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의 47%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여성노동자들이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빈곤화·빈곤의 여성화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차베스가 주창하는 21세기 사회주의와 ALBA를 달성하는 데 핵심이라는 인식을 관철시켜 나갔다.8) 그래서 기존 정권이 상징적 의미에서 빈곤의 여성화를 다룬 것에 비해 차베스 정권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다루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 여성 정책에 대한 기획력과 집행력을 강화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해 관련 기관을 정비하고 강화했다.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여성개발은행 설립과 전국여성회의를 전국여성기구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종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 중인데 여성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고 ‘남녀평등 대헌법’이 단지 헌법 조항으로만 남지 않도록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여성의 빈곤 퇴치 정책의 입안과 집행력 강화
① 전국여성기구 (Inamujer)
1993년 CONG은 고용평등법에 명시된 대로 정부 내 여성 전담 기구인 전국여성회의 설립을 요구하여 얻어냈으며, 그 이후 권한이 보다 강화된 형태인 전국여성기구라는 독자적 기관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차베스 집권 후 차베스를 지지한 여성들도 이런 요구에 가세하자 전국여성기구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새롭게 출범한 전국여성기구는 여성 빈곤을 야기하는 핵심 요소 세 가지를 지목하고 있다. 우선 베네수엘라 여성들이 자기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권이 없어 자기 삶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 즉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빈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남성보다 부수적이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국한되어 성별 노동 분업이 여성의 빈곤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계급과 성별은 물론, 종족, 인종, 교육수준 등이 상호작용 하는 권력관계와 사회구조로 인해 여성이 정치세력화하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여성을 빈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전국여성기구는 빈곤층 여성을 중심으로 젠더와 페미니즘에 대한 교육을 광범위하게 실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첫째, 가족 민주화 사업이다. 전국여성기구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가족을 민주화함으로써 여성이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성운동의 주요한 과제라고 설정하고 있다. 둘째, 모든 정부 직책에 대한 50%의 여성 할당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노동이 사회 모든 부문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비율이 낮은 것에 주목하여 여성의 목소리를 정치권에서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셋째, 헌법에 걸맞게 사회보장법을 비롯해 관련 법을 개정하고 구체적인 정책과 연동시켜 실제로 법이 집행되고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전국여성기구는 비록 국가 기관이라는 제약이 있지만, 여성만을 위한 법과 정책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법률과 정책들이 친여성적이고 여성 대중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전문적이면서도 통합적이고 일관성 있는 기획과 집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② 여성개발은행 (Banco de Desarrollo de la Mujer)
2001년에 설립된 여성개발은행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저리대출과 경영에 대한 컨설팅, 행정 훈련, 투자에 대한 후속작업 등을 주된 사업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본 업무는 여성의 자활을 위한 소규모 창업을 지원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 이상을 지향하고 있으며 방법 또한 색다르다. 행장 노라 가스따녜다(Nora Castañeda)는 여성개발은행이 “경제를 초월하는 인간 개발을 목표로 한다. [...] 여성의 생활수준을 향상하고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여성개발은행은 우선 바리오(barrio; 원래는 동네 또는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빈민촌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밀림, 산골 등 은행이 없는 곳을 일주일에 한번 씩 직접 방문하여 여성의 창업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여성 개인에게 지원을 하지 않고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 5-10명이 모여 조합을 구성해야만 하고 개인이 아닌 조합에만 지원을 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개인이 아닌 지역공동체를 육성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경제모델을 타파하고 연대, 참여,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경제모델 창출을 지역에서부터 실천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여성개발은행은 단지 금융 또는 경영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 아니라 여성이 실질적으로 자립하고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기타 사회복지와 연계하여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예컨대 페미니즘적 시각을 고양하기 위한 의식화 사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차별과 가정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또한 각종 사회프로그램(미션)들과 연계하여 보다 실질적인 지원이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설립 이후 지난 5년 동안 여성개발은행은 나름대로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4만 건의 저리대출을 시행했으며, 7만5천 개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한다. 물론 오랜 착취 속에서 깊은 빈곤의 수렁에 빠져있는 베네수엘라 여성들이 진정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여성개발은행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개발은행이 조합형성을 조건으로 내걸면서 집단화와 조직화를 도모한다는 점, 단지 금융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의식향상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이 중심이 되고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복지의 확충과 여성
ALBA의 정신에 따라 ‘친민중적인 방식’으로 대륙을 통합하고 헌법에 명시된 권리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국 차원에서 친민중적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차베스는 광범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문맹 해소, 빈곤 퇴치, 무상 교육 및 의료 제공 등 그 내용도 다양하다. 중장기적 개혁 프로그램으로는 군사 기초시설을 이용한 빈민원조 프로그램, 빈곤 퇴치 프로그램, 토지개혁과 대안 교육체제를 구축하는 것 등이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미션’; misión)으로는 미션 로빈슨(기초 교육), 미션 히바스(중등 교육), 미션 수끄레(고등 교육), 미션 “바리오 아덴뜨로”(공중 보건), 미션 메르깔(식량 분배) 등이 있다. 이런 미션들은 그 내용 뿐 아니라 추진 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베네수엘라의 상당 수 빈민들은 바리오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부가 공공서비스나 복지 혜택을 제공하더라도 이에 쉽게 접근하기 힘들다.
특히 이동이 안전하거나 자유롭지 않은 여성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때문에 차베스 정부는 바리오로 뻗어나가는 전략을 쓰고 있다. 가령, 볼리바리아 대학은 차베스가 석유기업 경영진들의 사교클럽을 ‘점거’해 설립한 빈민층을 위한 무료 대학인데, 교수들이 수도 까라까스에 있는 대학 본부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바리오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때로는 강의실이 없는 곳에서도 강의를 한다. 무상 의료체계인 미션 바리오아덴뜨로 또한 수도에 무상 병원을 설립하는 것보다 수백 개가 되는 바리오 지역에 보건소를 세우는 일을 더욱 우선시 하고 있다.9)
이런 무상의료 및 교육, 빈곤을 타파하기 위한 각종 복지 정책은 여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뿌리깊은 전통적 가부장주의, 오랜 군사주의 그리고 이와 맞물린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여성들에게 가혹하다. 베네수엘라의 여성들 또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여성으로서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서 극심한 빈곤과 질병, (성)폭력에 시달려왔으며, 높은 문맹률과 낮은 교육수준은 어머니 대(代)에서 딸까지 이어져왔다.
그러나 새로운 헌법으로 주부인 여성들도 독립적 수급자로서 사회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을 비롯해, ALBA의 다양한 복지정책으로 말미암아 여성들은 차츰 의식주, 교육,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또한 바리오에서의 교육은 성폭력과 성차별에 관한 교육도 포함하고 있어 교육 확대는 여성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여성들이 스스로 경제력을 확보하고 정치세력화할 수 있는 계기로서도 ALBA의 미션 프로그램은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컨대, 교육 관련 미션들의 신규 대상자 중 70%가 여성이다. 미션 메스깔 일환으로 설립된 ‘마을 공동 부엌 (Casas de Alimentacion)'과 마을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저렴한 식용품 가게를 통해 이전에는 하루에 한 끼만 먹던 빈곤층 아동 150만 명이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식수 공급도 개선되었는데, 이는 양육과 가사를 담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부담을 상당 부분 축소시킬 수 있다. 또한 임신이나 출산한 여성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지급하거나 교환권(쿠폰)을 배분하고 있다. 토지개혁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전에는 땅을 소유할 수 없던, 그래서 더욱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500만 에이커가 소농에게 재분배됐는데, 소농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여성가장 농민들이 우선적으로 배정받고 있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 및 주부들의 연금 가입
2006년 2월 차베스는 새로운 헌법에 명시된 대로 가사노동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노동절인 5월 1일부터 국가에서 가사노동자(주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계획보다 약간 늦어진 6월부터 최하 빈곤층 주부 10만 명부터 우선적으로 최저임금의 80%(185달러)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6개월 후 추가 10만 명이 또 임금을 받기 시작했다. 아울러, 주부도 독립적인 임노동자이기에
남편과 무관하게 연금에 가입하고 수급권을 부여받았다.
물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은 페미니즘 내에서도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다. 전통 맑스주의 이론에서 간과되었던 재생산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 가사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가사노동을 여성의 고유한 일로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반대 입장도 있다. 베네수엘라의 가사노동 임금지급과 연금 수급권 부여는 이 논쟁을 상기시킨다.
기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여성의 가사노동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노동시장으로 나가 유급노동에 참여하는 것을 더 중시하였으며,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공보육 시설을 널리 확충하는 정책이 핵심적이었는데 반해 베네수엘라에서는 오히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는 노선을 택했다. 또한 연금 수급권의 경우, 일본과 호주 등 일부 자본주의 국가에서 도입한 결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낮추고 전통적 가부장적 가치를 유지하는 결과가 초래된 바가 있어 베네수엘라의 연금 지급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임금 지급과 연금 수급권 부여는 아직 초기 단계라 단정적으로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의 진행 경과를 봤을 때 차베스 정권의 조치는 가사노동에 대한 실질적인 가치 인정과 임금 지급이라기보다 아직은 빈곤한 여성가장에 대한 ‘지원금’ 성격이 강한 듯하다. 즉, 비정규직·비공식 노동만 횡행하는 상황에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성들에 대해 당장의 ‘구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급과 연금 수급권 부여가 진정한 여성해방적 가치와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고유한 노동으로 고착화하고 여성을 비정규직·비공식 노동자로 내모는 성차별적 노동규범과 분업구조 그 자체를 타파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또한 여성을 복지의 수혜자로 규정하기보다 오히려 노동자이자 여성으로서 실질적인 권리를 갖는 주체로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과 연금 수급권 부여 그 자체보다 이런 조치가 다른 여성 관련 정책과 어떻게 연동되고 그 속에서 어떠한 효과를 발휘하는가에 있다.
즉,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급과 연금 수급권은 차베스 정권이 여성 노동을 둘러싼 가부장적 규범을 극복하느냐,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도 제반을 실제로 개선하느냐, 그리고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여성해방적 실천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새로운 억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급과 수급권 부여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실험’으로서 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여성의 재생산권과 건강권
베네수엘라에서는 여성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과 청소년 임신, 비위생적이고 불법적 낙태가 번창하면서 여성의 재생산권과 건강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1년에 수천 명이 비위생적인 낙태로 사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거리를 방황하거나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면서 성매매와 성폭력에 노출된 10대 여성이 낳은 아이만 연간 4만 명에 이른다.
비혼 상태에서 10대에 출산하는 소녀 중 71%가 빈곤층에 속하며, 아무런 의료혜택조차 못 받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또한 기혼한 성인 여성의 경우에도 심각한 영양 부족과 비위생적 출산 환경으로 여성과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으며,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전통적 가부장적 윤리(다른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도 독실한 카톨릭 국가이다)에 의해 출산과 양육을 포함하여 자신의 몸에 대한 의사결정권 대부분을 박탈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차베스 정권 하 여성들이 타개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였다.
볼리바리아 헌법 76조는 “[...] 부와 모의 혼인 지위와 무관하게 [...] 부부(couples)는 몇 명의 자녀를 낳을 지를 자유롭고 책임있게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 행사를 보장받는 데 필요한 정보와 방법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국여성기구를 비롯한 정부 내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이 조항이 국가나 사회적 윤리가 출산 여부 및 자녀 수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남성과 여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정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남성이 어떤 이유에서든 부재할 경우, 여성 혼자 결정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국가가 나서야 이런 여성을 지원해야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조항에 근거하여 낙태를 합법화하고 나아가 무료화하는 등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 개정과 관련 장치 및 제도 - 예컨대 전국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의 정비와 개혁, 출산한 여성 또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독신 여성을 위한 특별 예산 배정 등 - 를 도입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또 하나의 혁명
위에서 본 바와 같이, 1960년대 부상한 여성운동은 법제도 개선과 여성의 사회 진출에 많은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결국 대중과 괴리됐고,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직면하면서 그 한계가 드러났다.
그러다가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세계화를 극복하고 대안적 체제를 만들겠다면서 우고 차베스가 집권하자, 베네수엘라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비하여 여성 빈곤에 대한 보다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혁과 이에 합당한 정책을 도입하는 데 주력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다. ‘남녀평등 대헌법’을 만들어냈고, 차베스가 추진하는 각종 미션들이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이 될 수 있도록 개입하고 있으며, 여성 정책에 대한 기획력과 집행력, 효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전 시기 여성운동이 법제정과 감시하는 활동에 주력했다면, 차베스 시기 여성운동은 법 제정과 제도 개선에 머물지 않고 여성대중의 조직화와 의식화에 힘쓰고 있다. 실제로 ‘현재 진행 중’인 볼리바리아 혁명 과정에서 여성들은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 여성들은 단지 차베스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넘어 볼리바리아 혁명을 자신의 것, 즉 여성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빈민촌이나 농촌 지역 마을 위원회나 협동조합의 상당 수에서 여성이 대표직을 맡으면서 토지개혁과 물, 보건의료 관련 결정과 이행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볼리바리아 혁명은 진정 여성에게도 혁명이 될 것인가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차베스의 여성정책은 여러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성과만큼이나 과제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혁명적이라는 새 헌법을 살펴보자. 새 헌법이 재생산과 모성의 사회화를 위한 단초를 마련한 것이나, 여성의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면서 연금 등 복지혜택을 여성에게 독립적으로 부여한 점은 분명 상당한 변화이다. 또한 편부모나 법적 혼인관계가 아닌 결합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동등한 혜택과 복지를 보장하고는 있는 것도 여성에게 진일보이다. 그러나 여성과 가족 관련 조항이 모두 전형적인 이성애적 가족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헌법 75조는 가족을 “자연적 결합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가족이 사회적 구성물이자 정치적 공간임을 주장해온 페미니즘의 원칙과 사실상 배치되는 내용이다. 또한 가족 안에서의 성별 분업을 묵인하고 있는 것도 엿보인다. 이를테면 여성이 주당 가사노동에 15시간 이상 투여했을 경우에 한하여 사회보장과 연금혜택을 주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가사노동의 일차적 책임자로서 여성을 상정하고 여성을 사적 공간에 유폐시켜왔던 가부장적 성별분업의 틀을 깨지 않고 있다. 결국 새 헌법은 가족의 틀 자체는 유지시키면서 그 내부의 민주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둘째, 차베스의 여러 사회복지 정책과 여성에 대한 지원은 사실상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석유가 고가 행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유 있는 지원이 가능하지만 유한한 에너지원을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는 요즘, 미국의 끊임없는 간섭과 공작이 베네수엘라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 유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석유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정부의 이런 ‘혁명적’ 정책들은 위태로워 보인다. 차베스가 국가 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바꿨을지는 몰라도 기존 정권의 “석유를 기반으로 한 국가 모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이런 체제가 과연 지속가능한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차베스의 각종 미션들이 지속적이고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석유 뿐 아니라 다른 방식, 보다 ‘변혁적’인 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실상 가장 위태로운 것이 여성 정책이다. 여성에 대한 정책과 제도는 많은 경우 개별 사회가 정치경제적 수세기에 접어들면 일차적으로 후퇴된다는 현상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목격해왔다. 이렇게 볼 때 복지정책과 여성정책을 실현할 재정의 안정적 조달을 위한 근본적인 방식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셋째, 차베스 정권 하에서도 여성운동은 지나치게 국가에 종속되어 있다. 이전 시기 여성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도 살펴봤듯이, 국가가 주도하는 여성운동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상관없이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도 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여성운동이 국가라는 제도 공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국가와의 관계는 직접적인 개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여성정책의 성장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나, 운동이 국가와 제도를 감시하고 견인하는 역할로부터 일탈하고 이로 인해 여성운동이 기층여성의 삶과 괴리되는 양상을 낳고 있기도 하다.
물론, 차베스는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으며 당장 여성들이 이런 실험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보다 친여성적인 국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은 단지 여성정책의 수립과 집행 뿐 아니라 실질적인 조직화와 독자적 대중운동의 발전에 힘을 써야 할 과제도 안고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혁명 속의 혁명’이 진행 중이라 한다. 각 지역과 바리오가 자치조직을 만들고 이 속에서 ‘일상적인 혁명’을 진행 중이다. 차베스가 거시적 목표를 설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혁명을 진행하고 있다면,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혁명은 결국 풀뿌리 인민들이 수행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성들도 각 지역에서 풀뿌리 조직을 만들어 오랜 가부장적 착취와 억압을 타파하고 온전한 인간으로서 일상적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 중이다.
결국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편으로는 차베스 정권이 실시하고 있는 다양한 친여성적 정책들과 이 정책들이 갖는 변혁적 가능성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베스 정권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과들이 차베스라는 ‘남성’ 대통령이자 혁명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때론 싸우면서, 때로는 협상을 통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유심히 봐야 할 지점은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이 국가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빈곤한 여성대중들을 기반으로 국가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자적 조직화와 세력화를 이루어낼 것인지의 여부이다. 여성에 대한 차베스 정책의 진보성을 담보하기 위해, ‘여성을 위한 혁명‘이 일시적 개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정책에 대한 지원과 지지 뿐 아니라 독자적 사회운동의 구축과 국가에 대한 비판과 감시가 중요할 것이다.
8) 베네수엘라 여성관련 정부 기구로 1974년 ‘여성을 위한 첫 국가 기관인 대통령 직속 여성위원회(Comisión Feminina Asesora de la Presidencia, COFEAPRE)’의 구성이 최초이다. 이후 1978년 COFEAPRE는 여성개발참여부로 변화된다. COFEAPRE는 정부내 여성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진시키는 공간을 제공하였으며 여성운동을 결속시키는 기반이었지만, 재원을 거의 조달받지 못하고 정식적인 내각의 지위를 할당받지 못해 힘을 발휘하는데 한계적이었다. 이어 등장한 여성개발참여부도 실질적인 지원이 없어서 재정 부족은 물론 전임 직원도 없는 상태의 한계적인 여성기구였다. 이에 비해 전국여성기구는 보다 권한이 강화된 기구이다.
9)자세한 내용은 전소희, “혁명은 교육이다", 민중언론 참세상; 정혜주, [정혜주의 바리오 아덴트로] 기획연재, 민중언론 참세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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