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세상을 멈추는 노동자

[녹색스트라이크]



멈춰진 노동자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의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가? 노동인권센터를 찾는 내담자들은 노동법 지식이 상당 수준임에도 유독 ‘휴업수당’에 관한 내용은 잘 숙지하지 못한다. 휴업수당을 설명하면 많은 노동자로부터 “그런 것도 있냐?”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휴업수당은 ‘사용자의 귀책 사유로 휴업하는 경우, 휴업한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평균임금 70% 이상의 수당’(근로기준법 제46조)이다. 돈만 받고 일은 안 한 경우 임금 공제 내지는 징계를 고려하는 것처럼, 약속한 날에 일감을 주지 않으면 사업주는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휴업수당을 아는 노동자가 적고, 알아도 (임금체불만큼)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임금을 주지 않는 문제는 ‘사업주 책임’이라는 과녁에 꽂혀있지만, 일감을 주지 않아 일하지 못하게 된 책임은 어슴푸레한 무엇을 가로지르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꽂힌다.

이러한 현상은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시간이 어떻게 취급되고, 근로계약 당사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시간에 대한 통제력과 권리가 박탈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정근로시간’은 서로의 권리-의무를 충족시키는 시간이 아닌, 노동자가 사업주의 지휘·감독 권한에 따라 통제받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계약 상대방인 사업주가 약속한 날에 일감을 주지 않고, 오히려 출근하지 말 것을 ‘명령’하더라도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휴업에 대한 책임은 사업주가 아닌 다른 이유(기상이변, 전염병 확산, 시장 동향 등등)로 전가되고, 결국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심지어 휴업 기간은 연차유급휴가로 대체되곤 하는데, 겉으로는 ‘노동권’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이중적으로 권리가 박탈된다(휴업수당 미지급+연차휴가청구권). 그만큼 시간은 노동자에게 탈-정치화되면서 노동자의 행동마저 발목 잡는다. 이런 양상은 탄력근로제, 연장근무, 조기출근이 제대로 된 절차와 정당한 대가 없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의 시간과 함께 (권리주체로서) 행동을 빼앗는다.

‘전환’ 메시지의 허점, 멈추라는 메시지

한편에선 코로나19, 기후위기를 둘러싼 담론들이 ‘전환’이라는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전환은 정부 정책(공정한 전환, 에너지 전환), 운동 구호(정의로운 전환 just transition)에서 모두 등장한다. 전환은 연속성을 담보하되 새로운 규범과 조건으로 이행하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심지어 기업은 ESG 경영이라는 새로운 규범으로 빠르게 이행(전환)하고 있다. 이처럼 ‘전환’은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는 언어로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고 더 극심한 형태로 경험하게 될 위기의 진폭을 담아내는 언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전환은 위기를 ‘관리’하고자 하는 지배 권력의 용어에 가깝지 않은가? 지배 권력은 위기 관리자이자 갈등 관리자로서 ‘조율’된 시기(연도에 따른 감축 목표), ‘예측 가능한’ 사회상, ‘관리된’ 전환 경로(시나리오)를 민중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당면한 위기는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위기 관리자가 아닌 위기에 노출된 민중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모순적이게도 ‘멈추기’와 ‘떠나기’ 같은 수동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민중이 지녀온 가장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 통제 불가능한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해오던 일을 멈추거나,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그리고 모두가 공존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실천했다. 그러나 무한경쟁, 경제성장, 팽창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런 수동적인 방식을 죄악시한다. 그린스마트 산업단지를 ‘만들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그린수소를 ‘개발’하는 것과 같은 능동-긍정의 언어는 환영받지만, 기업의 생산 활동을 ‘규제’하고, 에너지 사용량 자체를 ‘감축’하고 자동차 이용을 ‘억제’하는 수동-부정의 언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우리 사회를 향해 ‘수동성’-‘부정성’을 계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멈춰 서서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을 멈추는 노동자

‘멈춤’이 노동 현장에서는 지극히 능동적인 ‘투쟁’이 된다는 사실은 노동 운동과 기후 운동이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멈춤은 신자유주의 사전에 없는 단어다. 멈춤, 교란, 전복.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운동량(모멘텀)을 담아내는 단어란 이런 말들이 아닐까? 작업중지권, 태업, 파업 등 노동자가 멈추는 행위는 신자유주의가 왜곡하고 있는 시곗바늘을 다시 비틀면서 감춰진 현실을 드러낸다. 이때야 비로소 사회의 작동자(operator)로서, 사회계약상 권리/의무 당사자로서 노동자의 지위가 드러난다.

실제 사회의 방향타를 잡은 사람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익명의 노동자들이다. “시스템을 전복하라 Uproot The System”(9.24 글로벌 기후파업), “지금 당장 기후정의”(기후위기비상행동 9.25 집중행동)를 외치는 민중과 노동자가 기계를 멈출 수 있다. 지금은 STOP 버튼을 누르고 멈출 때다. 지구의 조절시스템이 붕괴하고 인간과 다양한 생물 종의 존재 기반이 파괴되고 있다. 민중은 노동자와 함께 ‘작업중지권’(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 ①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을 발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노동 현장에는 아직 기후위기와 노동자를 연결할 언어들이 궁색하다. 기껏해야 ‘산업 전환’, ‘일자리 위기’와 같은 경제용어일 뿐, 노동자의 권리와 책임을 담보하는 언어로 기후위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기후재난과 ‘산업재해’, ‘산업안전’을 연결하고, 기후위기 대응과 ‘단체협약’, ‘근로계약’, ‘취업규칙’을 연결 짓는 과제가 남아있다. 이를 위해 노동자와 민중의 만남을 부단히 도모해야 한다. 만남 속에서 녹색과 적색 언어의 연대를 일궈낼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얼마 전 사회변혁노동자당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충북지역 금속노동자가 노동운동의 과제로 “근로시간 단축, 일자리 지키기를 넘어선 투쟁, 기후단체협약 요구안, 민주노총 내 기후정의 부서 설치”(김성민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유성기업 영동지회)와 같은 목소리를 낸 점을 상기해본다.

상담을 통해 만난 노동자 대부분은 50~60대 이상, 노동조합 없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권리 침해에 쉽게 노출되는 조건에서 그들은 자주 분노하고, 참아내기를 반복하다가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회사의 부당한 요구에 그냥 순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참았고, 버티다가 스스로 그만두는 걸 선택했다. 그만두더라도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자 했고, 남겨진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위법행위를 고발하고자 했다. 물티슈 제조 공정에서 잘못된 라벨링을 감독청에 알려 영업을 정지시킨 생극산업단지 노동자, 오・폐수 무단방류를 고발한 금왕하수처리장 노동자, 사업주의 보조금 횡령 혐의를 알려낸 환경미화원들,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이유로 10개월째 임금을 체불하고 있는 택시회사에서 파업을 시작한 충주 하나로택시 노동자들…. 단지 개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저임금 노동착취의 고리를 끊기 위해, 누군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또 누군가는 지역사회 변화를 꿈꾸며 용기를 내고 행동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 활동과 지역사회에 곪아있는 시스템에 제동을 걸고 있다.

행동하는 소수의 노동자가 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시간과 행동을 박탈당하는 노동 현실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도 멈춰지고 있는 그들이 스스로 벽을 무너뜨리는 건 어렵다. 이 장벽은 사회의 작동자, 오퍼레이터로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민중이 노동자와 함께 싸우는 공동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 연대의 장에서 서로의 투쟁 동기를 확인하고 연결하는 상호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그때야 세상을 멈추는, 체제를 전복시키는 운동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최신기사
기획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온라인 뉴스구독

뉴스레터를 신청하시면 귀하의 이메일로 주요뉴스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