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종이편지와 로자 파크스의 진실

[칼럼] "누가 로자 파크스를 말하는가"

누가, 아니 정확히는 안철수씨가 미국 흑인시민권운동의 기폭제가 된 로자 파크스(Rosa Parks)의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투표합시다'라고 캠페인했다.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박원순 변호사를 지지하면서 내놓은 이른바 '종이편지'에 나온 내용이다. 근데, 사실 이는 그 로자 파크스 사건과 그 역사적 맥락을 아주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한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로자 파크스’같은 미국의 흑인들을 분노하게 하고 흑인 시민권운동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투표를 못하게 하는 그 나라의 민주주의'였다. 미국식 민주주의 내에서 남부(the South)는 소위 '짐 크로(Jim Crow)'체제라고 해서 19세기 말부터의 흑인 배제의 민주주의였다. 말하자면 미국식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체제’(공공시설에서 흑백분리를 법제화하였고, 로자 파크스라는 용감한 여성은 버스 위에서 이에 저항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이니 '보편참정권'이 보장됐고, 남부의 흑인들 역시 제도적으로는 투표권을 가졌다.

하지만 투표를 막는 온갖 장치들과 폭력 앞에서 흑인의 투표권은 1960년대 중반까지 유명무실했다. 백인 기업주들이 흑인 노동자들의 투표를 막기 위해 감금하기도 했고, 흑인의 유권자 명부를 탈취해서 땅에 파묻는 경우가 빈번했고, 그리고 심지어 살아있는 흑인을 죽은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국 흑인들은 평생 투표 한 번 못해보고 생을 마감하는 민주주의였다.

  노들야학의 이라나 활동가가 10월26일 성북초등학교내 투표소 앞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다. 계단이 있는 건물 2층에 투표소를 설치한데 대해 “사지를 들려서 올라가서 투표할 수 없다, 스스로 투표하게 해달라”며, 장애인 참정권을 주장했다. [출처: 트위터 @sadd420]
한국에서 10월26일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일부도 그러했다. 장애인의 '접근권'을 깡그리 무시한, 2층 투표소가 십 수 군데였다고 한다. 어떤 장애인은 투표소 앞에서 투표를 거부하며, (휠체어를 누군가에 의해) '들려서' 하는 투표가 아니라 '스스로' (접근해서) 투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시위했다.

그리고 일부는 진지하게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했다. 한 후보의 선거홍보 구호였던 "닥치고 투표"를 문제 삼으면서, 이런 말을 하기 전에 모두가 '투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데 뭐라도 했느냐고, 그러고 나서 말하라고 일갈했다.

2교대로 하루 24시간 일하는 노동자들, 간병인들 간호사들, 그리고 지난 10월10일 파업에 들어간 인천의 삼화고속 노동자처럼 화장실 갈 새도 없이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는 운수노동자들, 이들 노동자들의 참정권은 현실과 그 현실을 버려두는 제도정치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자 파크스의 얘기를, 투표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한 여성흑인의 얘기로 만들고, 그리고 그를 한국의 투표독려운동에 사용하는 것은 정말 역사적인 맥락으로 볼 때 아니라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흑인시민권운동은 투표를 못하게 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문제 삼았고, 그에 대해 흑인들과 그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로자 파크스 사건을 기폭제로 삼아서 이른바 60년대 흑인 시민권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 환기하고 싶은 점은, 그때 미국의 60년대에도 '희망버스(hope bus)' 비슷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쪽, 즉 뉴욕 등 동부해안과 시카고 등 복동부 도시들의 학생운동가들과 대학생들은 긴 버스의 행렬로 남부의 흑인과 연대하기 위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미국 사람들은 이를 '뜨거운 여름(hot summer)'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버스의 행렬은 ‘프리덤 라이드(자유의 동승: freedom ride)’ 이라고 불린다. 이 버스의 행렬은 애초 1947년에 이뤄진 대법원 판결, 즉 흑백분리 버스탑승정책의 위헌을 판결한 사건을 기념하여 북부에서 흑백혼성의 버스로 북에서 남으로 갔던 것이 최초의 기원이다. 근데 1961년 이를 다시 살려 북부의 학생운동은 캠퍼스마다 자유의 버스를 조직해 남부의 흑인과 연대하기로 했던 것이다,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그들은 남부의 앨라배마, 미시시피, 아칸소 주 등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 대학생들은 투표함과 유권자 명부를 지키고, 투표장에 가려는 흑인을 보호하고 흑인들과 함께 시위했다(당시에는 이 정도를 하는 것조차 끔찍한 결과를 불려오기도 했다. 흑인은 린치당하고, 일부는 심지어 교수형을 당하기도 했고, 그리고 백인 학생운동가들은 납치를 당하기도 하고 살해당했다).

자못 흥미롭지 않은가 말이다, 미국의 ‘자유의 버스’ 행렬이 학생운동과 흑인의 연대를 통해서 흑인 배제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강하게 문제 제기했다면, 올 여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던 ‘희망의 버스’는 노동과 이 사회의 연대로 노동배제의 한국 민주주의를 부각시켰다는 것. 그리고 그 때 로자 파크스가 있어 흑인시민권운동의 불씨를 당기고 사회적 연대를 조직하는 계기를 열었다면 한국에서는 김진숙이 노동의 시민권을 주장하고 이 사회의 노동연대를 생각하게 만들고 희망버스를 여는 계기가 됐다는 것.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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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정권 , 김진숙 , 안철수 , 로자 파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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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1

    투표권 없다 .......

    투표권은 고엽제 파묻는 유태자본 에게 있다.

    이런 편가르는 나쁜투표는 거부한것이 옳은
    선택이란다

    215만 25.6-7% 에서 진보당 몇개당인데

    나경원 지옥에서 잘싸운거다

    나경원 내가 그냥 댓글로 뽑아서
    각성 [覺醒]해라 하고 지옥 보낸거니까
    ㄱ날 당일날 나쁜 투표거부운동했거든


    박원순 겨우 이긴거재

    안철수 조국 이준구등 폴리페서로 묻어버렸재
    내가
    경제도 모르는놈이 교수하고
    법도 모르는놈이 법대교수하고

    여기 신문사 기사댓글이 업다
    그저 간혹 게재되기도 하지만

    특히 신문사 기사댓글 쓰는 자들은
    인터넷이용자률에서 1%-2% 정도 이다
    아무도 말들여놓지 않은 이쪽에서
    글을 쓰고 있다.

  • 이형직

    안철수 교수 편지를 잘못 이해하신 듯.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니면 삐딱하지 않은 시선으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안철수 교수가 로사 파크스를 언급한 것은 투표권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투표를 하고 싶었지만 못한 여성이라는 표현이 어디 있는지?), 변화를 위한 작은 몸짓, 행동... 그리고 그것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몽고메리 버스 보이콧)가 결국 큰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몽고메리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면, 거기 참여했던 흑인들은 체포와 린치, 해고를 각오했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이 아닌, 수많은 흑인들이 1년 넘게 꾸준히 동참했기 때문에 결국 주정부도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죠.

    차라리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 씨를 로자 파크스와 비교하며, 그 당시 흑인들이 버스 승차거부에 동참함으로써 그녀를 지지했듯이, 서울시민들도 (변화를 원한다면) 투표로 참여를 하라고 독려하는 메세지라고 보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죠, 어느 쪽의 해석이 맞을지... 희망버스 비교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자위하는 꼴이 우스워서...)

    게다가, 닥치고 투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이며 투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인지? 투표율이 50%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을 향해 투표를 독려하는 저들에게 '모두가 투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을 잘못 찾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건 당연히 선관위에 가서 이야기해야죠. 정치권에 가서 이야기해야죠. 그들이 그 시스템을 만들었고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니면, 장애인분들이 선관위에 대해 시위한 것을 가지고 괜히 평소에 본인이 맘에 안들었던 나꼼수를 끌어다가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암튼, 생각은 자유라지만, 적어도 객관적 사실하에 글을 썼으면 좋겠네요.

  • 하청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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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청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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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청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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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직/ 이 글의 요지를 잘못 파악하신 것 같은데, 로자 파크스는 투표독려를 요구한 사람이 아니라, 투표를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권력에 맞서 싸운 사람이라는 거죠. 로자 파크스를 비유하려면 최소한 김진숙과 했어야 하지 않겠냐는 건데.. 이형직님이야말로 편견없이 다시 잘 읽어보시길....

  • 이실직고

    이형직씨/ 이 글의 요지인즉슨, 정치를 도덕론적 당위로밖엔 못다루는 프레임, '작은 몸짓'들이 사실상 불가능한 여러 수준의 조건들부터 건드려야 "변화"란 말도 공허한 공갈빵 수준을 넘어설 거란 얘기 아닌가요. 안철수씨의 파스크 인용은 이런 점을 환기하는 게 아니라 되려 뭉개버렸단 얘기고. 아무리 인용의 맥락과 해석이야 일단 인용자 맘이라지만, 그에 대한 시비마저 님처럼 신경질적으로 반응해도 되는 건 아니죠. 중요한 지적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템"을 바꾸는 사람들이 그걸 만든 사람들, 그래서 그 시스템으로 재미보는 이들이니 닥치고 투표하란 쪽에 뭐라 하는 게 부당하단 주장이야말로 참 어이없는 소리군요. 무늬만 어설프게 바뀌면, 특권화된 상황 자체는 냅두고 그 특권의 확장만 이뤄지면 되고, 그럴 수 있다고 여기시는 모양인데.. 역사적의 의미심장한 변화/사건들 중에 시스템을 만든 이들이 시스템상의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선 적이 있었던 가요? 스피노자 아저씨가 "무지는 주장이 아니다"라고 했던데, 남한테 잘난 척 말라고 하기보다 그런 자격지심 안 들게 스스로 좀 안다는 교양과 상식부터 확실히 점검하는 게 먼저 같네요. 중요한 지적에 님같이 신경질 내면, 정치가 중차대한 변화의 계기들을 여는 게 아닌 볼거리용 자위행위 되는 건 순식간이죠. 최소한 난 이명박들 따위완 달라 정도로 정치적 알리바이를 만드는 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치의 최대치라 여기시는 모양인데, 사실이 이러하다면 적어도 당분간 닥쳐야 할 쪽은 이형직씨 같은 모범[애국?]시민 아니겠냔 겁니다.

    그런 줄이나 알고서 좀 짜증을 내고, "객관성"이니 "의도" 운운하셨음 해요. 솔직히 다 필요 없고, 이건 뭐 하자는 삽소리 메들린가 싶은 심정입니다만.

  • 정정 필요한 듯

    로자 파크스 사건은 단순히 선거권에 대한 흑인의 배제가 아니라, 흑인과 백인을 전 사회체계가 차별화하는 것에 대한 저항운동. 안철수의 편지가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칼럼도 그 사건을 잘 못 이해하는 듯.

  • 민족해방


    골방에 않아 있는 우물안개구리가
    천하의 앞날을 내다보는
    안선생의 지략을 따라올수 있겠느냐 ?

    참 안타까운 사람이로고....

  • 소금꽃

    권영숙 씨. 사안의 폐부를 관통하는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기 '정정 필요한 듯 님'의 지적대로 "안철수의 편지가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칼럼도 그 사건을 잘못 이해하는 듯" 합니다. 글의 종결어,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라는 오만한 문장은 참 눈살이 찌푸려지는군요.