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치르기 위해 싸웁니다

[칼럼] 명박산성의 트라우마 넘을 용산참사 백 일

어깨 가득 삶의 무게에 고단한 하루를 이어가는 자, 차별과 억압에 고통을 느끼는 자, 게다가 최소한 이를 넘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자, 그 누구에게라도 요즈음처럼 힘든 세월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 역시 최근에 무너진 삶을, 불면의 밤을 술에 의지해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2003년 비정규노동자들의 자살정국을 지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다니던 학교 때려치우고 노동현장에 들어간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술에 의지해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는 조울증이라고 엉터리 진단을 해주기도 했습니다만, 한 3년을 그러고 살다 겨우 일어나 힘을 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병이 도지고 있습니다. 지금 웃고 있어도 울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 웃고 있습니다.

간절하고 단호한 유족 앞에 범대위가 부끄럽습니다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던 재개발조합원 회보의 표현 그대로 하자면 “조합원들의 재산증식을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용산 4지구 재개발조합과 그들에 의해 고용된 용역깡패에 그리고 삼성물산건설과 경찰에 쫓겨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그 철거민과 같은 형편입니다.

경찰의 폭력에 의해 범대위는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채 저는 한 일도 없이 체포영장이 발부되었고, 잡혀갈 수는 없어 유족이라는 망루로 도피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되었고,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습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럽기 한정이 없습니다. 양회성 열사의 아들이 경찰에 밟혀 연골이 파열되어 수술을 받고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그 이름이 낯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렇게 어이없는 범대위를 바라보는 유족들의 눈빛은 간절하기만 합니다. 열사투쟁을 하다보면 경찰이 인맥을 동원하여 돈으로 매수하고 회유해서 유족이 먼저 흔들리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꾸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회유조차 단호히 거절할 뿐만 아니라 왜 좀 더 ‘빡시게’ 싸우지 않냐고 은근히 강박을 하십니다. “유족들께서 시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모연대 한 활동가의 얘기는 더욱 가슴을 시리게 합니다. 저는 몇 장의 사진만을 보았을 뿐인데 불에 녹아서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부검에 도저히 더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참혹합니다.

그리고 두 분 정도는 시신의 상태를 볼 때 불에 타서 돌아가셨다기보다는 맞아서 실신하거나 돌아가신 상태에서 불에 밀어 넣어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다보니 진상규명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합니다. 국민참여재판이 검찰의 방해로 무산된 이후 유족들께서 시신을 공개하겠다는 발언이 잦아지는 것도 이에 연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범대위에 기대하는 이유, 물러설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다시 용산으로 용산으로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경찰이 침탈해 올 것에 대비해서 전철연 식구들께서 규찰을 서고 계십니다. 그 분들 중에는 상도 철대위에서 오신 80세 중반은 훨씬 넘어보이는 분도 계시고, 도화 철대위에서 오신 뜨개질 할머니도 계십니다. 염치도 없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철연에서 규찰 빼려고 하니 절대로 못 빼게 하신답니다. 그만큼 그 분들의 분노가 크십니다.

용산참사가 있고 난 직후 르뽀작가들이 구술을 받아 엮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책에 “집 평수 넓히려는 사람들 마음속에 폭력이 있어요”라는 지금은 구속되어 있는 인태순 씨의 얘기대로,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산증식에 지워진 한평생의 흔적이라도 되찾고자 하는 집념이 있기에 말릴 수가 없습니다. 윤용헌, 이성수, 한대성 세 분 역시 검찰이 얘기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순화동에서, 신봉동에서, 신동에서 철거로 무너진 삶의 희망을 되찾기 위해 용산에까지 오셨다 어이없이 산화해 가신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검찰과 경찰은 전철연을 박살내겠다고 덤비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열네 분이 구속되었는데 철거민대책위마다 소환장을 남발하고 있고, 그간 전철연의 이름으로 싸워서 이긴 50여 군데 다 뒤져서라도 전철연의 씨를 말리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남일당 건물 뒤편 레아라는 호프집을 손봐서 2층에는 촛불미디어센터, 1층은 그림전과 만화전이 열리는 전시회장으로 개소를 했습니다. 그 집은 고 이상림 열사가 20여 년 돼지갈비집을 해서 애들을 키운 곳입니다. 이제 연로하신 아버지 뒤에 서시게 하면서 함께 레아라는 호프집으로 바꿔서 운영하던 아들 이충연은, 검찰의 수사결과에 따르자면 아버지를 화염병으로 태워죽인 죄로 구속되어 있습니다. 그 앞은 매일 미사를 올리고 계시는 문정현 신부님이 기거하시는 종교인의 집이 있습니다. 고 양회성 열사께서 요리사가 되려는 아들과 함께 전재산을 부어 만든 삼호복집은 촛불시민들이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집에서 가게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은 서로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이제 용산4지구에 다시 입주 바람이 불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이유는 용역깡패, 재개발조합, 삼성물산건설, 용산구청, 서울시에 맞서 그리고 폭력경찰, 이명박정권에 맞서 다시한번 싸워볼 새로운 희망의 싹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부산에서도 열리고 있는 망루전, 거제에서, 서산에서, 원주, 전주, 대구에서 전국의 곳곳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촛불의 꽃과도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조문도 하고, 거리모금도 하고, 조직차원의 모금도 하고, 구술집도 사고, 망루전 그림도 사고, 유족돕기 음악회 표도 사고해서, 아닌 말로 이중, 삼중, 사중 과세를 해도 웃으며 도와주시는 그야말로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낙향하신 정광훈 의장님이 크게 한 상자 김치를 보내주시고 농민들이 쌀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당과 수녀회에서 모금도 해주시고 게다가 쌀, 김치, 라면, 복사용지, 손수 기른 상추까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다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렵습니다만 초등학교, 중학교 어린 친구들이 유족들께 힘내시라고 편지 쓰고 사탕도 넣어서 소포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민중미술을 하시는 화가들은 기꺼이 그림을 그려 주셔서 망루전을 열었고, 전국에서 연극하시는 분들께서 금요일마다 연극제를 열어 힘을 주십니다. 평상시 집회에서부터 음악회까지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 앞에 나서시고, 시인들은 시를 쓰고, 작가들은 당신들의 책을 가지고 와서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용산참사 유족에게, 삶을 파괴하는 철거에 맞서 싸우는 철거민에게는 가장 큰 힘입니다.

그리고 종교인들의 기도야말로 힘이 되고 있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반대투쟁을 전국투쟁으로 이끌던 꽃마차를 남일당 건물 앞에 세우고, 수술해야 하는 어깨의 고통을 감추시며 미사를 집전하고 계십니다. 그 분들은 도심 한가운데 호형호제하던 동지를 그리고 자식이 아버지를 태워죽인 테러라고 우기면서 은폐하고 차단하고 스스로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도심테러의 동조자이겠지만, 방패와 곤봉과 물대포 그리고 사찰에도 꾸역꾸역 모여들고 몸으로 항거하고 있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희망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 장례를 치를 수 있을지

작년 전국을 태웠던 촛불, 그것은 집권 3개월만에 무장해제당한 이명박에게도 그리고 100만이 모여도 명박산성을 넘지 못한 우리에게도 트라우마인 것 같습니다. 이명박은 작년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인파에서 울려 퍼지던 아침이슬을 들으며 절치부심한 바, 촛불투쟁의 뒷청소를 하듯 그에 반하는 어떠한 표현과 행동조차 용납을 않으려는 듯합니다. 특히 용산참사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집시법에 신고사항도 아닌 추모대회조차 가로막고 집회신고에는 단 한 번의 예외없이 금지통고를 해왔습니다. 한편 추모행사에 참여하려는 인파가 어른거리기만 하면 전경차로 차단하고 전경을 앞세워 공격적인 방어에 나섰고, 초기 만 명을 넘나드는 대중들의 분노를 용산참사로부터 분리하는데 효과를 본 듯합니다. 도로교통법, 집시법 등으로 김태연 상황실장은 구속되었고 저와 박래군 공동집행위원장 2명이 수배되고 상황실 활동가들은 계속하여 소환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용산참사 투쟁과 관련된 것으로 믿고 있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전문시위꾼이라는 훈장을 달아 소환장을 발부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는 여전히 촛불이 되살아날까 싶어 기겁을 하는 듯합니다.

장례는 지내야 하는데 장례를 지내기 위해서는 싸워야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언제까지 어떻게 싸워야 할까. 장례는 뒷전이고 범대위는 이명박퇴진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한다는 뒷담화는 사람을 실없이 웃게 만듭니다. 지난 촛불투쟁에서의 트라우마가 오버랩된 것일 뿐, 단체들 사이에서 이명박 퇴진이냐 심판이냐를 두고 제대로 논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범대위 참가를 두고 진퇴는 분명하였을 뿐입니다. 투쟁이냐 추모냐 갈등해 본 적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방패와 경찰버스에 가로막혔을 뿐입니다.

경찰의 압박을 우회하기 위하여 신부님 목사님이 나서 공간을 열어주시기도 하고, 구술집을 출판하는 일이나 미술전시회, 음악회, 연극제, 작가 사인회 그 어느 것도 문화예술인들의 분노에 바탕하지만 모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추모를 위해서,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 넓히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더 해야지만 대중이 모이고 공간이 열리고 장례가 가능해지겠습니까?

용산참사 100일, 명박산성에 올라설 것입니다

철거당한 우리 이웃은 직업이 철거민은 아닙니다. ‘건설! 지역노조’ 구호가 선명한 전철연의 깃발이 웅변하듯 그들 철거민은 주로 우리 사회 비공식부문을 이루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최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반이 정리해고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라 소리 소문이라도 나지만 일상적으로 실업의 문턱을 넘나드는 비정규직에게는 죽음의 시절입니다. 실질임금은 줄어들고 최저임금 깎이고 비정규법안 개악되는 시절입니다. 이 시절 총 맞아 죽어가면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한 노동절은 노동자에게 무엇입니까? 지난 시절 선배들은 투쟁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지금 우리는 일정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세는 엄혹하지만 애드벌룬 아래 안정적인 공간이 있어야 ‘준비되지 않은, 교육되지 않은 대중’들이 함께할 수 있는 노동절, 등산을 하며 기억하는 노동절입니다. 하물며 어머니, 아버지의 그리고 우리들의 가슴에 민중의, 민주의 피눈물로 여전한 열사들일지언정, 제사나 지내고 제삿밥이나 나누어먹으며 기억하는 추모제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짧게 본다면 우리에게 트라우마는, 1년 전 청계광장에서 어린 학생들이 ‘미친 소, 미친 교육 반대’ 손피켓과 촛불로 시작한 이후 100만이 거리로 나와도 결국은 넘지 못한 명박산성인 것 같습니다.

4월 29일은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돌아가시고 일주일, 한 달을 추모하다 이제는 100일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면 다음 기억할 날은 1년밖에 더 있겠는가 싶습니다. 불에 태워 죽여 놓고도 테러리스트라고 우기고, 거리에 나선 유족을 밟고 영정사진마저 부수는 이명박정권, 명박산성을 넘지 못하는 한 장례도 못 지낼 것 같습니다. 등록금 인하 내걸고 삭발한다고 잡아가는 정권, 노동자들 거리에 내몰고는 최저임금, 비정규법안을 개악하는 정권, 비판 보도한다고 기자도 PD도 잡아가는 정권, 시험으로 애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정권, 국민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나 뒤지려고 하는 정권을 넘지 못하는 한 장례를 1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년 촛불이 날이 추워서 집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기에 따뜻한 봄날이 되었다고 거리를 메우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은 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장례를 지내기 위해서라도 범대위도, 전철연도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유족이 명박산성에 올라설 것입니다.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분노의 100일, 그리고 4.30 비정규노동자의 날, 5월 1일 노동절, 5월 2일 촛불 1주년으로 명박산성을 넘을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최신기사
기획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온라인 뉴스구독

뉴스레터를 신청하시면 귀하의 이메일로 주요뉴스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