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일 성공회대 연구자와 금민 한국사회당 전 대표 간에 '사회적 공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둘은 반론과 재반론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난 25일 금민 전 대표가 기고한 '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 글을 보내왔고, 이에 대해 이광일 연구자가 마지막 반론이라며 기고를 했다.지금까지 논쟁된 글은 '칼럼주장' 게시판에서 볼 수 있다.
-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이광일. 1월17일)
-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고 있다 (금민. 1월21일)
- 금민 씨에 대한 답변 : ‘현자와 바보’(이광일. 1월23일)
- 사회적 공화주의, 달과 손가락 (금민. 1월25일) - 편집자 주
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대체로 각기 두 번 정도의 글로 끝난다. 아마도 두 번 정도면 서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필자와 금민 씨도 각각 두 번의 글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금민 씨는 필자가 제기한 핵심문제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한국사회당 강령의 내용을 반복하여 인용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 필자의 비판이 애초 ‘개념논쟁’이었다고 스스로 규정하며 피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오해’, ‘의도적 왜곡’ 등의 수사를 붙이고 있다. 이번 그의 두 번째 반론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의도된 왜곡’이 필자가 ‘모종의 입장’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필자도 알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추측성 글은 쓰지 않는 것이 좋고, 만일 그 ‘모종의 입장’에 대해서 금민 씨가 알고 있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논쟁을 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예의라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첫째, 필자는 지난 반론의 글에서 ‘사회적 공화주의’와 ‘민주공화국’에 대한 금민 씨의 견해를 ‘하나의 해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금민 씨의 말처럼 ‘사회적 공화주의’가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고 전략이라면, 그리고 아직 현실 속에서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에 이르는 경로를 강령에 반영하는 것은 여전히 당면한 핵심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왜 ‘사회적 공화국’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지, 그 장애를 만드는 역사적인 사회관계들, 그 안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잘 숙고하여 내용을 풍부히 담아내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정치’라고 표현한 것이고 이른바 ‘사회적 공화주의’로 상징되는 한국사회당 강령에 비어 있는 가장 커다란 한계로 지적한 사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금민 씨의 반론에서는 정작 이에 관한 그 어떤 주석도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해 금민 씨는 그의 재반론의 글에서 필자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는 그 강령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다시 인용하면서 그것이면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특유의 ‘논리학강의’를 하면서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을 ‘민주공화국’의 ‘역사적 선행형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필자가 ‘모종의 입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먼저 필자는 금민 씨가 한국사회당의 강령에 비어 있는 ‘정치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 다시 묻고 싶다. 필자로서는 금민 씨가 재반론의 글에서 충분한 답변으로 생각하며 인용한 “국민대중의 복지...(중략)... 일은 불가능하다.”를 그에 대한 답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을 ‘민주공화국’의 ‘역사적 선행형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비판하기 위해 끌어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논쟁’을 좋아하는 금민 씨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정치개념’은 이런 것이고 필자가 질의한 것은 강령에 이렇게 표현, 반영되어 있다고 답하는 것일 게다. 그런 다음에 필자를 비판하고 문제제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필자가 금민 씨의 해석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필자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그 답을 듣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운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라면 필자는 그에 관해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따라서 이제 필자는 금민 씨가 그토록 문제 삼는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의 관계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좀 더 집중하여 재정리하고자 한다. 과연 금민 씨에게 얼마나 이해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한국사회당의 ‘탈배제강령’의 실현을 위한 ‘탈배제운동’의 ‘끝’은 어디인가. 이것은 목적론적인 역사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그것이 도달하는 끝은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것은 ‘꼬뮨’이라고 하든 머라고 하든, 금민 씨도 인정하듯 ‘배제와 차별이 제거된 공동체’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것은 분명히 ‘현재가 아닌 미래의 목표’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그 ‘꼬뮨’을 목표로 하는 ‘탈배제운동’의 성과는 금민 씨가 그토록 강조하는 ‘사회적 공화국’ 등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회적 공화국’은 필자가 말한 바대로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그것이 ‘꼬뮨’으로 단번에 나아가기 힘든 ‘현실의 조건들’ 때문이다. 필자는 「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에서 “‘사회적 공화국’이 실현되면, 최소한 ‘민주공화국다운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라고 해석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최소한”, “~다운”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런 현실의 조건들, 장애들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계속해서 금민 씨에게 그러한 ‘사회적 공화국’을 위해 불가피한 ‘현실의 조건을 재구성할 정치’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탈배제운동’은 한편으로 ‘미래의 목표’를 함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그 미래는 현실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운동들의 성과 - 이것은 금민 씨에게 ‘사회적 공화국’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 를 끊임없이 지양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이전에 ‘탈배제운동’과 ‘민주공화국’의 관계를 문제시하면서 한편으로 ‘민주공화국’을 ‘꼬뮨’과 동일한 것으로, 다른 한편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2단계나 3단계, 혹은 긴 하나의 장기과정이 될 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이행기 국가’로서 ‘사회적 공화국’은 복수의 역사적 현실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해석했던 바, 그것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금민씨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꾜뮨 그 자체의 상태”와 “꼬뮨으로의 과정”이라는 두 측면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금민 씨는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이 논리적인 가능조건, 혹은 논리적인 구성적 조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도출이 어떻게 가능한 지 필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재반론의 글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필자가 ‘모종의 입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관심법’을 제기하여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에 근거하여 금민 씨가 필자를 비판하는 한 가지 이유는 필자가 ‘사화적 공화국’을 시간적 선후관계에 근거하여 ‘이행기국가’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 데, 필자는 그 양자가 논리적으로 ‘기능적 혹은 구성적 조건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금민 씨의 해석 자체를 부정한 적이 없다. 다만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리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역사적 사회관계들, 정치관계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문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금민 씨가 필자의 문제제기를 ‘개념논쟁’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금민 씨가 강조하는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 그 자체, 전략일 수 있음을 ‘선험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사회적 관계들과 조건, 거기에 담겨 있는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의 정치를 고려할 때, 그것은 ‘미래의 목표인 꼬뮨’으로서의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이행기형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바로 이런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하기에 필자는 지난 글에서 금민 씨의 주장을 ‘하나의 해석’으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표현하면서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금민 씨가 그토록 역설하는, ‘주권자를 주권자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는 모든 국민의 국가’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고 ‘전략’이라면, 그것이 어떤 현실 관계, 정치 속에서 실현가능한 것인지 답변해 줄 것을 재차 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구체적 예로 ‘국민 모두의 국가, 국민공통성이 보장되는 국민공통의 국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의 관계를 논리적 가능조건, 혹은 ‘구성적 조건’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금민 씨의 비판은 온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현실 정치적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필자는 금민 씨의 그런 해석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데, 필자에게 무엇을 더 확인하여 얻고 싶어 하는 것인지 필자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금민 씨가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은 오직 자신의 ‘논리학’에 근거해 필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가 그렇게 했듯이 필자의 주장을 하나의 해석으로 인정한 후, 필자의 여러 질의에 답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논쟁을 그나마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현실적인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회관계들 속에서 한국사회당 강령의 한계와 빈 지점을 포착하고자 하는 필자에게 금민 씨의 그와 같은 논리적 해석은 해석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그 강령에 대한 금민 씨와 필자의 독해를 사회당 당원들이나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자고 하였던 것이다. 특히 금민 씨가 필자 본인도 알지 못하는 ‘모종의 입장’ 때문에 필자가 그렇게 인식했다는 판단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금민 씨가 필자와는 상이한 ‘모종의 입장’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기에 금민 씨는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금민 씨는 “왜곡”, “예사롭지 않다.”, “모종의 입장” 등 알 수 없는 언술을 동원하여 계속 필자의 발목을 잡으니 필자로서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금민 씨는 왜 이런 역설적 태도를 보일까. 왜 필자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필자의 문제제기를 주변화시키면서 자신의 논리에 갇혀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을 ‘이행기 국가’라고 해석한 것에 대해서만 그토록 집착하며 비판하는가.
무엇보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당강령에 필자의 질문에 부합하는 내용의 ‘정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거기에는 즉각적으로 실현해야 할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며 전략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의 실현을 위한 정치는 없고 오직 이런저런 현상의 서술과 정책만이 나열되어 있다. ‘사회적 공화국의 즉각적 실현’은 금민 씨가 심취해 있는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사회정치세력들 사이의 모순의 정치 속에서 그 가능성을 시험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강령은 그것이 보수정치세력의 것이 아니라면, 현상을 서술, 묘사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또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투쟁들과 연결된, 향후 걸어가야 할 ‘미래의 상’을 함께 그려야 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공화국’이 즉각적으로 실현해야 할 정치적 과제로 설정된 만큼 그것은 더욱 치밀하게 그려져야 한다. 그런데 그 강령의 어디에서도 이것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금민씨는 ‘탈배제의 구성원리’만을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 자체는 그 어떤 정치세력도 부인하지 않는 준칙이다.
다음으로 ‘탈배제운동’의 논리적 귀결점이 ‘미래의 목표인 꼬뮨’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금민 씨는 ‘추상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것을 배제하면서 즉각적 실천노선으로서의 ‘사회적 공화국’만을 유일한 실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리학’에 의해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의 ‘역사적 선행형태’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렸기 때문에 ‘이행의 문제’를 사유할 이론적, 실천적 필요가 완전히 없어지고 따라서 ‘사회적 공화국’을 즉각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 또한 무의미해 지는 것이다. 오직 ‘사회적 공화국’만이 ‘민주공화국’이고 전략 자체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반응은 ‘사회적 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라는 동어반복의 답만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미 지적한 바대로 ‘사회적 공화국’의 실현을 판단할 준거의 목록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주권자를 주권자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는 모든 국민의 국가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은 금민 씨의 ‘논리학’ 안에서는 구체적일지 모르지만, 필자의 정치학에서 그것은 그야말로 추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바로 진실이 이렇기에 대중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의문시하며,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반복하여 질문을 해도 금민씨 또한 그에 관해 의미 있는 적절한 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보완할 생각도 없기에 필자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금민 씨의 이러한 발상은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실천적인 현실 정치의 수준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필자는 ‘탈배제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탈배제운동’은 탈배제가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영역 등에서 불균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불균등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금민씨의 ‘탈배제운동’은 그것을 ‘꼬뮨’이라고 하든 그 무엇이라고 하든 실제로 ‘미래의 목표’와 단절되어 있기에 ‘현존하는 배제관계들’- 금민 씨에게 이것은 ‘허울뿐인 공화국’으로 상징된다 - 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하는 운동, 혹은 정치와 관련된 그 어떤 세력과의 연대도 배제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 이번 대선에서 한국사회당이 창조한국당에 대해 환호작약한 비밀이 담겨 있다.
금민 씨가 해석하는 ‘탈배제 강령’은 ‘이행의 정치’가 필요 없기에 정책의 친화성과 차별성만이 연대를 위한 유일한 준거가 된다. 금민 씨의 필자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둘 때, 어떤 역사적 이행을 설정하는 정치세력은 그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하지만, 필자처럼 ‘모종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규범적으로 무언가 부정적 뉘앙스로 규정되는 그런 사람들로 치부될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렇기에 오직 무수한 정책들만 있는 “사람중심 진짜경제”를 내세운 창조한국당에 환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우에서이지만 필자는 불균등하게 전개되는 이런저런 탈배제운동들과 연대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대할 것을 그 동안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창조한국당은 왜 안 되는가. 그것은 ‘자본의 당’이기 때문이다. 금민 씨가 말하는 ‘탈배제운동’, ‘탈배제의 정치’를 가로막는 ‘자본의 당’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본의 당’이 ‘배제와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정치와 함께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즉각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정치목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이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고 전략이라면, ‘국민 모두의 공통의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금민씨는 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한마디 답도 하지 않는다. 자본과의 대결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진행 중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금민 씨가 필자에게 실천적, 현실 정치적 차원의 논쟁을 하자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이다. 논리적 수준에서 역사적 ‘이행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시켜 놓은 채, 즉 논리학으로 정치학을 구축시켜버린 채, 어떤 역사적, 실천적 논쟁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이 창조한국당에 대해 그랬던 것과 같은 정책경쟁 수준의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또 이에 대해 구체적 정책을 무시한다고 비판할 것인가.
둘째, ‘급진민주주의’와 ‘사회적 공화주의’의 관계이다. 먼저 금민 씨는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를 급진민주주의와 동일시했다.”고 주장한다. 진정 그런가. 필자는 여러 차례 “사회적 공화주의는 급진민주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판본”이라고 주장했다. 개념에 심취하는 금민 씨가 이 차이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모를 리 없겠지만, 모른다면 더욱 숙고하기 바란다.
그런데 금민 씨의 이러한 행태는 이번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민 씨는 지난 반론의 글에서도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와 ‘탈배제강령’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하여 필자가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폈는데도, 이번 재반론의 글에서 그것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이런 행태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금민 씨가 필자에게 즐겨 사용하는 “의도된 왜곡” 아닌가. 그런데도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뒤죽박죽 만든다.”고 필자를 탓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오히려 ‘논리학’과 ‘정치학’을 혼동하는 금민 씨야말로 이런 자의적 전제 위에서 필자에 대해 반론을 펴니 이 논쟁이 최소한의 생산적인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고 무언가 겉돌고 있는 것이다.
금민 씨는 교과서의 개념을 가져와 강의하는 데는 익숙한 듯하나, 그것을 현실과 관련하여 사유하는 것에는 예민하지 못한 듯하다. 즉 자신의 논리를 현실 정치적 도구로 다듬어야 하는데, 논리학에 빠져 있는 금민 씨에게 그 가능성을 찾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금민 씨의 한계는 그가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일반의 구성적 조건에 관한 이론이며,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화주의’도 ‘급진민주주의’의 구성적 조건에 대한 이론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다시 엿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와 ‘급진민주주의’를 동일시했다는 그 나름의 이해에 근거한 주장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왜곡’과 무관하게 그는 역으로 ‘민주주의가 공화주의의 구성적 조건이며 따라서 급진민주주의가 사회적 공화주의의 구성적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결과는 그가 민주주의를 ‘다수의 지배’로 인식하는 현상적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다. 급진민주주의가 무엇보다 다양한 영역의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 안에 내장된 권력관계들의 해소, 극복에 주목한다는 점을 그가 간과하지 않고 있다면, 그렇게 단순하고 단호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이전의 글에서 필자가 지적한 바대로 바로 그러한 부당한 현실의 관계들을 해소, 극복하는 것, 즉 민주주의의 확장이 역으로 주권을 주권답게 하여 ‘공화주의’ 혹은 그의 ‘사회적 공화주의’를 강화시키는 내용이 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에 ‘민주공화국’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은 그가 급진민주주의와 그가 말하는 ‘탈배제운동’, ‘사회적 공화주의’의 관계를 현실 정치적 차원에서 인식하는데 인색하기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필자는 금민 씨가 그의 ‘논리학’을 무기로 다시 자신의 해석을 반복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논쟁의 과정에서 금민 씨는 여러 ‘주관적 용어’를 사용하여 필자를 비판하였다. 물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그것들은 오히려 그에게 돌려져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정치인인 그가 이러한 논쟁이 논쟁 그 자체에 의해 끝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터인데도 그러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아직 그가 ‘철인정치가’이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논리학강의’에는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정치학강의’에는 확실히 부적절하다. 필자는 금민 씨의 논리적 해석 그 자체를 존중하는 위에서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하였지만, 금민 씨는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필자의 질의에 어떤 의미 있는 답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이라곤 필자가 ‘사회적 공화국’을 ‘이행기국가’로, 그의 표현대로 ‘역사적 선행형태’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전부이다.
필자는 ‘무언가 겉도는 이 논쟁의 과정’을 통해 금민 씨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사회적 공화주의’로 상징되는 강령을 그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논리적 완성태’로 확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금민 씨는 자신의 강령에 대한 이런저런 다양한 문제제기들을 필자를 포함한 대중들이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지금 필자가 금민 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은 교육과 계몽의 기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교도(敎導)하라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오해’, ‘의도된 왜곡’ 그리고 ‘모종의 입장’으로 점철된 이 논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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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 연구자로, 민주자료관 부관장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