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지간 다시는 이 세계에 전쟁이 없어야 돼요”

[새책]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이임하, 책과함께, 2010.6)

저자 이임하는 성대 연구교수다. 지난해 나온 책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에서 ‘전쟁미망인의 전쟁경험과 생계활동’이란 논문을 썼다. 논문을 다듬어 이번에 이 책을 냈다.

‘구술로 풀어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라는 부제는 이 책이 구술사로 만든 책임을 증명한다. 2003년 윤택림의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이후 오랜만에 구술사로 풀어쓴 제대로 된 책이 하나 나왔다. 저자 이임화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군경미망인 24명과 자녀 6명, 상이군인미망인 5명, 피학살자미망인 6명과 자녀 4명 등 모두 45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윤택림은 구술사를 역사학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 윤택림은 2006년 함한희와 공동으로 <구술사 연구방법론>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구술사로 역사학을 개척한 인물은 최초로 동학운동에 ‘혁명’이란 용어를 도입한 고 김의환 교수다.

김의환은 1974년 문고판으로 낸 <전봉준 전기>(정음사)에서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고부군 신중리 주산 마을을 찾아 사발통문 서명자 20인 중 1명인 임노홍의 아들 임기인(당시 80세)을 만나 아버지와 접주 송대화의 행적을 채록한다. 김의환은 고부 신중리와 진동리, 만화리 일대를 돌면서 5년 동안 150여명을 만났다. 이 책은 70년대 김의환이 내놨던 구술사보다 떨어진다.

출판사가 요란하게 내놓은 보도자료대로 쓴 주요 일간지의 토요일자 책소개 기사는 요란했지만 4년 동안 만난 구술사는 기획부터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일단 채록의 숫자부터 적다. 구술과 문헌 연구의 접목도 부족하다. 이들이 주로 감당해야 했던 50-60년대 노동시장에서의 역할을 통해 당시 노동통계가 얼마나 허구였는지 되짚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 베여나는 먹물 냄새 풀풀나는 괴상하게 조합한 사회과학용어들도 거북하다. ‘타자화’ ‘트라우마’ ‘젠더’ ‘위계화’ 같은 단어는 70-80대 할머니들이 토해내는 삯바느질과 행상, 빨래, 좌판 같은 격정스런 단어와 너무도 멀다. 다만 저자가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성차별적 용어인 ‘미망인’을 굳이 사용해가며 이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

1952~1963년 신문보도는 전쟁미망인을 30~50만명으로 추산한다. 50만명이던 당시 기혼 여성의 10%나 되는 숫자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전쟁 후 7년이나 더 집권했음에도 말도 안 되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워 전쟁 피해를 개인과 가족에게 특히 여성에게 전가했다. 전쟁 10여년이 지나 박정희 정부가 1961년 6만5천여명의 군경미망인만을 대상으로 연금 등 국가보상안을 내놨다가 다시 2년 뒤 2만7천여 명으로 줄였다. 오로지 군경미망인만 보상했다.

국가는 학살당한 민간인 피해자의 미망인을 이렇게 내버렸다. 수십만의 전쟁미망인이 존재했지만 국가는 이들을 철처히 망각했다. 망각만이 아니라 전근대적 틀 속에 가두었다.

일제시절인 1920~30년대 태어나 1930~40년대에 정신대 동원을 피하려고 조혼한 뒤 20대 때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는 과정을 서술한 1부를 지나 본격적 서술에 해당하는 2, 3부는 미망인들이 전쟁 이후 살림과 육아라는 가사노동과 함께 행상과 좌판, 공장 등 다양한 노동으로 살아갔던 모습을 나열한다. 전쟁미망인들은 자식과 시부모, 시동생을 자기 노동으로 먹여살렸지만 시댁에선 가장 낮은 지위였다.

  80대 전쟁미망인의 손
저자는 시댁의 일상적 감시와 통제, 구박과 낙인은 미망인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기만술이었다고 본다. 잠 안오는 약 ‘타이밍’을 하루 3알씩 먹고 삯바느질을 하다가 서른아홉에 폐경을 맞은 이도 있다. 이들의 노동은 집 안팎의 노동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전통을 깨뜨렸지만 보상은 없었다.

4부 ‘여성 가장과새로운 공간의 창출’은 시댁에서 오는 일상적 폭력으로부터 탈출은 분가였지만 군경미망인과 달리 피학살자 미망인에게 분가는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경험이었다.

5부 ‘봉쇄된 균열’은 국가가 전쟁미망인들의 목소리를 침묵 속으로 가두고 전쟁책임을 회피하는 과정을 다룬다. 에필로그에서 “좌우지간 다시는 이 세계에 전쟁이 없어야 돼요”라고 울먹이는 미망인 아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의 목소리엔 다시는 되돌아보기도 싫은 전쟁의 추억이 묻어있다. 요즘 참여연대 앞에서 노략질 하는 노인네들이 바로 이들 전쟁미망인 아들과 같은 세대이거나 전쟁미망인 세대들이다. 참여연대와 이들 중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이 누구일까.

프롤로그_ 한국전쟁과 ‘전쟁미망인’

1. 전쟁, 그 뒤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
2. 왜 ‘전쟁미망인’인가?
3. 어떻게 들을 것인가?
4. 누구를 만났는가? ― ‘전쟁을 맞으며’ 살아온 여성들

1부 전쟁과 집 밖 세상
1. 군경미망인의 전쟁 경험
2. 피학살자미망인의 전쟁 경험
3. 상이군인미망인의 전쟁 경험

2부 낯선 세상에서 생존하는 길
1. 농업 노동과 가사 노동
2. 행상과 좌판
3. 여성 전문직, 바느질
4. 정규직, 공장노동자
5. 전쟁미망인 노동의 특징

3부 가부장과 ‘아직 죽지 아니한 아내’
1. 결혼하기
2. 일상의 감시와 통제

4부 여성가장과 새로운 공간의 창출
1. 공간 만들기와 전략들
2. 여성 가장이 만든 가족
3. 전쟁미망인과 ‘여성 가장’이라는 여성주체

5부 봉쇄된 균열
1. 국가폭력과 침묵하게 하기
2. 전쟁미망인의 섹슈얼리티
3. 전후 처리에서 선택된 여성과 배제된 여성들

에필로그_ 전쟁과 트라우마 ― ‘전쟁은 없어야 돼’


프롤로그

이 책의 서론에 해당한다. 저자는 ‘전쟁미망인’을 주제로 설정한 배경을 설명하고 구술사 방법으로 이 연구를 진행했음을 강조한다.

1부 전쟁과 집 밖 세상

전쟁미망인의 전쟁 경험을 군경미망인, 피학살자미망인, 상이군인미망인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고(또는 보도연맹 등에 의해 남편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남편의 전사 소식(학살 소식)을 접하면서 ‘전쟁미망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2부 낯선 세상에서 생존하는 길
혼자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전쟁미망인에게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들은 농업 노동과 가사 노동을 병행해야 했고, 행상과 좌판은 물론이고 공장노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미망인은 남성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남성은 바깥일 하고 여성은 살림과 육아를 맡는’ 기존 시스템을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깨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3부 가부장과 ‘아직 죽지 아니한 아내’

남편이 부재한 집에서 젊은 전쟁미망인은 시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시부모는 전쟁미망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감시했고, 전쟁미망인은 가족관계 안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전쟁미망인에게 남편의 집은 억압의 장소였다. 일상의 감시와 통제는 ‘며느리 만들기’의 하나이다. ‘며느리 만들기’는 가족단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쟁 피해를 ‘전쟁미망인’에게 책임지우는 방책의 하나였다.

4부 여성 가장과 새로운 공간의 창출

전쟁미망인들은 어떻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고 전략들을 세웠는가? 군경미망인에게 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피학살자 미망인에게 분가는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여성 가장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공간과 전략을 만들었을까?

5부 봉쇄된 균열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가치는 모두 중심을 잃어버렸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해야 했고 해결책은 희생양을 찾는 일이었으며, 그 희생양은 주로 여성이었다. 국가는 전쟁미망인의 목소리를 침묵으로 가두었고, 자신의 전쟁 책임을 일상에서 감추어버렸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이다.

에필로그 : 전쟁과 트라우마 - ‘전쟁은 없어야 돼’

전쟁미망인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속으로 추가>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었던 상이군인미망인

상이군인의 몸은 결혼한 여성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생계 활동을 하면서 남편의 몸을 돌보아야 했다. 육체적 고통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정신적 타격은 오랫동안 남아 있게 마련이다. 전쟁미망인은 분가를 통해 시가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누워 있을지라도 ‘가부장’인 남편이 존재했고, 남편의 의심과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언어폭력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멸시를 동반했고, 그 폭력에 노출되었던 당사자는 자존감을 상실했다. _ 본문 208쪽

연좌제: 피학살자의 자식이라는 멍에

성장하면서 학살당한 아버지를 기다린 시간은, 성인이 된 뒤에는 짐이 되어 앞길을 막는 작용을 했다. “우선 내가 받은 건 그런 스트레스. 그래 크게 요약을 하면 첫 번째 내 연좌제 했던 이런 것에서 오는 경제적인 어려움, 두 번째 그 산소 없을 때 자식들에 대한 저기, 또 그 아버지 없이 자란 저기 평판. 이런 거를 그냥 말로는 쉽게 표현하는데 이것을 살아오면서 피부로 느낀 사람은 엄청난 그 저기가 오는 거여. 그래 제가 우리 자식들한테는 후회 없이 할려고 노력을 했어요.”(이성모) 그는 연좌제로 인해 사회생활에서 좌절을 겪었다.
_ 본문 269~270쪽

전쟁미망인 서열 매기기

유럽 여러 나라들이 전쟁 피해자로 군경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은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원호법은 군경, 군속과 민간인을 구별했고 전쟁 피해자인 민간인은 이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연금을 비롯한 보상을 받는 대상자 면에서도 군경미망인뿐 아니라 군경과 군속의 인원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소수의 군경미망인만 전쟁미망인으로 인정하고 그 외 다수의 전쟁미망인은 전쟁 피해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전쟁 피해자를 수적으로 줄이는 방식은 전쟁미망인뿐 아니라 상이군인에도 적용되었다. …… _ 본문 368쪽

그들만을 위한 한국전쟁 기념사

한국전쟁 기념사는 대개 ‘북의 침략’은 자유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세계가 ‘침략자를 분쇄’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당면한 과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한국전쟁 기념사는 매년 이러한 형식을 취했는데 ‘국군 장병’과 ‘유엔군’을 추모하는 것 이외에 어디에도 전쟁을 겪은 ‘국가’로서의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전쟁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전쟁의 원인뿐 아니라 전쟁의 과정과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들려준다. ‘가족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국가) 폭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전쟁 뒤에도 폭력은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 …… ‘전쟁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 이들의 이야기는 국가의 공식 기억인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구도와 다르게, 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 뒤에도 끝나지 않았던 한국전쟁의 잊힌 역사를 들려줄 것이다. _ 본문 19~20쪽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

곽희숙의 남편은 “군인 끌려 나갈 적에”도 “소 끌고 가서 일하고 온 사람을” 갑자기 영장이 나왔다며 “저녁에” 데리고 나갔다. 곽희숙은 다섯 살, 세 살, 백일 지난 아이들이 있었고 매일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그런 개인(가족)의 생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 국가는 동원으로 인한 생활고로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 있는데도 그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우리 친정아버지가 만날 …… ‘그 바보 같은 놈이지. 여― 여이― 문전(처갓집 앞)을 지내야 하는 놈이, 우리 처갓집에 잠깐 들어다보고 올 꼬마 이카고 쏙 빠져나가면 될 텐데 …… 그 바보 같은 놈이 따라갔다’고 ……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배운 것도 없고 골짜기에서 살아놔 노니 그리 그리 …···” 되었다고 이경순은 말한다. _ 본문 47~48쪽

임신과 출산, 그리고 피난의 기억

임신 3개월이었던 구영선은 남편이 소집되어 나간 뒤 집이 통영이었기 때문에 트럭을 타고 마산으로 갔다. 임신 초기라 먹지도 못하고 토해냈다. 굶주리면서 임신 내내 전쟁터를 돌아다녀야 했다. 자신을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의식이 없는 몸 상태로 지냈다. 만삭인 채 통영 시댁으로 갔을 때, 본인을 향해 겨눈 총도 ‘아― 튀어나오는 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각이 둔해지고 의식이 없었다.

이 과정을 박수영은 “아이고― 배는 불러가지고 30리를 걸어가는데 요기만 조만치만 가도 오줌이 마렵고, 어휴― ‘여기서 차라리 내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죽으면 너[희]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겠다’”라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숙자도 만삭이어서 출산일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피난 가지 않았다. _ 본문 62~63쪽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

이들의 결혼은 대개 남편의 상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정상호는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친구 사이라 “서로들 약주를 좋아하다 보니께 ‘네 딸 나 다구?’ ‘사위 삼자’”면서 결혼에 이르렀다. 그이는 시집에 와서 아랫목에 누워 있는 남편을 보고 나서 ‘속아서’ 결혼했음을 알았다. 정끝남도 형제들 가운데 막내로 올케 친정어머니의 소개로 결혼했는데 남편의 상이를 모른 채 결혼하고 나서는 1년 동안은 무서워서 말도 못 건넸다고 한다. 이성원은 자신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때 정신대에 동원시키지 않기 위해 결혼했던 것처럼 피난 때문에 결혼을 서둘렀다고 했다. 서둘러서 간 곳은 ‘경상’이라고 듣던 것과는 달리 방에 누워 있는 신세였다. 이를 두고 이성원은 “음흉하기가 짝이 없다”고 표현했고, 시댁 쪽은 상이 등급이 결혼에 지장을 줄 거라고 염려해 상이 등급도 내려놓았다고 했다. _ 본문 121쪽

전쟁미망인, 근대의 기획을 깨뜨리다

먼저, 전쟁미망인은 노동을 통해 근대의 기획, 곧 공사 영역의 분리와 사적 영역에서의 현모양처라는 틀을 깨뜨렸다. 공사 영역의 분리는 근대의 기획 가운데 성별 그리고 노동시장을 조직하는 중심 논리이다. 남성은 노동시장에 나가 노동자이자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 부양을 책임지는 존재임에 반해 여성은 가정에 남아 어머니나 주부로서 남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존재로 여겼다. …… 그런데 이 논리는 전쟁미망인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 …… 전쟁미망인들은 쟁기질만 못했을 뿐 모든 농업 노동을 혼자서 해왔다. …… 이처럼 농업 노동에서 차지하는 남녀의 역할은 한국전쟁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가속화시킨 장본인은 전쟁미망인이었다. _ 본문 1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