 지나서야 소화기를 든 당직직원의 모습이 CCTV에 처음 잡히고(세계일보 2007. 2. 13.) 그 때에서야 화재신고가 접수되었으며 대피 과정에서 도주 방지에 치중하여 화재 발생장소 바로 아래층의 보호실에 재수감하는 등 인명을 구출하기보다 가둬두는 데 급급한 출입국관리직원들의 태도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보호소’야말로 대형참사가 발생한 직접적 원인이 분명함에도 정부는 이를 마치 부차적인 원인인 것처럼 호도했다.

[출처: 이주노동자방송국]


이후 3월 8일 법무부는 피해자 가족들을 상대로 국가배상절차 설명회를 갖고 본격적인 배상 처리에 나선다. 당시 그리고 이후에도 피해자 가족들은 정부와 공대위 사이에서 계속 동요했다. 공대위는 유가족들에 공대위 소속 법률지원단 변호사들과 공동 협상단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피해자 가족들은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이미 1달이 넘어 가는 투쟁 속에서 쌓인 피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사건 초기 현장을 장악하지 못하고 그들의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되던 기회를 놓친 것이 컸다. 결국 유가족들은 독자적으로 법무부와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고 13일부터 협상이 시작되었다.

4시기(3월 13일~현재) : 배상 협상의 본격화와 공대위 내부 정비, 외노협의 독자 행보

국면이 변하고 있었다. 이번 투쟁의 중요한 주체인 피해자 가족들이 사실상 공대위의 영향권을 넘어서고 있었다. 정부는 이번 사건을 한 이주노동자에 의한 ‘사고’로 규정짓고 배상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었다. 단속추방 중단, 보호소 폐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라는 핵심적 요구를 관철시키기에 객관적 정세와 주체적 역량의 간극이 너무 컸다. 공대위의 자체 정비와 주체 역량의 강화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에 따라 공대위는 14일 전체회의를 거치며 공대위 참가 조직들의 태세를 정비하는 한편 여수 화재참사의 당사자이기도 한 이주노동자들을 이후 투쟁의 주체로 조직하는 데 활동의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모아 4월 1일 집회를 대중적으로 성사하고 이후 투쟁을 위한 힘을 모아 나가기로 한다. 또한 15일 “공대위 주최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통해 바라 본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인권” 토론회를 개최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정부에 재차 요구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외국인보호소에 대한 실태 조사를 인권위와 민간단체가 함께 할 것을 제안하며 대정부 전선을 강화하려 했다.

외노협, 잠정활동 중단 선언
기독교 회관에 농성장 따로 설치


한편 외노협은 14일 전체회의에서 25일 집회에서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발언을 “사실을 왜곡하여 매도하는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규정하고 공대위가 “사전에 발언자와의 충분한 협의를 통해 집회의 취지를 전하고 발언 내용을 점검하며 연대집회의 성격에 적합한 발언을 하도록 하지 못한” 책임이 공대위에 있으므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책임 주체에게 명확한 해명과 사과”를 이끌어 낼 것을 요청한 후 이에 대한 공대위의 공식적 입장이 결정될 때까지 공대위 활동을 잠정 중단할 것을 선언하고 회의에서 퇴장한다. 앞서 살펴 본 대로 25일 집회에서 발생한 상황은 그 자체로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노협이 이 발언 하나만 문제 삼으며 사안별 대책기구인 공대위에게 해명과 사과를 이끌어 내라는 과도한 요구를 하며 일방적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한 것은 잘못된 태도였다. 외노협은 25일 서울/여수 공동 상황실 회의에서 결정되었던 대로 당시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후로 미루고 현재의 투쟁에 집중하였어야 했다. 이미 외노협은 공대위의 공식적 입장을 요구한 그 시점에 독자적인 활동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20일 기독교회관에 농성장을 차리고 독자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문제 해결사가 아닌 이주노동자의 자기조직화
운동사회도 자기과제 인식 미흡


앞서 보았듯이 2월 20일에서 25일의 기간이 이번 투쟁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하고 공대위와 신뢰를 조금씩 형성하던 그 때, 그리고 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이 공대위 활동에 결합하고 연대가 확장되던 시기에 공대위(여수)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외노협 소속 단체의 대표들은 막 불이 붙던 피해자 가족들의 분노에 찬물을 끼얹고 공대위를 중심으로 하는 연대의 전선에 혼란과 갈등을 불러 왔다. 물론 당시 운동의 객관적인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여론의 관심은 점점 식어 가고 있었고 공대위는 형세를 역전시킬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피해자 가족들 역시 공대위와 법무부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2월 20일~25일은 이러한 객관적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리고 한번 놓쳐 버린 기회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 투쟁에서 외노협 일부 대표들은 타협주의와 대리주의, 자기중심주의라는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 이들은 대중들의 능동성과 대중운동의 가능성보다 자신들의 협상력을 과신하고 우위에 둔다. 투쟁의 과정에서 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하기보다는 스스로 문제의 해결사가 되려고 한다. 연대의 틀 속에서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여 함께 투쟁하여 함께 전진하기보다 자신들이 상황을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노협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러한 타협주의, 대리주의, 자기중심주의 경향은 매번 중요한 투쟁의 시기에 이주노동자운동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었다. 2003년 명동성당 농성투쟁에서, 2006년 누르 푸아드 사망사건에 대한 규탄 투쟁에서, 그리고 2007년 여수 화재 참사 규탄 투쟁에서 지겹도록 되풀이되어 왔다. 이번 투쟁을 계기로 이주노동자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아 온 이러한 잘못된 경향이 명확히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현실 운동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으로 말해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건강한 운동의 경향이 아직 미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평가한 부분이 오류였다면 이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연대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주류는 이주노동자운동을 자기 활동의 중심과제로 설정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인 조직도 대중적인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 공대위 역시 이번 투쟁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고무하고 지원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이주노조와 공동체들의 공동 기자회견이 있었지만 이후 투쟁 과정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광범위한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조직하는 활동이 미약했고 이주노조 등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조직이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도 부족했다.

반인권적 이주정책 폭로
법무부 이주정책 제도개선 압박 성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와 지난 50여 일의 투쟁은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이주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성과들을 남겼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들이 처하고 있는 끔찍한 현실이 폭로되었고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운동의 성장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던 단속추방 정책과 외국인‘보호’소의 반인권적 측면이 폭로되었고 정부가 적어도 일부 상황을 개선할 수밖에 없는 실질적인 압력이 되고 있다. 지난 3월 말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선별적으로 합법화하는 방안을 비롯하여 제도개선을 고민하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주노동자운동의 전국적/일상적 연대 강화로!

이번 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연대의 폭과 깊이가 커졌다는 점이다. 그 동안 이주노동자운동에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못했던 많은 사회운동단체들이 공대위에 참가하는 등 연대의 폭이 확장되었다.(현재 공대위 참가 단체는 무려 80여개에 이른다.) 오랫동안 이주노동자운동을 함께 해 온 각 단체들의 연대의 수준도 높아졌다. 이른바 회의에 참석하는 담당자들만 단체 깃발을 들고 집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체 소속 회원이나 기본 단위가 여수 화재참사에 대해서 직접 시민들을 만나고 알리며 보다 주체적으로 활동에 동참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공대위들이 만들어지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통합력을 높여 가기 위한 소통을 시도해 이후 이주노동자운동의 전국화의 기반이 더욱 튼튼해 졌다. 이제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지난 투쟁의 오류와 한계를 넘어 새로운 전진을 시작해야 한다.
일단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단속추방과 강제구금의 반인권성을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확산해 나가야 한다. 현재와 같은 단속추방은 이주노동자들이 정치적 활동은커녕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현장에서의 일상적인 투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주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있다. 또한 정부 이주노동자 정책과 제도의 반인권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보호소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 활동, 단속추방 현장에서의 항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매개로 노동허가제 쟁취로 나가자!

그리고 단속추방이 아닌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전면적인 합법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이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넓혀 가야 한다. 특히 정부의 선별적 ‘합법화’ 방안에 대한 이주노동자운동의 통일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법무부가 고민하고 있다는 선별적 ‘합법화’ 방안은 고용허가제 양해각서(MOU) 체결국가의 국적을 가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자진출국시 이후 입국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과 MOU체결국가 출신 불법체류자는 약 7만명으로 전체 불체자의 35%를 차지하고 있는데 중국과 다음달 양해각서가 체결될 경우 합법화 대상 이주노동자는 16만 명으로 늘어나 전체 불법체류자 80%가 합법화의 혜택을 받게 된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20%의 이주노동자는 합리적 근거 없이 합법화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진출국 후 재입국 보장은 출국 후 입국을 위해서는 해당 나라에서의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재입국 보장은 사실상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서 이는 ‘합법화’라기 보다는 ‘자진출국 유도’에 가깝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합법화는 체류기간 등과 상관없이 현재 거주하는 모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해야 하며 자진출국 등의 전제 조건이 없는 즉각적인 조치여야 한다. 더구나 현재의 고용허가제로 편입되는 합법화 방식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온전히 보장하고 있지 않은 고용허가제 하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또다시 양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운동 진영은 정부의 기만적인 선별적 ‘합법화’ 방안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전면적인 합법화를 위한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후 투쟁을 힘 있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운동 태세의 정비가 시급하고 중요하다. 여수 화재참사공대위에 함께 했던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조직을 강화하고 지원하는 연대, 대중투쟁에 중심을 두는 연대, 일상적인 연대, 전국적인 연대 운동과 조직을 형성해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번 투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연대운동의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 또한 이주노조를 비롯하여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들의 연대를 활성화하고 통합력을 확대해야 한다. 특히 만약 정부의 선별적인 ‘합법화’ 방안이 현실화 될 경우 2003년과 같은 혼란이 예상되는 바 이주노동자들 스스로 이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중심으로 단결된 전선을 형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번 투쟁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의 두터움에 비해 아직 여전히 부족한 주체적 역량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한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이번 투쟁의 성과들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자.
덧붙이는 말

공성식은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로 여수외국인보호소화재참사 공대위 상황실에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2007년 4월 사회운동에 실린 '과거를 딛고 내일을 향해 쏴라 :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이후 50여 일간의 투쟁을 돌아본다'를 부분 수정, 보완 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