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은 어떻게 부자가 됐나

[낡은 책 15] 미국 노동운동 비사

미국노동운동비사(리처드 O. 보이어, 허버트 M. 모레이스 공저, 박순식 역, 인간, 1981, 408쪽)

30년 지난 고전이지만 지금 읽어도 충분히 현장감 있다. 대학 1학년 때 이 책을 손에 쥐고서 소름 돋는 밤을 보낸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제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책 ‘미국 노동운동 비사(秘史)’. 누런 똥종이에 표지도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책은 제목과 달리 ‘비사’가 아니다. ‘정사’다.

역자 박순식은 1948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을 졸업했다. <낭만의 망명객> <그 사람 하이네>등을 번역했다. 이런 번역자들 덕분에 영어가 짧은 나 같은 위인도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저자 보이어와 모레이스는 ‘책머리에’에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노동지도자 빌 헤이우드 파슨스, 하늘을 찌를 듯한 용기로 산별노조회의(CIO)의 불꽃을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게 했던 플린트의 농성파업 등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1890년대의 장엄한 인민당의 반항. 강철공 월리엄 H. 실비스와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록펠러의 간사함을 아울러 이해해야 한다.

거대 기업의 결합을 추진했던 JP모건의 책략은 새뮤얼 콤퍼즈의 계획보다도 더 크게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배했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노동운동 이야기. 남편이 몰리 매가이어라고 불리던 여성,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하게 되자 포츠빌 형무소의 문을 뒤흔든 먼리 부인의 흐느끼는 절망에 관한 이야기. 1877년 철도파업과 자본과 미국 정부가 그 파업을 어떻게 공산주의 음모로 몰아서 파괴되었는가를 다룬다.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형무소에 갇힌 채 대통령에 입후보한 유진 뎁스와 그의 사면운동, 그리고 남편을 살리기 위한 루시 파슨즈의 외로운 싸움. 낯선 미국에 온 수백만 이민자들과 산별노조회의(CIO)와 뉴딜의 승리로 절정에 달했던 실업자들의 피어린 투쟁의 이야기다.

나라위해 노동자 농민이 흘린 피의 보답은 죽음이었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12일 시작됐다. 노예 폐지론자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로 몰렸다. 정부와 자본은 노예 폐지론자는 사회주의 반역 음모를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흑인의 자유를 호소한다고 왜곡했다.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에 쏟아지는 공격도 이와 비슷하다. 1805년 필라델피아 제화공 노조는 반미음모 혐의로 비난받았다. 노동운동에 대한 미국식 매카시즘은 매카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다.

노동자의 피로 만든 황금

남북전쟁은 4년 동안 계속됐다. 노동자 농민 출신의 젊은 병사 6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시인 월트 휘트먼은 부상병을 돌보다가 고작 42살에 머리와 수염은 은색으로 변했다. 늙은 부인이 북군 2포병대 소속 부상병인 아들 아머 무어 옆에 있었다. 휘트먼이 말을 건네자 그는 쾌활하게 대답했지만 그는 곧 죽었다.

무어가 죽어가고 있을 때 나무랄 데 없이 건장한 청년 JP 모건(존 피어폰트 모건)은 월가의 그의 사무실에서 금투기로 벌게 된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북군이 또 다시 패하자 이는 북부의 통화사정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러나 모건은 매점해 둔 금값을 폭등시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24살의 모건은 전쟁이란 영리한 자에게는 돈을 벌게 해주고 가난한 자에게는 죽음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수천명의 청년들이 애국심에 넘쳐 워싱턴을 방위하기 위해 블런 전장으로 진격해 갈 때 돈벌레 모건은 뉴욕의 정부 병기창으로 가서 정부 소유 창고의 소총들이 낡고 결함이 있는 것들이라는 정보를 빼냈다. 천재적인 장사 속으로 그는 이것을 정부로부터 1만7500달러의 헐값으로 사서 그 다음날 고스란히 11만 달러로 정부에 되팔았다. 의회가 “충성을 가장해 국가의 불행을 치부와 향락의 기회로 삼는 자는 반역자보다 더 나쁘다”며 모건과 몇 사람의 횡령자를 수사할 때도 개의치 않았다.

1863년 징집법이 통과되자 모건은 마치 밀가루 한푸대를 사듯 한 젊은이를 300달러에 사서 자기 대신 전쟁에 내보냈다. 뒤에 이 젊은이가 전사한 걸 희생자 명단에서 봤을 때 모건은 자신의 행동이 정말로 현명한 것 느꼈다. 록펠러 역시 같은 시기에 펜실베니아 주의 서부 유정탑의 숲 속에서 느긋하게 빈둥대며 석유 왕국을 세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모건 등은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의회에 마구 뇌물을 뿌렸다. 앤드류 카네기, 모건, 록펠러 등이었다. 매튜 조셉슨은 “전쟁이 시작된 초기 최초의 횡재를 하게 된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대재벌로 등장했다”고 썼다. 1만명의 중국인 노동자와 3천명의 아일랜드인이 캘리포니아에서 동쪽으로 세라 네바다 산맥과 록키 산맥을 넘어 철도를 부설했다. 이는 전투하는 군대의 희생과 맞먹는 희생을 치렀다. 펜실베니아 서부에서 쏟아진 석유는 록펠러를 갑부로 만들었고 피츠버그의 철은 철도와 철도차량을 만드는데 들어가 29살의 앤드류 카네기를 황홀하게 했다.

신흥 대재벌에게 많은 뇌물을 받고 있던 의회는 그들 악덕 재벌들에게 전국 천연자원의 거의 절반을 넘겼다. 1850년대와 60년대에 연방의회는 <유니온 퍼시픽> <센트럴 퍼시픽> <노덩 퍼시픽> 같은 철도회사에 뉴잉글랜드 지방과 뉴욕주 펜실베니아주를 합친 만큼인 1억5800만 에어커의 땅을 넘겨주었다. 대기업가들에게 넘어간 이 땅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1862년 <자연농지 보장법>으로 농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미국 노동계는 일반 미국민의 소유권을 확보토록 하자는 이 법 제정 운동에 거의 한세대 동안이나 매달렸다.

전국 주물공노조의 실비스

월리엄 H. 실비스(Sylvis)는 위대한 미국 노동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물공으로 단련됐다. 실비스는 최초의 전국 노동자연맹이자 최초의 전국적 노조인 주물공조합을 창설했다. 실비스는 정열을 다 쏟으며 41살로 죽었다. 항상 분노에 찼던 실비스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해버리는 성격이었고 결코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실비스는 조합비 모금, 지부 조직, 파업기금 설치, 중앙집중제도 등의 노조실무를 만들었다. 또 흑인 노동자의 단결, 부녀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독자적 정치활동, 국제적 단결을 도모했다.

실비스는 1828년 펜실베니아의 가난한 집에서 10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1857년 필라델피아 주물공 노조에 가입했다. 1860년 드디어 회계감사가 됐다. 1861년 펜실베니아주가 적의 위협을 받자 상사로 종전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고 막 결성된 전국주물공노조는 사실상 해체됐다. 1870년 산업부문의 인구가 농업부문을 넘어섰다. 노동자 수는 모두 560만명이나 됐다. 1862년 말의 파업은 1863년 초 전국으로 번졌다.

최초의 전국노동조합인 전국인쇄노조가 건설됐다. 1864년 말 20만명에 달하는 노조원을 확보했다. 고용주들은 1864년 점점 커지는 노동운동을 깨드리기고 마음먹었다. 공화당을 지배하고 군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가들은 1864년 총검을 들이대고 25%의 임금인하를 강요했다. 그 결과 파업이 일어나자 군대가 동원됐다. 군대는 뉴욕과 테네시 주, 펜실베니아 주, 미주리 주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승리의 기쁨은 한쪽으로만 왔다.

1865년 4월 9일 리 장군의 군대는 항복해 남북전쟁이 끝났다. 에드먼드 러핀의 포격과 더불어 전쟁을 시작했던 찰스턴에서는 유명한 매사추세츠주 출신의 흑인연대인 54연대가 군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신흥재벌들은 유럽에서 성을 통째로 사 뜯어서 수입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표들은 1866년 8월 볼티모어에 모였다. 북군이 승리했지만 남부 뉴올리언즈에서는 흑인들에 대한 대량 살육이 시작됐다. 많은 노조 지방조직이 분쇄됐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와 싸우기 위해 협회를 구성하고 연합했다. 남부 대농장 소유자들은 1866년 5월 초 멤피스에서 흑인의 대량 살해를 선동했다.

볼티모어 창립대회를 성사시키고자 노력하다가 쓰러진 실비스는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글을 썼다. 실비스는 “우리가 흑인들에게 우리와 공동전선을 펴도록 확신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볼티모어의 레이스턴 건물에서 회합한 대부분의 대표들은 이런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아직 흑인에 대한 많은 편견이 남아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기계공인 작달막한 아이라 스튜어드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동료들을 설득하기 바빴다. 이후 6개 주에서 8시간 노동이 법제화됐다. 그러나 강제조항이 아니었다. 실비스는 대회가 흑인과 노동자의 결속을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비스는 노조운동에 여성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가난이 번지는 가운데 월가의 주식가격을 조작해 매일 큰돈을 버는 드루와 반더빌트, 고울, 피스크 등 재벌들도 있었다. JP 모건은 짐 피스크의 세력에 대항해 철도를 얻기 위해 배후에서 사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1869년 대회는 흑인 대표의 대회 참가가 허용되었고 142명 대표 중 9명이 흑인이었다. 그러나 태어난지 6년 안돼 전국노동조합은 원칙을 버리고 통화개혁에 몰두했다. 그린백 지폐를 더 발행시키려는 운동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화폐 문제에 열성인 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노조 간부직에서 쫓겨났다. 1868년 이미 회원 60만명 중 2/3가 노동운동가가 아니었다. 선거 후인 1872년엔 단지 7명의 노동자 대표가 전국노조대회에 참가했을 뿐이고 이후 대회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한쪽에선 그랜트 대통령의 행정부 전체는 부정 수뢰, 독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굶주린 자들에게 총알밥이나 처먹여라

1877년 여름 미국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미국 언론의 수치다. 미국의 유수 신문은 철도 파업노동자들을 이렇게 비난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점령된 시카고” <뉴욕타임즈> 1877년 7월25일자
“시카고의공산주의자들... 13명 피살” <뉴욕 트리뷴> 1877년 7월28일자
“피츠버그 약탈되다. 공산주의의 악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피츠버그” <뉴욕 월드> 1877년 7월22일자

결국 1877년 6월21일 10명의 파업 지도부가 교수형 당했다. 6명은 포츠빌에서, 4명은 모우치 쳥크에서 죽었다. 1877년 철도노동자들은 파업했다. 파업은 6월1일 <펜실베니아 철도회사>가 또 다시 10% 익금삭감을 발표하자 시작됐다. 이후 한 달 동안 파업이 벌어졌다. 프렌치 장군이 출동해 파업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군대의 발포와 함께 진압이 시작됐다. 1877년 철도 파업은 단순 임금투쟁 이상이었다. 장기 불황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국 철도왕 프랭클린 벤자민 고웬은 1889년 12월 13일 자기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했다.

대향연의 작은 종말

1873년 9월18일 필라델피아 3번가의 제이 쿠크 회사의 대은행이 문을 닫음으로써 불황의 막이 올랐다. 그 시간 쿠크는 그랜트 대통령과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있다가 이 사실을 들었다. 1877년 실업자 수는 3백만명에 이르렀다. 전체 노동자의 1/5가 일자리를 일었다. 임금은 45%나 줄었다. 30개의 전국노조 가운데 1877년 단지 8, 9개만 남았다. 신문들은 실업자들의 성격적 파탄 즉 게으른 성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니엘 드루나 앤드류 카네기, 모간, 록펠러 등은 한몫 잡기에는 혼란이 좋다고 의견을 모았다. 카네기는 재빨리 거대한 강철공장을 세워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록펠러는 수 백 개의 경쟁기업을 합병했고, 모간은 쿠크를 대신해 미국의 지도적 은행가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시위가 번지자 경찰은 노동자를 공격했다. 시위대를 공산주의로 매도했다. 말 탄 경찰이 구경꾼을 뒤쫓아 후려갈겼다. <뉴욕 타임즈>의 기자는 그 광경이 “재미가 없지 않았다”면서 “어제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들 같다. 공산주의는 저절로 자라는 풀은 아니다”고 썼다. 남부의 민주당은 완전히 북부의 공화당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민중운동의 분열에 대해 필립 S. 포오너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한, 고용주들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자신들의 투쟁에 골몰해 있던 북부의 조직 노동자들은 자기들 앞날이 남부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성과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리딩 계곡의 살인 왕

동남부 펜실베니아주 리딩계곡의 왕으로 알려진 프랭클린 벤자민 고웬이 1889년 워싱턴 호텔 방에서 자살했을 때 사람들은 정신이상자라고 했다. 광부들은 처음부터 노조를 만드는데 가장 큰 적은 프랭크린 벤쟈민 고웬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고웬은 1869년 33살에 동남부 펜실베니아주의 경제계를 주름잡고 <필라델피아 앤드 리딩 철도회사>의 사장이 됐다. 고웬은 아일랜드의 공제조합의 우두머리 죤 씨니를 꼬였다. 고웬은 남북전쟁 때 북군에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사서 들여보내고 무연탄의 도시인 포츠빌에서 젊은 지방검사로 활약했다. 북부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고웬의 아버지는 남부와 노예제도에 동조했다. 고웬은 씨니를 이용해 노조를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짓밟힌 노동운동

철도왕 제이 고울드는 1886년 남서부 철도파업 직전에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노동대중의 절반을 고용해서 나머지 절반을 죽여버릴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1880년부터 10년 동안 525만명이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미국으로 건너온 수 천 명의 이민들은 광산에서, 제철소에서, 철도 공사장에서 계약된 노동조건 아래서 봉건시대의 농노와 다름없는 산업노예로 생활했다. 광산, 공장, 철도의 소유자들은 이들 산업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자들을 파업 분쇄에 이용하기도 했다. 1883-1885년 불경기가 닥치면서 폭력사태가 늘었다. 여기저기서 파업이 일어났다. 오하이오주의 혹킹 계곡에선 광부들이 임금인하에 대항해 투쟁했다. 노동자신문 편집자는 이 유혈사태를 <지옥같은 혹킹 계곡>이라고 묘사했다. 광부들은 피살당했다. 텍사스주에서도 파업노동자들이 총살당했다. 1887년 대대적 철도파업때 동원된 군인을 보고 혹자는 “군인들이 기업체에 월급받는 직원니야”고 비꼬았다.

유혈의 장본인들은 <핀커튼 흥신소>에 소속된 청부업자들이었다. 이 용병들은 철도왕 제이 고울드가 먹여주고 있었다. 핀커튼 단원들은 사이비 노동운동가로 암약하기도 했다. 자본의 대응력은 노동운동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기업가들은 정부와 두 개의 커다란 정당 민주당과 공화당을 조종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수, 목사, 대학도 손아귀에 넣고 조종했다. 목사들은 기업합병이 하느님의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교수들은 다윈의 적자생존을 빌어 기업이 폭력을 사용하는 건 과학적으로 불가피하다고 했다. 신문과 잡지는 노동자와 이주민들을 비난했다.

신문은 날마다 노동자들에게 몽둥이가 제일 좋은 약이라고 위협했다. 1885년 <뉴욕 트리뷴>에는 “야만적인 종자들은 몽둥이의 힘 밖에는 무서운 것을 모른다”고 했다. <시카고 타임즈>는 “노조원들에게 수류탄을 던져 혼구멍을 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재벌들의 천국

록펠러와 모간은 누가 대통령이 되건 관계없이 계속 재계의 왕으로 군림했다. 모간의 은행은 기업합병의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1880년대 유진 뎁스는 외모가 휜출한 젊은 청년으로 쉴러의 시를 일고 간판 그림을 그리며 거울 앞에서 웅변연습을 하고 있었다. 젊은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배드랜즈의 목장 감독으로 서부 유권자들의 지지표를 어떻게 모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헨리 포드는 자전거포에서 땜장이로 일하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는 아직 어린애였다. 죠셉 퓰리처는 겨우 언론의 뼈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드로 윌슨은 젊은 청년이었고,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이제 막 태어났다.

철도왕 제이 고울드는 1880년대 말 <유니온 퍼시픽> <와바시> <미주리-캔저스-텍사스> <텍사스 퍼시픽> 등 대철도회사와 전선회사, <뉴욕 월드>라는 신문사, 여러 개 기선회사, 수많은 동부지방의 작은 철도회사들을 약탈해 소유하고 있었다. 고울드의 주특기는 증권시장을 조작해 철도회사들을 파산시킨 뒤 그 회사를 인수한 다음 번창한 것처럼 가장해 주식을 올려 다시 주식을 파는 수단이었다. 그 기술로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에서만 2천만 달러를 벌었다. 또 고울드는 핀커튼 단위들을 매수해 파업노동자를 쏴 죽였다.

진짜 독점자본가라면 프릭과 카네기, 모간, 록펠러 등을 꼽는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 출신의 집사였다. 1882년 기업합병으로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를 세워 거대한 독점체로 키웠다. 록펠러는 천재답게 단순했다. 회사를 넘겨주겠느냐 아니면 망하겠느냐고 물었다. 4만 달러짜리 공장도 록펠러는 5천 달러에 샀다. 20만 달러짜리 공장도 7만9천 달러에 사들였다. 석유생산을 통제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깎았다. 1881년엔 40여개의 철도회사를 거느렸다. 철도회사들의 상호출자로 철도회사 연합체를 만들고 조종했다. 지금 미국의 거대한 군산복합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공화당도 민주당도 모두 재벌들의 것이었다. 기업합병은 1890년대 초 이미 거대한 괴물로 커졌다. 이들은 노동자들도 상품으로 여겼다. 파업만 일어나면 핀커튼 단원, 주 민병대 등을 동원, 분쇄시켰다. 기계 도입으로 생산성이 올랐지만 혜택은 노동자에게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노동자 주급은 7-8달러였다. 노동자들은 판자집과 다락방에서 살았다. 매달 10-15달러의 방세를 내야 했다. 노동자들이 내는 방세의 1년치는 그 집값의 25-30%가 됐다. 하루 노동시간은 14-18시간이 됐다. 1883년 증권파동으로 불경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연방 노동청장 캐롤 라이트는 1885년에 실업자가 100만 명에 가깝다고 했고 파우덜리는 200만 명으로 추산했다.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을 전체 국민의 1/8인 부유층이 차지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1888년 12월 3일자 의회에 보내는 연두교서에서 “기업연합, 기업합동, 독점기업 같은 것들이 자기네 쇠발굽으로 국민들을 밟아죽이고 있다”고 했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