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맑시즘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다”

[낡은책 16]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시몬느 뻬트르망, 강경화 역, 1978, 까치)

  시몬느 베이유, 불꽃의 여자(시몬느 뻬트르망, 강경화 역, 1978, 까치)
번역자 강경화는 연세대 영문과 대학원 졸업 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73년)하고 이 책을 번역할 당시 중앙대와 연세대 강사로 나갔다. 이후 동덕여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던 강 시인은 지난해 봄 긴 투병 끝에 작고했다. 35년 동안 시인으로 지내면서 남편이 모아 펴낸 유고시집까지 딱 세 권의 시집만 냈다. 이 책의 저자 시몬느 뻬트르망은 베이유의 친한 친구로 고등사범학교 동기로, 문학과 철학박사였다.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격렬한 저항

철학교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공장과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시몬느 베이유. 34살의 젊은 나이에 죽기 까지 격렬하게 양심의 뜻대로 살다간 사람. 스페인 내전 땐 프랑코 쿠데타 세력에 대항에 총 들고 참전했던 여성. 시몬느 베이유는 낡은 보수주의에도 저항했지만 스탈린식 사회주의에도 격렬하게 맞섰다. 그래서 아나코-생디칼리즘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했다.

내가 지난해 <참세상> ‘낡은책’에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레스 토레즈의 평전 <인민의 아들>을 소개하자 모레스의 부정적 측면도 있는데 지나치게 ‘칭송’한 것 아니냐는 투로 댓글이 올라왔다. 댓글의 주인공은 평생 공산당이란 한 조직에 소속돼 활동했던 모레스 토레즈보다는 시몬느 베이뉴 같은 진정한 자유인을 더 높이 평가했다. 나 역시 이 책의 제목처럼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그녀를 존경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자신의 논문 ‘전망’에서 “더 이상 맑시즘에 무조건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스탈린의 러시아를 파시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비판했다. 그 비판은 옳다. 베이유는 “레닌의 사고방식에는 반박을 위한 사고 밖에 없다”며 레닌도 준엄하게 비판했다. 반면에 베이유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이유는 1909년 2월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에 죽었다. 베이유는 그럭저럭 사는 집에서 태어난 인텔리였다. 엄격한 유태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남동생과 묘한 경쟁심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고집불통 짓도 했다. 어릴 때 집엔 수잔느라는 예쁘고 명랑한 하녀가 있었다.(이 책 35쪽) 중학교 때 베이유는 “자기가 노동자를 좋아하는 건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가 부르주아 보다 훨씬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했다.(35쪽)

베이유는 신학자를 싫어했지만 종교를 배격하진 않았고 종교를 이해하려고 했다.(이 책 47쪽). 결국 베이유는 종교와 도덕을 일치시켰다(47쪽). 정당을 경멸했다(46쪽).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활동가

베이유는 정당과 노조 등 조직활동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베이유가 딱 한번 노동조합 조직에 들어가 활동한 적이 있다. 1931년 CGT 27지국에 가입했다. 당시 CGT는 CGTU, FA와 분리돼 통합을 모색 중이었다. 평화주의자였던 반전주의자 베이유는 2차 대전때 국가방위에 참가했다.

베이유는 망명중인 트로츠키를 만나 오랫동안 대회했다. 대화 주제는 ‘러시아가 과연 노동자 국가인가’였다.(이 책 210쪽) 베이유는 트로츠키와 대화한 걸 꽤 자랑스럽게 여겼다.(121쪽)

베이뉴는 철학교사 자리를 박차고 공장 노동자로 뛰어들었다. 베이유는 자신의 편지에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제 영혼과 살 속에 파고 들어왔다”고 적었다.(이 책 135쪽) 베이유는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 참된 형제애가 거의 없음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144쪽) 베이유는 1934년 12월 4일 공장 들어가서 1935년 1월말에 나왔다. 나온 직후 곧바로 스위스로 휴가 가서 2월말까지 보냈다. 공장 생활 중 크리스마스 휴가도 있었다.

베이유는 “내가 공장에서 일한 후로 한 번도 노동자들이 사회문제를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구내매점에서 신문 보는 걸 본 적이 몇 번 있지만 모두 부르주와 신문이었다”고 회상했다. 베이유는 “노동자들은 그저 불평할 뿐 저항을 생각하진 않았다”고 털어놨다.(이 책 146쪽)

베이유가 본 공장 노동자

그리하여 베이유는 현장의 이런 참담한 현실을 파타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를 꿈꿨다. 베이유는 다시 편지에서 “노동기구를 철저히 연구하려 합니다만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노동기구와 인간관계, 노동기구와 인간 사고의 관계 측면을 연구하렵니다”(이 책 150쪽)라고 말했다. 베이유는 CGT에 북부 공장 실태조사를 간청해 허락을 얻었다. 1936년 2월 27일 북부 리유로 갔다. 베이유는 ‘실태보고서’에서 노동자와 고용주의 두 입장에서 공평하게 문제를 파악했다. 베이유는 “고용주들의 불만이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보고서에 썼다.(175쪽)

다시 베이유는 동료였던 농장주 띠봉에게 부탁해 농장 노동을 시작했다. 몸이 성치 않았던 베이유는 띠봉의 농장에서 하루 2시간만 일했다. 베이유는 동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띠봉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오두막에서 살았다. 농장 노동자들은 “띠봉씨는 바로 곁에 정부(情婦)를 두고 삽니다. 저기 오두막에 사는 미친 여자요”라고 쑥덕거렸다.(이 책 251쪽)

2차 대전이 태평양 전쟁으로 격화돼 미국까지 참전하자 베이유는 미국에서 잠시 지냈다. 베이유는 1942년 미국에서 살면서 한 유일한 일이 편지쓰기였다.(이 책 278쪽) 병약했던 몸을 돌보지 않았던 베이유는 1943년에 와서는 세례의식을 흉내 내면서 주전자로 자기 머리에 물을 부었다.(304쪽) 의사는 1943년 8월27일 “환자는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며 식사를 거부한 끝에 굶어 죽었다”(311쪽)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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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뛰르

    제목이 다소 선정적이네요. 맑스조차도 "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라"등의 격언을 남겼기때문입니다. 맑스의 위대성은 자신 사상에 대한 평가조차 고착(固着)되는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동자

    맑스주의에 무조건 동의하면 그건 교조주의자이죠.
    보통 맑스주의자들은 맑스를 신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이론과 실천이 자본주의 사회를 폐기하는 가장 훌륭한 이론이자 실천이기 때문이죠.
    제목이 마치 모든 좌파들이 무조건 맑스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읽히고 맑스주의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유감이군요.
    이제까지 맑스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 치고 제대로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별로 못 봤습니다.
    여전히, 노동자의 계급적 무기는 맑스주의 아닌가요?
    내용중에도 베이유가 노동자와 고용주의 두 입장을 공평하게 문제를 파악했다고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어떻게 노동자와 고용주가 공평하다고 전제할 수 있나요?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입장인데.
    그럼 노예와 노예주의 갈등이나 문제를 공평하게 바라볼 수 있나요?
    그래서 당파성이라는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누구의 편에 서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죠.
    노동자 당파성이 없는 모든 이론, 조류는 결국 사회변혁에 방해물일 뿐이죠.
    개인주의적 사고는 부르주아의 사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