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인 피랍 사건이 발생 5일째로 접어들며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랍된 한국인들은 현재까지 안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한국 정부는 가능한 모든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민족복지재단 대국민 사과, "진심으로 사죄. 모든 봉사활동 중단"
이번 사건이 발생하자 기독교인들의 이슬람 지역에서의 무분별한 선교 활동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와 함께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피랍 당사자들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즉 이미 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여행제한'이라는 여행경보를 발령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선교(봉사) 활동을 하다 화를 자초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해외에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라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 정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국민여론을 의식한 듯 피랍 한국인들의 아프가니스탄 선교활동을 주선한 한민족복지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분당 샘물교회 박은조 담임목사는 23일 "국민들에게 염려를 끼친 것에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이날 한민족복지재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는 모든 봉사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사실상 선교활동 중단의사를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역시 22일 성명을 통해 "위험 지역에서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한국교회는 선교지에서 대규모 인원 동원 집회나 이벤트식 행사를 중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탈레반의 '정치적' 요구에 답하는 방식은 '종교적'?
기독교의 무분별한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그것 자체로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또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독교계의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번 사태를 '종교적' 문제, 즉 '기독교 대 이슬람의 대립' 식으로 접근하는 시각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일 뿐더러, 사태해결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외신보도 등에 따르면 탈레반 측의 요구 중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한국군의 즉각 철군, 또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붙잡혀 있는 탈레반 동료들과 한국 인질들과의 맞교환이다. 이렇듯 탈레반 측은 명백히 정치적인 두 가지 요구를 제시하고 있다.
탈레반 측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상대국인 '적국' 미국의 동맹국 자격으로 자신들의 영토에 주둔 중인 한국의 군대는 마찬가지로 '적국'이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한국군에 대해 아무리 '재건활동을 담당하는 비전투부대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더라도 탈레반 측의 시각에서는 자신들을 침략한 미국의 동맹군 이상의 의미는 없다. 결국 탈레반은 이런 상황인식 아래 전쟁상대국인 한국의 민간인들을 인질로 잡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코자 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피랍자들의 선교활동이 화를 불렀다'는 식으로 이번 문제를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만일 종교적 갈등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면, 탈레반 측의 요구는 '한국군 철군과 병사들의 석방'이 아니라, '이슬람 지역에서의 선교단 철수'가 되었어야 했다.
'대국민 사과'해야 하는 이들은 한민족복지재단뿐일까?
그럼에도 한국정부와 국내 언론은 이번 사건의 본질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듯하다.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참하고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해 끝내 고 김선일 씨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똑같은 불행이 재연될지 모르는 사태가 발생한 지금, 노무현 정부와 그에 동조한 정치세력들은 한마디 말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피랍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조속한 석방을 위해 관련된 사람들과 성의를 다해서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피랍된 우리 국민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04년 고 김선일 씨 사건 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라크 무장단체의 요구에 노 대통령과 한국정부가 단호하게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없다"며 '파병 철회 불가' 입장을 밝힌 뒤 김선일 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국민의 안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국민과 교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었다.
자국민 안전 소망한다면, '여행금지' 아닌 '파병정책' 재검토를
고 김선일 씨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참한 한국정부의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를 외면한 채 이번 사태를 '기독교 대 이슬람' 식의 종교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9.11 테러를 야기한 부시 행정부의 논리가 그러했고, 대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상황이고, 미국 내에서조차 부시 대통령은 궁지에 몰려있다.
한국정부가 이번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고, 앞으로 재발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현재의 해외 파병 정책이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반전평화단체들은 주장하고 있다.
재발방지를 위해 내놓는 정부의 대응방안이 기껏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 국가로 지정하는 수준이 되어선 안 된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자 외교통상부는 21일 아프가니스탄을 '여행제한'에서 '여행금지' 국가로 지정하는 한편, 체류 중인 교민들의 철수를 강력 권유했다.
만약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안했더라도, 이번 사태가 발생했을지 의문이다. 전 세계에는 수많은 분쟁국가들이 있고, 위험지역이 존재한다. 세계 어디서나 한국인들은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해외에서 발생한 한국인 사건사고 피해자는 2천4백88명에 달한다. 이중 중국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 한국인 피해자 수는 8백 50명에 육박한다. 위험의 확률로만 따지자면, 중국이야말로 '여행금지' 조치를 취해야 하는 나라인 셈이다. 그 다음으로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순이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이 모든 국가들에 대해 '여행금지' 또는 '여행제한' 조치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해외 어디서나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 위험은 '정치적'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서나 강도를 만나고, 납치 또는 사망사고를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을 전쟁상대국으로 설정하고 있는 세력들이 존재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이고, 그 같은 국가들은 한국이 먼저 군대를 파병한 나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