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베네수엘라는 겉으로 보기엔 정치적 안정과 형식적 민주주의, 석유로 인한 ‘경제발전’을 이룬 듯 하지만 사실상 정치적 무능력과 ‘양당 독재’, 그리고 석유 붐으로 인한 과잉 축적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여기에 국제 유가가 폭락하고 ‘푼또피호협약’의 본질이 폭로되면서 1980년대 이후 베네수엘라는 총체적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우리가 익숙하듯이, 이런 순간에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국제금융기구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처방전이 내려진다. 1988년에 재선된 신자유주의 신봉자 까를로스 안드레스 뻬레스(Carlos Andres Perez; 1974~79, 1988~1993) 대통령은 IMF의 지휘 하에 공공부문에 대한 사유화, 긴축재정, 탈규제, 무역자유화 등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물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물가는 오히려 폭등해 버스비가 한 달 월급에 맞먹는 일까지 일어나게 됐다. 빈곤은 더욱 심해졌고 농민들의 농촌 대탈출로 도시 빈민이 급증했으며, 이는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과 전체적인 고용불안정으로 이어졌다. 1989년 2월, 분노한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2천여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까라까소’(Caracaso)2) 봉기였으며 이는 이후 차베스를 탄생시킨 ‘볼리바리아 혁명’3)의 시발점이 되었다.
1992년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실패한 우고 차베스 중령은 감옥에서 석방된 후 군부 내 혁명세력과 진보적인 시민세력을 규합하여 ‘제5공화국운동(MVR)’을 창당하고,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56%에 이르는 역대 최다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차베스의 당선은 남미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사건이었다.
한편으로는 현재 남미에서 불고 있는 좌파 바람의 시발점이기도 했거니와 다자간투자협정(MAI)과 IMF 반대 등 반세계화 운동이 한창이던 북반구와 아시아에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기도 했다.
볼리바리아 혁명과 민중적 대륙통합
차베스는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확한 반대 입장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민중적 대안 체제를 만들어나가겠다고 선포했으며, 이에 따라 헌법도 새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집권함으로써 사회주의가 달성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일상으로부터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예컨대 생산수단에 대한 물질적, 지적 소유권을 전환하기 위해 모든 경제 부문에서 협동조합을 장려한다든가, 공장에서의 노동자 자주관리제를 도입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거래를 원활히 하던 국가의 역할을 재분배와 비(非)시장적 역할로 재규정하면서 자원과 부를 베네수엘라 내에서, 그리고 나아가 남미 전역에서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아메리카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아 대안(ALBA)'을 주창한다. ALBA는 미국이 추진하던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에 맞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대륙통합이 아닌 민중주도의 대륙통합과 그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의 창출을 의미한다.
실제로 차베스는 남미 민중운동 진영과 함께 2005년 11월 FTAA 협상을 결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그는 ALBA를 지향하는 대안적 무역정책으로서 '민중무역협정'(Tratado de Comercio De los Pueblos)4)을 체결했으며, 석유, 가스, 금융, 방송 등 핵심 기간산업에 대한 남미 국가 간 공동 출자 국영기업 또는 연합체를 구성했다. 남미 지역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그럼으로써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친민중적인 방식'으로 대륙통합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가장 혁명적이었던 여성들, 그리고 여성문제를 도외시한 차베스
사실 차베스가 당선되었을 때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은 우려를 나타냈다고 한다.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보다 친민중적이고 친여성적 사회를 간절히 바라면서 차베스 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래서 집권하는 과정에서 차베스는 여성들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세력이라고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집권 후 차베스가 여성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전 시기에 쟁취한 그나마 성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맴돌았다. 이전 정권 하에서 여성들은 법제정을 통해 사회 지도층에 여성을 진출시켰고, 고용평등법이나 성폭력처벌법 등을 제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말까지, 정치권과 사법계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고등법관에 25%가 진출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1990년도 35.6%였던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이 비록 상당 부분 비정규직이었지만 2002년에는 81.2%로 증가했다. 그러나 1998년에 집권한 차베스는 정부 요직에 여성을 임명하지 않았으며, 모성보호 외 여성문제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하자 여성들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도 열정적으로 가담한 혁명을 ‘여성화’시켜야 한다는 생각 하에 재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여성에 관해 진일보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차베스가 이전 정부가 설립한 전국여성회의(CONAMU)의 예산을 80%나 삭감하려하자 이에 맞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결국 차베스를 설득하여 오히려 보다 강화된 권한을 갖는 전국여성기구를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전 시기부터 지속되어온 여성운동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베스를 지지한 게릴라 출신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새롭게 자기 정체화하고 조직화하여 차베스 정권에 적극 개입을 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마도 베네수엘라 여성들은 '반여성적'인 차베스를 묵과할 수 없으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혁명과정을 자신들이 나서서 지켜내겠다는 결의를 했을 것이다.
"남녀평등 대헌법"
21세기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거시적 목표와 ALBA라는 전략을 실천하기 위해 차베스는 집권 직후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헌법을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 집권 3개월 후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투표자 92%가 제헌의회 소집에 대해 찬성하자, 다시 두 달 뒤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치러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즉시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1998년 12월 새로운 헌법이 준비되었고, 다시 국민투표에 붙여져 71.8% 찬성으로 새 헌법이 가결됐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으로 평가되는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헌법은 국명을 베네수엘라공화국에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아 공화국’으로 개명하였고, 대통령 소환제는 물론 사회복지에 대한 조항들을 대거 포함했으며, 토지와 석유 등 각종 자원에 대한 분배와 개혁 내용을 담았다.5)
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헌법이 여성들의 활발한 활동 결과 "남녀평등 대헌법(non-sexist Magna Carta)"이란 별칭이 붙여질 정도로 여성들의 요구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이나 모든 사회적 활동에 있어 남녀 차별을 금지하고 있으며, 75조에서 77조까지는 ’가족의 민주화‘를 비롯한 여성의 재생산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또한, 임신과 출산 등 재생산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차베스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인 '미션(mision)'과 같은 구체적인 정책과 연동되어 출산 및 양육을 사회화하고 있다.
86조는 공공서비스의 보편성과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88조는 “국가는 가사 노동을 잉여가치를 창출하고 사회복지와 부를 생산하는 경제 활동으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전업] 주부는 법에 규정된 사회복지를 보장받을 권리를 지닌다”고 보장하고 있다.
아울러 새로운 헌법은 성차별적이지 않은 언어로 작성되었다. 스페인어는 명사가 여성형과 남성형이 구분되어 있고, 일반형은 남성형을 따르도록 되어 있어 스페인어권의 가부장적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헌법은 모든 인칭 명사를 여성형과 남성형 모두 병기6)함으로써 언어로 표상되는 베네수엘라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 문화를 타개해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베네수엘라 헌법 내 여성 관련 조항7)
베네수엘라 헌법 내 여성 관련 조항
제5장 사회 및 가족의 권리
75조: 국가는 가족을 사회 내 자연적 결합체(natural association)로서 그리고 인간의 전체적 발전을 위한 기본적 공간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가족관계는 가족 성원 간 평등한 권리와 공평한 의무, 연대, 공동의 노력, 상호 이해와 상호 존중에 기반한다. 국가는 부와 모 또는 가장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자에 대한 보호를 보장한다.
아동과 청소년은 출생 가족의 품에서 양육받고 성장할 권리를 갖는다.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유익하지 않을 시 법에 따라 대체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갖는다.
입양은 [생물학적] 부모의 양육과 비슷한 효력을 가지며, 피입양인은 법에 따라 모든 권한을 보장받는다. 국내 입양이 국제 입양보다 우선한다.
76조: 모성과 부성은 부와 모의 혼인 지위와 무관하게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 부모(couples)는 몇 명의 자녀를 낳을 지를 자유롭고 책임있게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 행사를 보장받는 데 필요한 정보와 방법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 국가는 모성을 전반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할 것을 보장한다. 이는 임신 순간, 임신 기간, 분만, 산후까지의 전 과정을 포괄하며,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가치에 의거하여 완전한 가족계획 서비스를 보장한다.
부와 모는 자녀들에 대한 양육, 훈육, 교육, 부양, 보살핌에 대해 도외시할 수 없는(inescapable) 공동의 의무를 지닌다.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를 보살필 능력이 없을 때 보살핌을 제공할 의무를 지닌다. 위자료 지급의 강제적 의무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법으로 규정될 것이다.
77조: 자유로운 합의와 자녀에 대해 절대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에 기반한 혼인은 보호를 받는다. 남녀 간 안정적인 사실혼 관계는 법적 조건에 부합되는 한 실제 혼인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86조: 모든 사람은 의료와 모성․부성․질병․장애․중병․중증장애․특수한 필요․산업재해․고용상실․실업․노년․과부․부모 사망․주택․가족생활로 인한 부담과 그 외 모든 사회복지적 상황에 대한 비영리 공공서비스로 사회보장을 받는다. 국가는 직간접인 보험료를 통해 공동의 단일하고 효과적이며 참여적인 재원 확보를 통해 이 권리의 효력을 보장할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보험료 납부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체계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
사회보장을 위한 재원은 다른 방도로 사용할 수 없다. 보건의료 서비스와 기타 사회보장 혜택을 위해 피고용자가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보험료는 오로지 국가의 지휘 하에 사회적 이유로만 사용될 수 있다. 의료, 교육, 사회보장에 배정된 재정이 남을 경우 같은 서비스를 분배하고 이에 더욱 확대하기 위해 축적될 것이다. 사회보장 체계는 별도 기본법(organic law)의 규정을 받는다.
88조: 국가는 노동권에 있어 남성과 여성에게 평등하고 공평한 대우를 보장한다. 국가는 가사 노동을 잉여가치를 창출하고 사회복지와 부를 생산하는 경제 활동으로 인정한다. [전업]주부는 법에 규정된 사회복지를 보장받을 권리를 지닌다.
이 헌법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후 관련 법 제정 혹은 개정을 통해 여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게끔 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예컨대, 헌법을 기반으로 여성 관련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든다던가,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여 전업 주부에서 임금을 지급한다던가, 아니면 빈민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사회적, 경제적 지원을 주거나 낙태를 합법화하는 등, 현재 진행 중인 여성 관련 각종 개혁의 물꼬를 텄다.
또한, 성차별적이지 않은 언어로 작성된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헌법으로 말미암아 이후 모든 공식 정부 문서나 규정, 법령도 이런 표기법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정치적 투쟁의 성과로 정부 내 여성 관료들도 서슴없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되는 등 '페미니즘의 일반화와 확산'에 기여했다는 평가이다.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헌법이 어떠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베네수엘라 수도 ‘까라까스(Caarcas)’를 따라 붙여진 명칭이다. ‘대규모’라는 뜻이 있는 '-azo' 접미사를 카라카스에 붙임으로써 카라카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를 의미한다.
3)“볼리바리아 혁명(Bolivarian Revolution)”은 차베스가 이끄는 베네수엘라 혁명과정이다. 차베스를 비롯한 군부 내 좌파 블록과 ‘좌익 세포조직’들은 이 즈음부터 본격적인 혁명을 준비하게 된다. ‘볼리바리안’은 ‘볼리바르’의 형용사격으로, 남미 해방운동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평생을 남미 해방운동에 바쳤다. 현재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파나마와 볼리비아를 독립시키고 각각에 공화국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념은 독립된 각각의 공화국을 연방제로 연결하는 것, 즉 대륙통합이었다.
4) 애초에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제안한 민중무역협정은 신자유주의적 무역협정과 달리 호혜적 무역을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써, 예를 들어 쿠바가 베네수엘라에 안과 의사를 파견해주는 대신, 볼리비아는 광물을 제공해주고,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제공해주는 방식의 무역협정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전소희 (2006), “남미는 ‘민중무역협정’ 논의”, 민중언론참세상 (www.newscham.net) 참고
5)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헌법과 이를 제정하기 위한 과정은 이웃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도 제헌의회 소집과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6) 스페인어는 인칭 명사가 남성일 경우와 여성일 경우 다르다. 예컨대 ‘대통령’은 남성일 경우 presidente이고 여성일 경우는 presidenta이다. 통상적으로 남성형만 사용해왔는데, 베네수엘라 헌법에서는 ‘presidente/presidenta’으로 병기하도록 한 것이다. 인칭 대명사도 ‘그/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병기 사용했다.
7) 주미 베네수엘라 대사관 영어번역본(비공식 번역본)을 한글로 옮긴 것임. 원문(영문)은 www.embavenez-us.org 참조. [ ]는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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